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궁금하시다고요? 하지만 들어보세요.
세상 그 어떤 젊잖은 선비도 내 새끼 자랑엔 양보가 없는 법이다.
반려동물을 기르는 사람 앞에서 함부로 내 새끼 자랑을 시작하지 마라. 자랑은 그의 사진첩 안에 있는 모든 사진과 스토리를 들을 때까지 끝나지 않을 것이다.
2.
지금의 나는 독립을 하여 사람 2, 강아지 1, 고양이 2의 다종가정(?)에서 살고 있다. 주변 사람들에게 집에 강아지가 있다고 할 땐 '그렇군요.' 했다가, 고양이도 있다고 하면 조금 신선해한다. 하지만 더 나아가서 '사실은 고양이가 두 마리나 됩니다.'라고 하면 다들 신선을 넘어 신기해한다. 놀랄 만큼 놀란 후 대화의 순서는 단연 합사에 관한 이야기로 흐른다. 같은 종끼리도 힘들다던 합사를 대체? 어떻게? 여기서 나와 동거인은 한껏 콧대를 세우고 어깨를 으쓱이면서 얘기하게 되는 것이다.
"합사요? 하루도 안 걸리던데요?"
지금부터 시작하는 이 이야기는 대놓고 하는 우리 집의 자랑 퍼레이드다.
안 궁금하시다고요? 하지만 들어보세요.
인생은 60부터, 견생은 10살부터
2-1.
첫째는 앞서 이야기했던 해피다. 우리 집 막내였던 해피는 내가 동거인과 집을 합치며 얼결에 이 집에 첫째가 되었다.(족보로 따지자면 복잡하니까 나이순으로 첫째, 둘째, 셋째로 하기로 했다.) 해피는 사람을 좋아하는 순둥이면서 동시에 겁쟁이 중의 겁쟁이다. 하찮은 사회성을 지닌 관계로 산책하다가 다른 강아지라도 마주칠라 치면 꼬리를 숨기고 도망치기 바쁘지만, 그래도 요 몇 년 동거하는 고양이들 덕인지 쫌쫌따리 먼저 들이대는 경우도 생겼다. 10살이 넘은 갱얼쥐가 보여주는 이 작고 작은 변화가 얼마나 대단한지 모른다. 야 너 좀 한다?
하지만 진짜 칭찬할만한 일은 따로 있다. 가족과 살 때의 해피는 오로지 실외배변만 하는 강아지였다. 강아지를 기르는 사람은 이 한마디로 충분히 그 고충과 고통을 통감할 것이다. 내가 부모님과 함께 살 당시, 가족이 모두 일을 하고 있었으므로 기껏해야 아침, 저녁 두 번 산책이 가능했다. '소형견에게 하루 두 번의 산책이면 충분하지.'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볼 때 해피의 건강에 결코 이로울 리 없었다. 이건 내 추측이 아니라 매년 건강검진을 할 때마다 지적받는 부분이었다. 물론 실내배변을 해보고자 시도를 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번번이 해피는 참고 참다가 이불이나, 침대, 안방 등에 배변실수를 하는 것으로 끝나버렸다. 그리하여 이것은 내가 해피를 데리고 독립을 하면서 가장 먼저 바꾸어야 할 가장 큰 숙제였다. 하지만 벌써 해피는 10살, 아니 사람 나이로 족히 40살이 되도록 실외배변만 해왔는데요. 훈련을 시작하기도 전부터 불쑥불쑥 고개를 내미는 실패의 씨앗을 나는 애써 모른 척했다.
할 수 있다. 아니, 해야만 한다. 그런 말도 있지 않은가.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 아니, 이게 아니고. 제 버릇 개 못 준다. 이것도 아닌데. 대체 왜 세상에는 습관을 고치지 못한다는 부정적인 속담만 있을까. 절망의 끝에 기댈 수 있는 건 천만 반려동물 시대를 따라 만들어진 반려동물교정 프로그램뿐이었다. 동아줄을 붙잡는 심정으로 해피와 비슷한 사례를 가진 영상을 찾아 몇 번이고 돌려보았다. 우리는 해내야 한다. 반드시!
