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을 풀고 바로 ENDS and MEANS 매장으로 갔다. 볼캡과 티셔츠를 샀고, 코듀로이 워크재킷을 사려다 결국 내려놓았다. 바지를 맞춰 입기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산포 재킷은 채도가 높아 색이 예뻤고, 활용도도 높아 보였는데 내 몸에는 어깨 부분이 답답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 매장 사진을 하나도 못 남겼다. 저녁이 되기 전에 긴자의 술 가게에서 라프로익 10CS 를 샀다.
저녁에는 유명한 캠벨타운 로크에 방문했다. 익히 듣던 대로 가게는 협소했다. 내가 가본 술집 중에 가장 좁은 술집이었다. 좁은 공간에 위스키가 가득했다. 이런 방이 집에 있으면 행복할까. 단순히 술만 많다고 이런 바가 가지고 있는 특유의 분위기를 재현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냥 집 근처에 이런 바가 있는 게 낫겠다 싶다. 생각해 보니 어느 쪽도 쉬운 일은 아닌 듯하다. 좋은 술집은 좋은 사람만큼이나 만나기가 어려운 법이다. 자리에 앉자 수더분해 보이는 사장님이 물을 한잔 건네주었다.
더듬더듬 라프로익을 좋아한다고 하니, The Single Malts of Scotland 시리즈의 라프로익 12년 숙성을 꺼내주셨다. 압도적으로 맛있었다. 46도 밖에 안되는데도 CS를 마시는 듯한 진함이 느껴졌다. 고개를 주억거리며 감탄하고 있자니, 사장님께서도 흡족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셨다.
다음으로는 Old Malt Cask의 라프로익 15년 숙성, 맛은 좋았으나 첫잔이 지나치게 맛있었다…
로컬발리는 없다는 말씀에 그냥 롱로우를 요청드렸다. 롱로우가 오늘의 2등이었다. 내가 생전에 캠벨타운에 가볼 일이 있을까. 가게가 너무 좁아 오래 죽치고 있으면 민폐가 되겠다는 생각에 처음 마셨던 라프로익을 한 잔 더 마시고 가게를 나왔다. 현금 결제가 번거롭긴 했으나, 가격이 말도 안 되게 저렴했다. 세 잔은 더 마시고 나왔어도 될 뻔했다. 다시 들어갈까 하다가 아무리 봐도 이상해 보일 것 같아 얌전히 호텔로 향했다.
이 날은 위스키를 또 한 병 샀고, 나머지 시간에는 술을 마시기 전까지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었다. 어제 마셨던 라프로익이 생각나서 독립병입 라프로익을 한 병 사고 싶었는데 정작 내 손에 들어온 건 드램모어(Dram Mor)의 쿨일라였다. 숙성연수가 다소 짧지만, 55도의 고도수 쿨일라는 살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Rudder라는 위스키 샵에서 구매했는데, 눈이 돌아가는 위스키들이 많았다. 일부 위스키는 시음 후에 구매도 가능했다.
전날까지만 해도 진눈깨비가 오고 날이 별로였는데, 이 날은 빛이 좋았다. 아니 빛이 좋았던 건지 회사를 가야 할 시간에 놀고 있으니 만사가 아름다워 보였는지 모를 일이다.
저녁은 선술집에서 술을 먹으면서 때우기로 결정했다. 구글맵을 찾아보다가 적당해 보이는 가게를 골랐다. 산겐자야에 괜찮은 술집이 많다고 해서 산겐자야에서 가게를 찾았다. 리뷰를 보니 닌진 카라무쵸라고 하는 당근 샐러드를 다들 시키는 것 같길래 주문해 봤다. 다음으로 시켰던 음식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어쨌든 사장은 친절했고, 음식들의 맛도 좋았다.
일본에서는 혼자서 술을 마시는 사람들도 많다고 들었는데, 정작 술집에 혼자 온 건 나뿐이었다. 또 주변 얘기를 들어보면 술집에서 사람들이 말도 건다던데, 내게는 아무도 말을 걸지 않았다. 괜한 배신감이 들었다.
