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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글인 Oct 21. 2024

[틈]을 통해 들여다본 내 '느림의 힘'

비효율이지만 효율적인 나의 취미, 뜨개

오늘의 [틈]에서 아주 반가운 단어가 눈에 들어왔다.


"가장 효율적인 비효율"


거의 동시에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반어적인 이 표현에 딱 어울리는 나의 뜨개. 비효율적이지만 효율적인 나의 뜨개이야기를 소개한다.






두 살 터울 유아기 딸들의 의식주를 오롯이 책임지며 엄마로서의 일상만으로 가득 찬 나날이 이어지고 있었다. 반짝이는 아이들의 얼굴을 보며 함께하는 행복, 그러나 나의 존재는 온 데 간 데 없는 풍요 속 빈곤에서 허우적거리다가 드디어 숨통이 트이는 날이 찾아왔으니, 드디어 둘째가 4살이 되어 어린이집에 보내고 나만의 시간이 생긴 것이다. 아이들에게 뜨개 인형을 만들어주고 싶다는 오랜 생각을 행동에 옮겨 볼까, 조심스레 근처의 뜨개 공방을 찾았다. 뜨개 기초를 배우고, 인형 하나를 완성하면서 나에게 손재주가 있다는 사실과 함께 아주 오랜만에 성취감을 느꼈다. 그렇게 시작된 나의 뜨개 취미는 아이 키우며 사는 주부로서의 내 삶에 휴식처가 되어주기도 하고, 아이들에게서 분리되어 내 존재에 집중하는 기회이기도 하며, 성취감을 채워주는 도구가 되어 주기도 하면서 꾸준히 이어졌다.


둘째가 초등학교에 들어가고 코로나가 터졌다. 집에서만 이어지는 생활은 그야말로 혼돈의 시기였으나, 뜨개가 있으니 나는 그럭저럭 잘 버텨내고 있었다. 뜨개와 함께 한 시간이 누적된 만큼 나는 뜨개에 웬만큼 자신감이 붙어 있었고, 내가 만든 작품에 나 혼자 감탄하고 마는 것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 블로그에 기록으로 남기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그려오는 그림 그대로 인형을 만들어내면, 아이들은 본인의 그림이 탄생시킨 인형에 엄지 척을 세우며 기뻐했다. 뜨개를 하는 과정은 나에게 몰입과 힐링의 시간이 되었고, 그 결과물은 나에게는 성취의 기쁨, 아이들에게는 엄마가 만들어준 최고의 선물이 되는 것이었다. 이런 일상을 SNS에 남기고, 나의 뜨개 인형을 함께 만들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도안을 만들어 나누기도 하면서 나는 코로나 시기에도 즐거운 추억을 채울 수 있었다.


우연한 기회로 SNS를 통해 근처 장애인복지관에서 뜨개 강사 제안이 들어왔다. 나도 어쩔 수 없는 편협한 인간이었던지라, 장애인을 접해보지 않은 좁은 시야로 보이지 않는 두려움도 있었고, 장애인을 내가 가르칠 수 있을까 의구심도 들었다. 워낙에 신중하고 조심스러운 성격인 나는, 아주 어렵게 ‘그냥 한번 해보지 뭐’를 끌어내기에 이르렀다. 그렇게 복지관에서 만난 장애인 수강생들은 주로 다리가 좀 불편할 뿐 일반인과 다를 게 없는 어머니 나이대의 할머니들이었다. 이제 갓 마흔이 된 어린것이 선생이라 불려도 될까 싶을 정도로 거뜬히 본인의 뜨개를 해나가시는 어르신들은, 장애인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있던 나를 스스로 되돌아보게 만들었다. 처음엔 영문 약자로 된 도안을 보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던 분들이 나중에는 설명도 하기 전에 벌써 이만큼이나 완성해서 자랑을 늘어놓으셨다. 어린 선생이 살갑고 수다스럽게 풀어내는 입담으로 일주일에 한 번 왁자하게 웃고는, 일주일간 소소하게 시간 보낼 뜨개거리를 챙겨 들고 즐거워하시는 것을 보며, 직장 생활에서도 느껴보지 못했던 성취감을 느끼는 나를 발견하는 것이었다. 내가 느낀 '치유와 힐링의 뜨개'를 타인에게 나누어주는 과정에서 내 마음속에는 따뜻한 감정이 몽글몽글 피어나고 있었다.




내가 뜨개를 하면서 느꼈던 '힐링의 느낌', 복지관 어르신들이 나와 함께 웃으며 나눴던 뜨개의 본질은 무엇일까. 그즈음부터 나는 이제 취미로서의 뜨개를 넘어서서 뜨개에는 뭔가 본질적인 힘이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다. 단순한 공예 활동을 넘어, 인간의 내면에 어떤 긍정적인 작용을 하는 것 같다는 보이지 않는 확신이 마음속에 자리 잡기 시작한 것이다.


