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록 속도가 다를지라도 우리는 계속해서 같은 방향으로
우리의 발자국은 같은 자리에 새겨진다
사는 게 고단해 기록을 멈춘 사이 아이들의 시간은 참 부지런히 달려갔다. 1년이란 시간 동안 나는 고작 한 살을 먹는데, 어째서는 너희는 그 작은 몸으로 그렇게도 성큼성큼 우리를 앞서 갈까.
그 짧은 다리들로 어떻게. 이크.
이건 어쩌면 우리만의 조별과제
5-1.
나이를 먹는다는 건 단순히 시간만 흐르는 게 아니다. 변화하는 삶의 형태를 따라 우리의 생활도 많은 것이 달라졌다.
해피가 아프고 나서부터 나는 원래의 기상시간보다 10분 알람을 앞당겼다. 출근 전과 자기 전 하루 두 번 수액을 놓는 시간이 새로운 루틴으로 자리했기 때문이다. 전보다 일찍 일어나는 아침은 고단하지만 수액 덕에 신장수치가 안정되는 것을 보고 난 이후로 포기할 수 없는 일이 되었다. 문제가 있다면 나의 부족해진 잠시간보다 주사를 위해 계속해서 무리를 하고 있는 손목이었다. 직업 특성상 이미 내 손목은 웬만한 사무직 종사자들보다 이미 더 닳고 닳아있었는데 매일 두 번, 주사기 펌프를 누르기 위해 압박을 가하다 보니 나중엔 살짝 접히기만 해도 통증이 따라왔다. 아직 써야 할 날이 구만리라 이리저리 방법을 찾다가 병원에서 사용하는 자동주입기를 알게 되었으나 가격을 보고 그대로 뒷걸음질 쳤다. 그러다 아픈 아이들을 케어하는 보호자들의 커뮤니티에서 실리콘건을 알게 된 후 내 손목은 비로소 자유를 찾았다. 2,000원의 행복이었다.
아침저녁으로 수액을 맞는 일을 싫어할 법도 한데 해피는 참 신기하고 착하게도 주사를 맞는 일을 기피하지 않았다. 거실에서 배회를 하다가도 내가 수액팩을 들고 움직이면 금세 나를 따라와 방석에 엉덩이를 내밀고 앉았다. 이런 행동들이 나를 향한 너의 믿음의 표현인 것 같아서 나는 가끔 코끝이 찡했다.
해피는 10살이 넘어 실내배변으로 배변습관을 바꿀 정도로 똑똑한 강아지였는데, 이제 잘 밤이면 기저귀를 채워야 한다. 이 또한 아침저녁으로 맞는 수액 때문에 배뇨조절이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아침마다 화장실로 향하는 해피의 발소리가 들리면 나는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해피의 기저귀를 풀어줬다. 그 모양새를 보고 동거인이 말벌아저씨 같다고 웃었다. 딱히 부정하지 않았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던 참이었으니까.
2~3 주에 한 번은 화식을 만드는 날로 아주 큰 마음을 먹어야 한다. 해피가 먹을 수 있는 재료들을 구성하고 칼로리와 용량, 단백질까지 AI를 이용해 까다롭게 계산했다. 화식은 재료를 적정 비율로 준비해 2시간 이상 물에 담가 칼륨을 빼는 것까지가 전처리 작업으로 이 작업은 시작부터 보통 손이 가는 일이 아니다. 손질한 재료는 찜기에 쪄내거나 물에 삶아, 적당히 해피가 씹기 좋을만한 크기로 다져 용량대로 담아 냉동한다. 아기들이 먹는 이유식과 다를 것이 없었다. 이 과정은 한 번에 족히 4~5시간이 소요되는 고된 일이지만 해피가 시판 화식은 물려하는 반면, 직접 만든 화식은 질리지 않고 좋아해서 포기할 수도 없게 되었다. 최근에는 씹는 일을 게을리하는 문제가 인지장애로 이어진다는 기사가 떠올라 다시 사료를 병행하는 식단으로 바꿨다. 더 이상 쓸 일이 없을 줄 알았던 노즈워크를 다시 꺼냈을 때 좋아하던 걸 생각하면, 또 내가 해피를 너무 몰라준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따랐다.
예전에는 곧잘 뛰어오르던 계단에서 해피가 자꾸만 굴러 떨어졌다. 높이를 조정해 봤지만 소용이 없어서 결국 계단을 치우고 방의 구조를 조금 바꿔 침대 가까이로 해피의 잠자리를 하나 더 놓았더니 거길 참 좋아한다. 이렇게 좋아할 줄 알았으면 진작 바꿔줄걸. 뒤늦은 후회가 또 한 가지 늘었다.
비가 오는 날에 산책을 하게 되면 입히려고 추가로 장만했던 우비는 결국 포장도 뜯지 못했다. 사실 발이 물에 젖는 걸 좋아하지 않는 해피의 까탈스러움을 알고 있다. 그래서 실내배변을 할 수 있는 지금은 해피가 내켜하지 않는 일은 굳이 하지 않기로 했다.