리드줄을 쥔 손에 땀이 났다. 해 본 사람만이 알겠지만, 반려견 훈련은 무척이나 길고 지루하다. 말이 통하지 않는 동물과의 커뮤니케이션은 세 살짜리 아이를 다루는 것보다 더 많은 인내심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모든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역시나 현실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시작 전 영상을 수없이 돌려본 시간이 무색하게, 현관문을 열고 닫을 때마다 내 인내심은 반으로 뚝뚝 잘려나갔다.
"제발 여기에 쉬해...!"
훈련을 시작한 이튿날, 결국 원초적인 한마디가 처절하게 집안을 울렸다. 매일 가던 산책을 왜 가려다 말고 현관 앞만 왔다 갔다 하는지. 영문을 모르고 불쌍한 얼굴이 되어 배가 빵빵해지도록 배변을 참고 있는 해피를 보고 있자니 애초에 얼마 있지도 않았던 인내심이 금세 바닥을 드러냈다. 부족한 내가 훈련이랍시고 아이를 너무 힘들게 하는 건 아닌가 싶어 속이 상해 눈물이 났다. 그 순간 정말 울고 싶은 건 해피였을 테지만, 아무튼 내가 울었다. 답답한 마음에 화장실 구석에서 해피를 붙들고 우는 나를 동거인이 다독였다. 어떻게든 우리가 함께 반드시 넘어야 할 산이었다. 여기까지 와서 포기할 수도, 이런 기회가 언제 다시 오리란 보장도 없었다. 내가 이렇게 넋을 놓고 있는 동안에도 해피는 충분히 괴로워 보였다. 눈물을 벅벅 닦고 다시 해피의 리드줄을 붙들었다. 딱 열 번. 열 번만 더 해보자. 속으로 다짐하며 다시 훈련을 시작했다. 산책을 갈 것처럼 리드줄을 매고 현관 앞까지 갔다가 화장실로 돌아간다. 그다음엔 복도까지 나갔다가 다시 화장실로 돌아간다. 속으로 다짐한 열 번의 기회중 몇 번 남지 않은 때였다. 배변을 할 수 있도록 화장실에 함께 들어가 기다리고 있던 내 옆으로, 해피가 엉거주춤한 자세로 소변을 누기 시작했다. 얼마나 오래 참았는지 한 번 시작된 배뇨는 멈출 줄을 모르고 한강을 만들었다. 혹시 그 사이에 내가 움직이거나 소리를 내면 해피가 하던 일을 멈추고 후다닥 뛰쳐나가기라도 할까 봐 나는 망부석을 자처하고 숨도 참았다. 마침내 해피가 발을 탁탁 털고 화장실을 나가는 뒷모습을 보고 나서야 우리는 환호성을 질렀다.
"울애기 잘한다! 아이구 잘하네! 아이구 대단해!!!"
정말 춤이 절로 나왔다. 신이 나서 방방 뛰는 인간들을 따라 해피도 신나라 네 발을 굴렀다. 이유는 몰라도 아무튼 인간이 좋아하니, 좋은 일이겠거니 하는 것 같았다. 간식 포상을 푸짐하게 해 주고 진짜 산책을 나갔다. 이틀 만에 맛보는 바깥공기의 상쾌함을 온몸으로 느끼듯 해피의 발걸음에 잔뜩 흥이 올라있었다. 해피의 펄럭거리는 귀를 보며 태풍과 눈보라에도 울며 겨자 먹기로 그 거친 날씨 속에 뛰어들어야 했던 지난날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과정은 쓰라리게 고통스러우나 성공은 이토록 달콤하다.