인간관계에서 느낀 상처나 나 자신에 대한 정체성 등으로 불안이 커질 때마다 여전히 나는 실과 바늘을 잡았다. 그러다가 <트라우마여, 안녕>이라는 책에서 눈이 번쩍 뜨이게 하는 구절을 발견했다.



뜨개질이 나를 살렸다


부드럽고 반복적인 신체활동인 뜨개질이, 뇌의 전반적인 밀고 당기기 시스템에서 볼 때, 탐색 활동인 뜨개질과 분노 회로가 동시에 이루어질 수 없으므로 트라우마나 슬픔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치유의 효과가 있다는 것이었다.


 뜨개질은 다음과 같은 감정 반응의 양식을 따른다. ‘시작한다. 몰두한다. 끝낸다. 뜨개질 모임 사람들이 모두 웃어준다. 거울 뉴런 때문에 당신은 따라 웃는다. 그 웃음으로 인해 기분이 좋아진다.’ 한 줄을 뜰 때마다 감정은 점차 고조되었다가 가라앉는다. 그리고 모자나 스카프나 스웨터를 짜는 전체 작업을 할 때는 감정이 더욱 고조된다. 감정의 고조를 나타내는 종 모양의 그래프는 큰 그래프와 작은 그래프가 어우러져 아름다운 프랙탈 무늬를 만든다. 아름다운 무늬를 보며 우리는 행복해진다.


이거다! 뜨개가 좋긴 좋은데, 마냥 뜨기만 하는 것만으로는 어딘가 허전한 기분이었다. 보이지 않지만 어렴풋이 느껴지는 뜨개의 가치를 내 정체성과 연결고리를 찾고 싶었다. 그러나 실체적, 언어적 표현으로 설명할 수 없는 막연함이 있었더랬다. 뜨개는 나에게 어떤 취미 이상의 것이라고 느껴왔는데, 그게 이렇게 과학적 작용으로 설명 가능한 실체의 것이었다니. 뭔가 안 풀리던 매듭이 속시원히 해결된 느낌이었다.



작은 무늬가 반복되며 유사한 큰 무늬를 이루는 뜨개의 프랙탈 리듬은 우리를 행복하게 한다.



뜨개는 그동안 나를 살리고 있었다. 엄마, 아내, 딸, 며느리의 역할에만 골몰하느라 지하 세계로 떨어져 있던 나를 지상으로 끌어올려주고, 불안에서 한 걸음 물러나 나를 직시하고 바로 서게 해 주었다. 산소호흡기로 내 심리적 생명의 불씨를 되살린 후에는, 사람들과 뜨개를 나누는 과정에서 맑은 공기를 깊게 호흡하며 나 스스로를 제대로 볼 수 있었던 것이다. 나를 사이에 두고 뜨개를 만났던 사람들도 같은 에너지를 얻으며 즐거워했던 것이 분명했다.


기성복 스웨터 한 벌을 저렴한 가격으로 쉽게 사서 입을 수 있는 세상, 뜨개로 만든 소품들도 온라인에서 얼마든지 주문할 수 있는 세상이다. 뜨개 활동은 기성품을 구매하는 것보다 더 비싼 비용, 시간, 노동력을 투자해야 하는 것이기에 그야말로 '비효율'적인 활동이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세상에서만 그러하다. 뜨개의 행위가 이루어지는 곳에서는 보이지 않는 작용이 일어난다. 정신적, 심리적인 영역에서는 매우 '효율적인', 환상적인 작용.


뜨개로 만든 소품들을 주변 지인들에게 선물할 때마다 팔아보라는 말을 수도 없이 들었다. 그러나 시간에 쫓겨 공장처럼 만들어내는 뜨개는 생각만으로도 숨이 막힐 것 같았다. 뜨개를 그렇게 하기는 싫었다. 한편으로, 남들은 수완 좋게 수익 창출의 길도 잘 뚫어내는데 나는 왜 내키지 않는지, 그런 내가 의아했었다. 그러지 못하는 내가 못나 보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제는 내 뜨개의 의미가 조금 더 또렷해진 느낌이다. 뜨개의 가치, 느리지만 정신적인 효율을 지향하는 뜨개 행위의 가치를 나는 계속해 나가고, 전파하고 싶어 한다는 것.


이랬던 내 생각을 소환해 내고, 뜨개 하는 행위를 확장해 글로 풀어내는 행위로 이끌어낸 것은 아주 작은 틈에서 발견한 짤막한 텍스트였다.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새어 나온 빛으로 인해 의외의 위안과 아이디어를 얻은 느낌. 바람에 나부끼는 커튼 사이로 아주 살짝 보이는 틈 너머에 새로운 세상이 있다. 내 시야를 확장시켜 줄, 새로운 빛이 새어 나오는 또 다른 틈들이 내 주변에 숨어있지는 않은지 눈을 크게 뜨고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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