전기세를 아껴보겠다고 작년까지는 열심히 조절하던 에어컨은 이제 꺼져있는 시간보다 켜놓는 시간이 더 길어졌다. 심장이 많이 약해진 해피에게 더위는 되도록 피해야 하는 환경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올해는 사람의 유무와 상관없이 집은 계속해서 적정온도를 유지할 수 있도록 거의 24시간 에어컨이 가동됐다. 더위를 많이 타는 내가 해피의 덕을 본 여름이었다.
매년 여름마다 전문가의 손에 맡기던 미용도 이제는 하지 않는다. 하지만 마냥 털이 길도록 두는 것도 여름철 해피 건강에는 이롭지 않아 집에 새 이발기를 장만해 내 손으로 대신했다. 여름에 곧잘 생기는 피부병을 놓치지 않을 수 있도록 배와 가슴은 짧게 밀고, 등은 1센티가량을 남긴다. 전문가의 손길에 비하면 엉성하기 짝이 없다. 그럼에도 해피는 목욕을 할 때면 온전히 내 품에 안겨 물줄기를 기꺼이 참아준다. 그 신뢰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새삼 고마워서 가끔은 혼자 울컥거리는 마음을 삼켰다.
해피가 깨어있는 시간이 줄어가는 만큼, 이렇게 나의 루틴은 더 촘촘히 해피를 따라잡기 위한 시간으로 채워졌다. 그 모든 일은 번거롭고, 성가시고, 체력과 시간이 소모되는 일들 뿐이다. 그렇지만 그 시간들이 모여 해피의 하루가 조금 더 나아진다면 그걸로 충분했다. 우리의 균형은 이렇게 맞추면 된다. 이렇게 내가 조금 더 부지런히 열심히 달려가면 된다.
그러니 이제 바보강쥐가 할 일은 잘 먹고, 잘 자고, 잘 소화시키는 일뿐이다.
사랑의 밧데리
5-2.
너무 가까운 건 성가시고, 그렇다고 멀어지는 건 아쉽다.
또치가 나이를 먹으며 혼자 있고 싶어 하는 시간이 부쩍 늘었다. 낮이고 밤이고 침대에서 인간과 살 붙이고 있는 고양이였는데. 이제는 곧잘 보이지 않는 곳에 들어가 혼자 낮잠을 잔다. 이기적인 인간은 또 그게 그렇게 귀엽고 아쉽다.
이렇게 소문난 사랑폭격기 또치에게도 인간 권태기가 있었다. 때는 코로나가 한참 창궐하던 시기로, 동거인이 불가피하게 재택을 하던 기간이었다. 또치는 동거인이 재택을 시작하면서부터 이상하게 그와 데면데면한 생활을 시작했다. 잘 밤은커녕, 불러도 좀처럼 오지 않고 자꾸만 구석으로 파고들었다. 언젠가 인간이 집에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 우울증에 걸리는 고양이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아니, 이게 왜 진짜냐고요. 심지어 그게 설마 우리 고양이의 일이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또치는 매일 밤 인간들의 침대로 뛰어들어 가운데에서 한참이나 예쁨을 받다가 가로로 자기를 일삼는 유아독존의 고양이였는데. 그저 인간이 집에 있다는 이유 하나로 그는 돌변했다. 그로 인한 이점은 잠을 편하게 잘 수 있다는 것이었으나, 묘하게 버림받은 기분이 든다는 게 문제였다.
우리 좋았잖아...
너는 우리를 사랑했잖아!
신파에서나 나올 법한 대사가 줄줄이 쏟아졌다. 그도 그럴 것이 또치는 정말 사랑이 많은 고양이였다. 인간의 부름에 언제나 달려와 사랑스러운 박치기로 답을 해주고, 아침저녁으로 품에서 꾹꾹이로 인간 수면의 시작과 끝을 책임졌으며, 항상 인간이 잘 보이는 자리에서 CCTV처럼 우리를 주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막을 수도 없이 쏟아지는 사랑을 받기만 하는 데에 익숙해지고 길들여졌던 우리는 또치가 변했다는 사실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또치를 위해 회사 방침을 어기고 출근을 할 수도 없는데 그렇다고 또치의 외면을 받아들일 수도 없던 우리는 매일 구슬프게 또치를 불렀다. 하지만 매몰찬 그는 응답하지 않았다. 구석에 있는 걸 억지로 안고 와도 그는 용수철처럼 튀어 나가 혼자만의 시간을 필요로 했다.
그래서 주말이면 우리는 쫓겨나듯 집을 나서야 했다. 남의 집에 세 들어 사는 사람들처럼 집주인의 눈칫밥을 피해 터덜터덜 근처 카페에 나가 한참을 책을 읽다 들어가는 등의 원하지 않는 외부시간을 지속해야 했다. 순전히 또치를 위해서. 그렇게 하루를 꼬박 밖에서 보내고 들어가는 날이 되어야만 또치는 조금 곁을 내주었다. 이토록 잔인한 충전식 사랑을 가진 고양이라니.