인기가 많은 가게인지, 오픈 후 얼마 되지 않아 가게는 금세 사람들로 북적였다. 마지막까지 비어있던 내 옆자리에 남자 하나가 와 앉았다.
사장과 이것저것 얘기하길래, 일본인이겠지 싶었는데, 흘깃 보니 금발의 서양인이었다. 묘했다. 가까이서 보면 이 사람이 더 현지인에 가까울 것이다. 말투도, 주문하는 방식도, 그 공간에 자연스레 스며드는 방식도 그랬다. 그러나 멀찍이서 보면 동양인인 내가 아마 더 이 사회의 일원 같아 보이지 않을까 나는 잡념에 빠졌다.
조용히 술을 마시던 서양인이 갑자기 내게 말을 걸어왔다.
그는 영국에서 왔고, 도쿄에서 컨설턴트로 일하고 있고, 최근에 일본인 여자친구와 헤어졌다고 했다.
나는 한국에서 왔고, 회사원이다. 일본 회사는 일이 많니? 한국에는 일 벌레들이 굉장히 많은데.
그는 유창한 일본어로, 나는 고등학교 때 1년을 배운 게 전부인 더듬거리고 엉망인 일본어로 어떻게든 대화를 이어나갔다. 루크는 일본어를 연습하고 싶었을 텐데,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영국인이라 얼굴만 보고 동양인을 국적별로 구분하는 능력이 없었을 것이다.
혹시 영어가 편하면 영어로 해도 돼.
얘기를 나누던 와중, 루크는 영어로 얘기를 해도 괜찮다고 입을 뗐다.
나는 괜찮지 않았기에 거절했다.
아니 난 영어를 못해. 스페인어라면 하는데.
루크는 한참을 웃더니, 입을 뗐다.
나도 스페인어 하는데.
영국인이 스페인어를 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기에
나는 무척이나 놀랐다.
일본어 만큼은 아니었지만, 루크는 스페인어도 유창했다.
나는 오늘의 술자리가 생각보다 길어지겠다는 생각을 했다.
루크는 대학교에서 일본어와 스페인어를 공부했다고 했다.
영어권 사람들은 외국어에 큰 관심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루크를 보니 내가 잘못 생각했구나 싶었다.
아냐 보통은 맞지. 내가 특이한 거지.
루크는 내 편견을 적극 지지해줬다.
한참을 영국인과 일본어로 그리고 스페인어로 사는 얘기를 하다가 우리는 2차로 자리를 옮기기로 했다. 루크는 산겐자야를 안내해 주겠다며 미로 같은 뒷골목으로 나를 안내했다. 한국으로 치면 을지로 같은 느낌이었는데, 좁은 골목길 사이사이로 간판도 없는 술집들이 군데군데 자리하고 있었다. 영국인이 안내하는 일본의 뒷골목이라니, 묘한 기분으로 나는 루크의 뒤를 따라다녔다. 아마 혼자 왔으면 이런 골목까지는 들어오지 못했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차에 골목 사이로 쥐들이 내달리는 모습을 봤다.
파리 같네.
루크는 큰 소리로 웃었다.
역시 영국인과 친해지려면 프랑스를 욕하는 게 제일인 것 같다. 우리는 신나게 산겐자야를 돌아다녔다. 가자는 대로 따라다니니 마음이 편했다. 일본에 와서 술집만 다닌 모양인지, 그는 산겐자야를 이곳 저곳 훤히 꿰고 있었다. 우리는 실컷 술을 마시고 나서야 헤어졌다.
아카사카에 있는 오코노미야끼 집을 방문했다. 삿짱이라는 이름의 가게였는데, 히로시마식 오코노미야끼를 판매한다. 가게는 낡았으나, 오래된 가게가 주는 특유의 분위기가 맘에 들었다. 가게가 협소해 여럿이 방문하기에는 어려워 보였다. 하이볼은 없었지만, 위스키를 스트레이트나 온더록으로 판매했다. 여기서도 술을 실컷 마셨다.
운동화를 신을 걸 그랬다. 블런드스톤이 편하다고는 하나, 부츠는 부츠다.
돌아오는 길, 하늘이 예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