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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병모 <파과>

by 예인
60대 여성 청부살인 방역업자인 ‘조각’과 얽힌 인물들의 이야기.

제목 ㅣ『파과』
저자 ㅣ 구병모
분야 ㅣ 소설



파과, 破瓜

여자의 나이 16세를 이르는 말


P253. 죽는 날까지 무한 반복되는 어제에 갇혀 사는 사람.

건조하고, 차가운 삶을 살아가는 60대의 조각이 사람을 죽이는 일을 시작하게 된 것은 10대 시절 ‘류’를 만나게 되면서부터이다. 아내도, 아이도 있는 류에게로 자꾸만 향하는 조각의 시선. 류가 조각에게 “지켜야 할 건 만들지 말자”라는 말을 했을 때, 그런 류가 조각을 먼저 떠났던 10대 시절에 그녀는 갇혀 있다.


파과, 破果

흠집이 난 과실


P255. 최고의 시절에 누군가의 입속을 가득 채웠어야 할, 그러지 못한, 지금의 시큼한 시취를 풍기는 덩어리에 손을 뻗는다.

P342. 사라진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이 농익은 과일이나 밤하늘에 쏘아 올린 불꽃처럼 부서져 사라지기 때문에 유달리 빛나는 순간을 한 번쯤은 갖게 되는지도 모른다. 지금이야말로 주어진 모든 상실을 살아야 할 때. 그래서 아직은 류, 당신에게 갈 시간이 오지 않은 모양이야.

P279. 내 눈이 당신을 응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며, 이 눈으로 심장을 흘리고 다녔기 때문입니다.


그런 그녀는 30대 강박사를 우연히 만나게 된다. 조각은 왜 자꾸만 품지 않아야 할 마음을 갖게 되는 걸까. 그럼에도 조각이 옳지 않다는 걸 알기에 바로잡으려고 한다. 마음이란 어찌할 수 없는 것이구나.


소설의 시작부터 끝까지 복숭아가 나온다. 그것은 조각의 삶을 대변하는 상징임을 알았을 때 전율!



‘파과’를 읽으며 작가가 사용하는 단어들과 문장에 반했다.

P62. 자신의 세부를 구성한 부속품은 아직 단종의 시기를 맞이하지 않았다.

P206. 자기의 말들이 조악한 질감과 형태가 있어서 밖으로 나오는 순간 그대로 과자처럼 바스러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P93. 탯줄과도 같은 감정이었다. 그것도 간신히 영양을 공급하다 불현듯 아이의 목을 단단히 감아버린 탯줄로, 언제 죽음으로 이어질지 모르는.

P231. 마음 어딘가 파인 도랑에 미온수가 고였다.

P211. 갓 쪄낸 떡처럼 따뜻하고 말랑한 가정을 다만 곁눈질로 부러워함으로써 자신의 자리를 거듭 확인하기 위함이다.



뒤돌면 잊어버리는 것이 사람이라는 걸 너무 느끼는 요즘이다. 좋은 이야기들이 내 곁에서 계속 내 마음을 두들겨 주고 있어 참 감사하다.

P74-75. 바닥을 구르는 마른 낙엽 같은 인간들이라도 너 자신의 모든 역량을 머리끝까지 끌어올려서 상대해. 자꾸 얕봐가면서 식은 죽 먹기라고 팔랑팔랑 덤비다간 쓰지 않은 힘의 양만큼 너에게 되돌아올 테니까.

P168. 무언가를 하기로 생각하고 있다면, 설령 그것이 가벼운 인사일지라도, 언제나 지금이 아니면 안 된다. 요즘 같아서는 더욱 그렇다. 돌아서면 곧바로 자기가 무엇을 하려 했는지 잊고 마는 일상이니까.



무덤해지는 마음. 마음을 잃지 않으려면 깨어 있어야 한다.

우리는 무덤해지는 마음과 당연해지는 순간들을 돌아봐야 한다. 오늘 걸어온 길에서 본 사소한 순간에도 더 많은 것을 느낄 수 있다면 삶이 더 풍성해질 것이다.



이야기의 힘

P153. 자신에게 친절하지 않은 세계의 본색을 이미 충분히 확인하고 떠나온 길인데도, 아직도 그 이면의 한 점 온기를 품었을지 모른다는 기대. (10대 시절 조각)

P179. 이제 와서 타인의 눈 속에 둥지를 튼 공허를 발견하고 생겨나는 연민이라니, 살과 뼈에 대한 새삼스러운 이해라니. (60대의 조각)

조각은 스스로를 사랑과 연민, 그 감정들이 배제된 채 사는 인간이라고 여겼지만 그녀의 삶의 구석구석에는 온기가 있었다. 실존하지 않는 조각의 삶이지만 소설 밖에 있는 나는 내가 마주했던 따뜻한 순간들을 떠올리며 온기를 느꼈는데, 이것이 이야기의 힘이지 않을까 싶다.



- 좋은 문장들을 발견하고, 기록하고자 합니다.
-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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