다행히 이 시기는 코로나규제가 풀리면서 끝이 났다. 이전처럼 인간들이 집을 비우는 시간 동안 혼자만의 시간을 충분히 즐길 수 있는 루틴으로 돌아간 또치는 다시 예전처럼 침대로 다가와 인간의 잠자리를 방해하고, 괴롭히고, 충전된 본인의 애정을 마음껏 소모했다. 하지만 그 사랑은 또 너무 가까워서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인간들을 양쪽 침대 끝으로 밀어내며 가운데에서 가로로 잠드는 고양이란 인간의 생활 따위는 조금도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매일 출근이라는 것을 해야 하는데, 너만 잘 자면 되는 일이냐고 물으면 또치는 그렇다고 대답할 것 같았다.
내가 이렇게 귀여운데 그깟 출근이 대수냐고.
맛집의 비밀
5-3.
자주 못생기고, 가끔 귀여운 애기가 애교가 많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별로 많지 않다. 타고난 도끼눈과 ㅅ자로 툭 떨어진 전형적인 날카로운 고양이의 생김새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고양이스러운 얼굴 뒤엔 반전의 성격이 숨어있다.
모찌는 주로 손에서 손으로 다닌다. 본인이 원했다고는 할 수 없으나, 찹쌀떡처럼 주물러도 빠르게 포기하는 순한 성품이 크게 한몫했다고 할 수 있다. 알레르기로 털이 더 이상 자라지 않는 배에 배방구를 해도 모찌는 발길질 한 번 할 생각이 없었다. 언제나 부르면 멀리서부터 꼬리를 한껏 치켜들고 다가와주고, 의자에 앉아있는 인간을 보면 언제든 쓰다듬을 받기 위해 딩굴방굴쇼를 서슴지 않았다. 또치같은 경우는 본인이 만족할 때까지 박치기만 하는 타입이라고 치면, 모찌는 행동도 행동이지만 말이 앞서는 타입이다. 정확히는 가끔 우리를 부르거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욕을 한다. 이게 그냥 표현적인 욕이 아니고 억양이 진짜 욕이다. 본인이 원하는 게 있을 때와 애교를 부릴 때의 목소리는 명확하게 차이가 난다. 그래서 우리는 가끔 확신했다.
모찌 지금 욕했어.
이거 지금 욕 한 거야.
모찌가 싫어하는 행동을 할 때면 그 표현은 더 선명하게 나타났다. 이를 테면, 동거인과 내가 크게 언성을 높이며 이야기할 때라든가(싸우지 않아도 목소리 데시벨이 높으면 애기는 어김없이 기강을 잡으러 온다.), 박수를 크게 치는 소리가 날 때라든가, 박수를 치기 직전의 양 손바닥을 보여주는 행동을 할 때엔 확실히 욕을 했다. 인상을 있는 힘껏 쓰고 조금 더 날카롭고 찌르듯 소리를 지른다.
사실...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알지만 인간은 언제나 알면서도 어리석은 행동을 하지 않나. 우리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모찌가 싫어한다는 걸 알지만, 욕하는 얼굴조차 너무 귀여워서 참을 수가 없었다. 둘이 나란히 냉장고 위에 있는 모찌를 향해 손바닥 네 개를 슬쩍 펼쳐서 들이밀면 애기는 있는 대로 얼굴을 찌푸리며 우리에게 꺼지라고 말했다. 고양이의 언어는 몰라도 그것만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욕쟁이 할머니의 맛집을 계속 찾아가는 인간들의 묘한 심리를 알 리 없는 고양이는 그게 단골을 끌어들이는 줄도 모르고 하염없이 귀여웠다. 아주 가끔 모찌가 질려서 쳐다보지 않을 때까지 두세 번을 같은 짓을 반복하다가 웃으며 사라지는 진상 짓을 선보여도 모찌는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꼬리를 추켜올리며 다가와 우리의 다리를 감고 애교를 부렸다. 이러니 어떻게 안고 배방구를 하지 않을 수 있겠어!
김모찌씨는 대체 언제부터 이렇게 귀여웠나?
태어날 때부터? 전생부터?
어떤 찰나는 영원이 된다
어떠한 생도 영원하지 않다. 그 사실을 잘 알기 때문에 언젠가 우리가 함께 하지 못하게 되는 순간이 더 두려운 것일 수도 있다. 그래서 아이들이 우리를 향해 쉴 새 없이 눈으로, 몸짓으로, 손짓으로 사랑한다고 말하는 순간들을 남김없이 기억하고 싶다. 너희가 떠난 후에도 우리는 또다시 그 찰나의 기억으로 살아갈 테니. 그렇기 때문에 지금의 우리가 할 일은, 지금의 행복을 있는 힘껏 만끽하고 향유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