그날로부터 완벽히 실내배변에 성공한 해피는 이제 산책의 여부와 상관없이 내가 있거나, 없거나, 언제든 원할 때 화장실에 간다. 자고 일어난 아침에, 퇴근하고 온 후에, 화장실 바닥에 흐릿하게 남은 배변흔적마저 대견하다. 혼자 흐뭇해하고 있는 나의 뒤로 위풍당당한 표정이 되어 간식을 요구하는 모습까지 엄청나게 엄청나다. 그 대단함을 설명하자면 매일 상장이라도 만들어 줘야 할 판이다. 가끔은 간식을 노린 것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고도 퍼덕퍼덕 뛰어올 때가 있지만, 이런들 어떠하고 저런들 어떠한가. 우리는 기어코 해내고 말았는걸. 하루 두 번씩 하던 산책이 하루 한 번꼴로 줄었지만, 매년 나아진 검진결과가 따라붙었다. 그 많던 지난날들을 생각하면 나는 맑은 날은 맑은 날대로, 궂은날은 또 궂은날대로 하늘을 올려다보는 순간마다 해피가 기특해서 웃음이 난다. 할 수만 있다면 아무나 붙들고 우리 애가 이렇게 대단한 걸 해냈다고 떠들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로.
"저기요, 저희 애가 올해로 14살인데 얼마 전에 실내배변을 배웠습니다. 사람이 집에 없어도 혼자 화장실에 간답니다. 정말 엄청나지 않습니까?"
잘생기면 다냐? 그래 너 다 해라!
외모지상주의가 만연한 지금 시대에 고양이의 미모를 보고 반하는 것도 죄가 될까. 그렇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기꺼이 또치를 얻고 벌을 달게 받겠다.
2-2.
한때 그런 유머를 본 적 있지 않나. 원빈보다 잘생긴 허스키, 강동원보다 멋있는 진돗개 같은. 그런 비유에 같이 얹어가자면 우리 집에서 또치는 고양이계의 임시완정도로 통한다. 체구는 작지만 정말 옹골차게 잘생긴 미모가 가히 찬양받아 마땅한 장점으로 꼽히기 때문이다.
또치의 미모를 칭찬하기 전에 나름대로의 드라마를 가진 이들의 첫 만남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의 동거인이 혼자 살던 때였다. 벼락 맞은 것처럼 어느 날 갑자기 고양이가 키우고 싶다던 그는 입양을 알아보다가 어느 새벽, 포인핸드에 혜성처럼 나타난 고양이에게 단숨에 눈길을 사로잡히고 말았다. 당시 보호자의 사정으로 부득이하게 입양처를 구하던 약 1.5살(추정)의 성묘였다. 올라온 사진이 대단히 꾸며 찍은 사진이 아닌데도 사진에서 반짝거림이 느껴질 정도였다. 이 고양이는 새벽잠도 못 이루게 할 만큼 대단한 미모를 지닌 고양이답게 만나는 것부터 쉽지 않았다. 그가 설레는 마음으로 밤을 지새우고 아침에 접견연락을 넣었을 때, 이미 먼저 연락이 닿은 입양후보자가 있었던가보다. 1분 1초가 다급한 마음과 달리 동거인의 접견일자는 며칠이 훌쩍 뒤로 밀려났다. 참고로 얘기하자면 내 동거인은 타고나길 성질이 급하고, 불안도가 높으며, 감정의 기복이 요동치는 사람이다. 밀려난 며칠을 넋 놓고 기다릴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뜻이다. '너와 결혼까지 생각했어.'라는 어떤 노래가사처럼 앞서나가기 일인자인 그의 마음속은 이미 이 고양이와 노년까지 함께 지내는 상상으로 가득 차있었을 텐데. 운명 같은 이 아이를 놓칠 수도 있다는 불안감에 발을 구르던 동거인은 실례를 무릅쓰고 접견날짜를 당기기 위해 당시 보호자에게 다시금 연락을 건넸다. 하지만 앞서 있던 입양후보자는 거리가 멀어 방문일정을 앞당길 수 없다고 했다. 참고로 당시 동거인은 전보호자와 대중교통으로 겨우 30분 남짓한 거리에 살고 있었다. 진짜 운명일까. 일정상 입양을 서둘러야 했던 전 보호자는 앞서있던 이에게 양해를 구하고 입양자 후보의 방문일을 뒤바꿨다. 바로 이 순간이, 또치와 인연을 맺게 된 결정적인 순간인 것이다.
