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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를 건너는 이사라니

해외이사에 임하는 자세

by 김글인

올해 안에 한국을 떠야 한다. 내 인생에 해외 살이가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남편의 주재원 발령으로 두 딸이 1학기를 마치는 시점에 폴란드행을 결정했기 때문이다. 두 딸은 중3, 중1로 큰 아이는 이제 막 사춘기를 벗어나고 있는 듯하고, 둘째는 이제 막 파릇파릇하게 중학생이 되어 사춘기 최고치의 호르몬을 찍고 있는 중이다. 두 사춘기와 함께 보내는 길고 긴 방학이 끝나고 한국에서의 마지막 학기가 시작되는 날, 나는 아이들을 학교로 치워버리는 것과 동시에 살림살이들도 치워버리기로 했다. 아이들이 없는 집이라야 나도 의욕적으로 뭔가를 시작하게 되는 엄마 근성이 몸에 밴 탓일까. 3월 4일은 아이들의 새 학기 개학날이면서 나에게는 봄맞이 대 정리 시작날이 되었다.


2008년에 결혼하여 이제 17년 차가 되었다. 신혼 때 각자의 단출한 짐으로 시작했던 집은 그야말로 SNS에서 자랑스럽게 내보이는 '남의 집' 인테리어처럼 여백의 미로 뽀송뽀송했었다. 그 여백의 미를 우아하게 채워보고자 둘이서 예쁜 걸 구경하면서 액자나 장식 소품도 사들이곤 했더랬다. 그랬던 때가 있었나 싶을 정도로, 이제는 두 아이가 태어나고 자라는 과정에서 생긴 많은 물건들로 집은 켜켜이 쌓여있었다. 아이들이 어릴 때 필수로 여겼던 육아용품들은 이미 처분했지만, 초등학교 아이들에게 필요한 물건 또한 어마어마했다. 사춘기가 시작되며 각자의 방에 각자의 물건들이 생기면서는 내 맘대로 손댈 수가 없으니 더 답답한 노릇이다. 그러나, 나는 4인 가족의 살림살이를 컨테이너에 실어 배에 띄워 보내야 하는 중차대한 작업을 앞두고 있으니, 비장해지지 않을 수 없다. 남편은 이미 폴란드와 한국을 왔다 갔다 하며 일하고 있고, 이것은 오로지 나의 몫. 국내 이사를 두세 번 해봤으나, 국내의 포장이사는 사소한 것까지 그대로 옮겨주는 가뿐한 이사였음을 깨닫는다.


집 안을 둘러보며, TV는 가져가고, 식탁도 가져가고, 저 옷장은 버리고, 저 서랍장은 당근마켓에 팔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면, 그 안에 있는 잡다한 물건들이 떠오른다. 그 안에 버릴 것들과 가져가야 할 것들이 혼재해 있음을 깨닫고, 어마어마한 물건들의 홍수에 머리가 아파온다. 잘 보관해두다 보면 나중에 꼭 쓸 일이 있더라, 했던 물건들은 굳이 바다를 건너갈 필요는 없으니까.


저 중에 한 칸이 우리 가족 살림살이가 될 것이다


바다를 건너는 이사란 TV에서 무역수지 흑자를 얘기할 때나 나오는 컨테이너선을 연상시킨다. 차곡차곡 쌓아 올린 컨테이너 중 하나에 우리 가족의 살림살이가 들어가고 부산항이나 인천항에서 출발할 것이다. 나와는 전혀 관련이 없다고 생각했던 세상과 맞닥뜨린 기분이다. 컨테이너를 실은 배가 이삿집을 싣고 도착하는 데에는 두 달은 걸린다고 하니, 지구 반바퀴를 도는 과정이 어마어마하다는 것을 새삼 느낀다. 구글 지도를 열어서 우리나라의 위치와 폴란드의 위치를 확인하고 배가 이동할 경로를 가늠해 본다. (음, 저기서 먼지만 쓰고 있는 저 지구본도 당근마켓을 이용해 처분해야겠군.) 세상에, 차라리 미국이 더 가깝겠다. 우리나라에서 유럽은 해상 운송을 하기엔 경로가 꽤 복잡해 보인다. 아프리카의 희망봉을 돌아가지는 않을 테고, 말로만 듣던 수에즈 운하를 지나가겠군? 지난겨울 방학 동안 중3 큰 아이와 쥘 베른의 <80일간의 세계일주>를 같이 읽었는데, 영국에서 출발하여 지구 한 바퀴를 도는 일정 중에 지중해에서 수에즈 운하- 인도-말레이반도의 말라카 해협-남중국해를 거치는 이야기가 태평양을 건너는 것보다 더 복잡하고 흥미진진했던 것이 기억난다. 비행기로 날아가는 우리와는 달리 우리 살림살이들은 지난한 경로를 이동해 우리와 만나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 짐을 선별하고 정리해서 보내야 하는 나의 임무는 얼마나 막중한가. 2025년 새해가 시작되고도 새로운 계획이나 포부를 세우기보단, 기존의 일상을 이루고 있던 것들을 정리해야 한다는 생각에 왠지 우울했던 게 사실이다. 이제 새 봄이 되었으니, 다시 새롭게 의욕을 불태워본다. 대대적인 짐 정리를 시작으로!


이삿짐의 지구 반바퀴


브런치북을 써야겠다는 아이디어는 당근마켓 거래를 통해 느낀 점에서부터 시작되었지만, 단순한 중고 거래 후기뿐 아니라, 물건 각각에 대한 추억이나 쓸모에 따라 중고 거래 이야기의 감회도 달라지게 되므로, 주제를 좀 더 넓게 잡아본다. 내 삶과 감정의 기록이자, 누군가에게는 인사이트를 줄 수 있는 글이 되길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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