참으로 어렵게 만나게 된 그날, 나도 궁금한 마음에 접견에 동행했다. 미리 받은 주소를 따라 주택가를 둘러보던 중 1층 방충망만 쳐진 창틀에 익숙한 회색무늬의 고양이가 앉아있었다. 설마 얜가? 심장이 요동쳤다. 혹시나 싶어 가까이 다가가 눈을 맞추자 고양이는 "애옹"하고 울며 머리를 비볐다. 세상에. 설마 진짜 얜가? 우리는 처음 보는 고양이의 애옹 한 번에 심장이 터져버렸고, 방충망에 비벼대는 번팅 한 번에 나락으로 떨어졌다. K.O. 시작도 전에 끝이 난 게임이었다.
이미 그 집으로 들어가기 전부터 살살 녹아버린 우리는 당시 보호자와 인사가 끝나기도 전에 문 앞에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다. 아이를 만져봐도 되는지, 인사를 해도 되는지 묻기도 전부터 바닥에 꿇은 무릎에 또치는 열심히 제 냄새를 묻히기에 바빴다. 보드랍고, 작고, 귀여운 생명체가 온몸으로 사랑을 뿜어냈다. 예상했겠지만 여기서 이미 또치를 보기 위한 다음 접견은 없었다. 그날부터, 아니, 이미 사진으로 또치를 보았던 그 순간부터, 또치의 입양은 결정되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자고로 용기 있는 자가 미묘를 쟁취하는 법이다.
곧장 접견 다음날 또치를 데려온 동거인은 나이와 종에 비해 체구가 작았던 또치가 더 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로 혼자만의 벌크업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매일 틈틈이 닭가슴살을 부드럽게 삶아 먹이고, 단백질이 풍부한 간식들도 보따리로 쌓아두고 먹였다. 그 가상한 노력이 성공했느냐고 하면, 2살까지도 성장할 수 있다던 말이 무색하게 또치는 억지로 늘려놓은 영상처럼 옆으로만 죽죽 늘어나 몇 달 만에 미소년에서 후덕한 미소를 짓는 고양이가 되어있었다. 맛있는 걸 많이 먹어서 또치는 행복했겠지만 동거인의 프로젝트는 완벽한 실패였다. 하지만 작으면 작은 대로, 크면 큰 대로 또 귀여운 게 고양이 아니던가.
동거인은 당시에 또치가 정말 너무 신기하고 예뻐서 한동안은 정말 하루 종일 들여다보고 있었다고 했다. 곧잘 외로움을 타는 인간과, 잘생긴 애정폭격기 고양이가 만났으니 천생연분이 따로 없었다. 전 보호자가 아이를 보낼 때 "외로움을 많이 타는 아이라 애정을 많이 주셔야 한다."라고 했는데 또치는 정말로 많은 애정을 필요로 했고 또 그만큼 엄청난 애정을 쏟아내는 고양이었다. 매일 인간의 품에서 잠을 자고, 깨어있는 순간에는 쉴 새 없이 박치기와 꾹꾹이를 해댄다. 또치에게 있어서 사랑은 의무였다. 그래, 인간의 두 손은 너희를 쓰다듬기 위해 존재하는 거지. 때때로 인간이 잠들 수 없는 밤이 오거나, 기분이 울적한 시간이 되면 우리는 습관처럼 또치를 부른다. 그러면 다가오는 그 반짝이는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처음 마음의 빗장이 허물리던 순간이 되어 얼어있던 마음도 흐물흐물 녹아내린다. 잘생긴 고양이가 주는 복지란 이런 것이다.
너 정말 고양이 같고... 모르겠다.
햇볕에 노릇노릇 익어가는 고양이를 본 적이 있는가. 직사광선이 내리쬐는 곳의 고양이는 따끈따끈하지만 만지면 안 된다. 나른한 광합성을 방해하면 3mm짜리 송곳니가 사정없이 손등에 박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은 위험한 일임을 알면서도 손을 뻗는 어리석은 행동을 멈출 수 없는 동물이지 않은가. 한 번 물려주고 잘 익은 고양이 털을 쓰다듬을 수 있다면, 그건 그것대로 꽤 괜찮은 등가교환이라고 생각하고 마는 것이다.
2-3.
가끔 누군가에게 '이상형이 어떻게 되세요?'라고 물으면 종종 '웃긴 사람'이라고 답하는 경우를 본 적이 있다. 이성에 대한 이상형은 없어도 내 고양이 이상형은 확실하다. 제 이상형 고양이요? 웃긴 고양이요. 누워있어도 웃기고, 앉아있어도 웃기고, 가만히 숨만 쉬어도 웃긴 그런 고양이요.
그리고 그런 고양이가 진짜로 있다. 바로 우리 집 귀한 막내딸 모찌 되시겠다. 가족묘에게 전염병이 생겨서 입양을 오게 된 모찌는 치즈고양이를 찾던 동거인에게 두 번째로 닿은 묘연이었다. 그리고 이 고양이는 만남의 시작부터가 코미디였다.
보호자와 미리 접견 약속을 잡고 찾아간 날이었다. 인사까지는 평온했으나, 우리가 케이지를 내려놓으며 정체(?)를 드러냈을 때 문제는 시작됐다. 어른들끼리의 약속을 알 리 없던 어린이집사가 내복차림으로 나타나 바닥에 드러누워 울음을 터뜨리며 격하게 저항했기 때문이다. 순식간에 손님에서 이 집에 남은 유일한 새끼고양이를 훔치러 온 악당 1, 2가 되어버린 우리는 보호자가 손에 안겨주었던 모찌를 잠시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모찌는 우리가 키우기로 했잖아!!"
어린이 집사는 숨까지 헐떡이며 서럽게 울었다. 이런 일이 있으리라곤 예상하지 못한 악당 1, 2는 한껏 당황하여 앉지도 서지도 못하고 어정쩡한 자세로 그 곤란한 상황을 번갈아 지켜보았다. 혼란스러웠다.
어린이와 고양이의 이별의 시간을 기다려줘야 하는 걸까?
어린이의 마음이 다치지 않도록 아이를 데려갈 방법이 있긴 한 걸까?
어린이 집사때문에 보호자가 입양을 번복하면 어쩌지?
꽤 먼 거리를 오가야 했던 우리는 속이 복잡했다. 정말 어쩌면 우리는 모찌를 데려가지 못할 것 같았다. 그런데 말입니다. 언제나 그렇듯 현실은 우리의 마음 같지 않고, 모찌는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엄청난 고양이였다. 누구도 쉽게 끝내지 못할 것 같은 그 혼돈을 단숨에 잠재운 것 역시 모찌였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상체와 따뜻한 하체처럼, 우리는 입으로 어린이집사를 염려했고 눈으로는 그 손바닥만 한 고양이를 좇았다. 바닥에 내려놓았던 모찌는 조금 주변을 서성이다가 낯선 케이지를 관심 있게 들여다보았다. 그리고는 짧은 다리를 내디뎌 마침내 스스로 그 안에 깔아놓은 담요 위에 폭신하게 들어앉아버렸다. 그 모습을 함께 지켜본 어린이 집사는 겨우 5, 6년의 짤은 인생에서 가장 큰 배신감을 느낀 듯 더 목놓아 울었다. 케이지 안과 밖의 온도차에 우리는 입술을 꼭 깨물었다. 너무 웃긴데, 웃으면 어린이에게 너무 큰 상처가 될 것 같아서 어떻게든 참아야 했다. 어린이의 눈물과, (어른들의) 불안한 눈빛과, 그저 폭신한 담요가 깔린 상자 외에는 관심 없는 고양이. 그건 아마도 전쟁 같은 입양.이었다. 마지막 인사라도 나눌 시간을 주고 싶었지만, 아이의 눈물은 도무지 어른들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것이라 결국 우리는 서둘러 내쫓기듯, 혹은 도망치듯 그 집에서 모찌와 함께 떨어져 나왔다. 차가운 11월. 밤공기에 추위라도 탈까 입고 있던 코트를 벗어 케이지를 꽁꽁 싸매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케이지 안에서 작게 그릉대는 소리가 들렸다. 너 진짜 웃기는 고양이구나.
*
그래서 우리는 방심했다. 첫 만남이 이렇게나 말도 안 되게 쉬웠어서. 심지어 또치와 합사를 하던 날에도 그들의 대치는 모찌의 하찮은 하악질 한 번이 끝이었다. 낯선 공간을 경계하며 숨는 시간이 하루정도 있었지만, 다음날부터 곧장 거실 가운데에 핑크색 배를 펼쳐놓는 주인님이 되셨기에 정말 다 이런 줄만 알았다. 사랑둥이여도 안는 것만은 허락하지 않는 또치와는 다르게, 모찌는 아무리 안고 귀찮게 굴어도 큰 저항이 없었다. 어디든 폭신하고 아늑하기만 하면 눕혀놓은 모양 그대로 잠이 들기도 했다. 이것은 인형인가 고양이인가. 이 아무 생각 없어 보이는 인형 같은 면모가 우리 눈에만 그런 건 아니다. 지금 정착한 병원의 담당 수의사는 아직도 우리 품에 안겨있는 모찌를 볼 때마다 묻는다.
"모찌, 집에서 활력은 있죠? 잘 돌아다니긴 하는 거죠? 밥은 잘 먹나요?"
하고. 물어보실 때마다 그렇다고 답해주지만, 또 볼 때마다 의아해하면서 물어보신다. 같은 종의 다른 아이들을 아무리 봐도 모찌같은 성격인 아이는 정말 본 적이 없다는 게 그 이유였다. 이 얘기는 다른 병원을 전전할 때도 들었던 적이 있다. 이 종에서 나오기 힘든 귀한 성격이니 널리 널리 유전자를 퍼뜨려야 한다고. 그런데 말입니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이미 정말 너무 많이 늦었다. 당시 이 말을 듣던 동거인은 속으로 눈물을 삼켰다. 이 말도 안 되는 성격이 신께서 주신 달란트인 것을 중성화를 마치고 나서야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하늘도 울고 땅도 울고 수의사도 울고 우리도 울었다.
하지만, 이제 선생님들도 아셔야 한다. 이 변덕쟁이 공주님의 진짜 성격은 따로 있다는 걸. 모찌가 참아주기만 하는 성격인가 하면, 물론 아니다. 모찌는 어린이집사를 울리고 제멋대로 우리에게 온 고양이중의 고양이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 제멋대로 공주님은 사실 온순하긴 하지만 고양이 그 자체의 성품을 가졌다. 정말 종잡을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숨 쉬듯 한다.
예를 들자면 이런 거다. 인간이 만지는 것보다 사회적 거리를 유지한 채 호들갑 떨어주는 걸 제일 좋아한다. 베란다 창 너머로 그림자를 쓰다듬어주는 것을 좋아하고, 부러 인간을 기다렸다가 해먹에 들어가는 모습을 보여주며 환호를 종용한다. 기분이 좋아서 등을 바닥에 문지르는 딩굴방굴쇼를 선보이다가도, 손을 대면 벌떡 일어나 다시 한 뼘 떨어진 곳에서 마저 딩굴방굴쇼를 이어간다. 그러니까, 만지지 말고 떨어진 곳에서 찬양하라는 뜻이다. 멀리서 칭찬하고 환호하라는 뜻이다. 그렇게 거리를 두다가도 아침이면 굳이 침대로 찾아와 인간의 손목부터 발바닥까지 꼼꼼히 밟고 다니는 걸 일과로 여긴다. 인간이 방에 있으면 거실에서 부르고, 거실로 나가면 본인이 방으로 간다. 창문을 닫으면 열라고 울고, 열면 또 들어오지 않는다. 서열 문제가 잘못되었거나, 인간이 고양이에게 길들여졌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별 수 없다. 오냐오냐 자란 이 공주님이 주는 피해란 겨우 몇 번의 야옹일 뿐이니까.
그렇다고 모찌의 인간에 대한 애정을 의심할 필요는 없다. 모찌는 언제건, 어느 곳에 있건 우리가 "아기"를 외치면 찾아오기 때문이다. 내려가 있던 꼬리를 한껏 추켜올리고 살랑거리며 다가와 내민 손바닥에 기꺼이 제 털을 문질러준다. 겨우 3.5kg의 조그만 몸으로 위풍당당하게 걸어오는 그 모습은 마치 행복을 몰고 오는 해일 같다. 그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유명한 시구 하나가 떠오른다.
잠겨 죽어도 좋으니,
너는
물처럼 내게 밀려오라.
단짠단짠 변덕스러운 사랑에 잠겨 죽어도 좋으니, 너는 아주 오래오래 우리에게 밀려오라.
같이의 가치
외동으로만 살던 해피와, 대단히는 아니고 대충 친한 고양이 두 마리의 합사라. 되짚어보자면 내가 살면서 그렇게까지 긴장해 본 날이 있었나 싶다. 앞으로 함께할 매일이 천국이 될지 지옥이 될지는 아이들에게 달려있었다. 아이들을 격리를 하네 마네, 울타리를 쳐야 하네 말아야 하네, 시작 전부터 수없이 많은 의견이 오갔다. 처음에는 방과 거실만 틈을 두고 서로를 익힐 참이었다. 그렇게 며칠 보내다가 서로 영역을 바꿔서 또 지내게 하는 방식으로 합사를 하면 되겠구나 생각했으나 언제나 현실은 상상을 뛰어넘는다.
이삿날, 해피를 천천히 집 안에 내려놓자 또치가 먼저 다가와 냄새를 맡고 유유히 지나갔다. 그리고 모찌는 애초에 저 말고는 다른 것에 그다지 관심이 없는 고양이다. 그래도 해피는 늑대의 후손인 개이지 않은가. 갑자기 애정을 나눠 가질 가족이 늘어난 게 불만스러워 혹시 고양이들을 물면 어쩌나 고민이 많았다. 유혈사태를 방불케 하는 파국도 적잖게 상상했었다. 하지만 해피는, 해피였다. 누굴 공격할만한 심보 따위가 애초에 없는 겁쟁이 순둥이. 걱정이 무색하게 아이들은 첫 학교생활을 시작하는 아이들처럼 데면데면한 거리를 유지한 채 자연스럽게 섞여 들었다. 이것이 우리 집 합사의 싱거운 스토리다. 아직도 셋의 언어가 그다지 완벽하게 오가는 것 같진 않지만, 그럼에도 대단한 싸움 한 번 없이 아이들은 서로의 존재를 의식하며 이 평화를 유지하는 데에 힘쓰고 있다. 좁혀지지 않는 평행선이 평생 이어지더라도 이만하면 결론은 우리가 생각한 천국에 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