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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재호 Oct 08. 2016

하루 종일 울고 있는 김광석

범접할 수 없는 슬픔의 세계 그리고 그의 영혼

#2. 하루 종일 울고 있는 김광석


아주 오래전부터

저기 산 위에 홀로 선 나무 한 그루

난 그렇게 살고 싶은데

- 『김광석 에세이』 중에서


김광석은 1982년 9월 임지훈(나중에 <사랑의 썰물>로 인기를 얻음)의 소개로 무교동 라이브 카페에서 노래 활동을 시작했다. 대학 시절엔 대학연합 노래패에서 ‘노래를 찾는 사람들(이하 노찾사)’음반에 참여했다. 특히 ‘노찾사’의 첫 정기공연이 펼쳐진 1987년 10월, 김광석은 <녹두꽃>을 통해 그의 목소리를 사람들에게 각인시켰다.


한 때 대학생 퀴즈프로그램 인트로 노래로 삽입된 <일요일이 다가는 소리>. 이 노래엔 독특한 효과음 ‘똑딱똑딱’ 소리가 있는데 김광석이 직접 뺨을 때려가며 소리를 만들어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외에도 김광석은 ‘노찾사’ 앨범 작업에서 남자 코러스를 맡기도 했다.


1995년 8월 김광석은 대중가요사에 영원히 기록될 라이브 공연 1천회를 펼친다. 대학로 학전소극장에서 시작한 김광석의 공연 인생이 꽃을 피운 것이다. 특히 김광석은 정식 앨범에 녹음된 목소리와 흡사할 정도로 라이브 공연을 제일 잘하는 가수로 손꼽혔다.


‘노찾사’로 공식 데뷔, 라이브 공연 1천회 기록


그런데 김광석의 노래를 듣고 있노라면, 이 사람 “하루 종일 울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아니, 노래를 이렇게 구슬프게 부를 수가 있을까. 거의 모든 노래 속에 그의 슬픔이 묻어난다.


4집 앨범 자킷

1994년에 발표한 4집 중 <혼자 남은 밤>은 특히 슬프고 김광석의 애달픔이 묻어 있다. 김광석은 “외롭게 나만 남은 이 공간 되올 수 없는 시간들 빛바랜 사진 속에 내 모습은 더욱 더 쓸쓸하게 보이네”라고 노래한다. 이 앨범에 담긴 <일어나> 역시 희망을 노래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뭔가, 우울하다.


<일어나>는 김광석이 직접 작사·작곡한 노래이다. 표면적으로 볼 때 경쾌한 비트와 함께 전체 분위기는 밝은 것처럼 들린다. 하지만 단조로 시작하는 이 노래를 계속 듣고 있노라면 그가 이미 자신의 죽음을 말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아름다운 꽃일수록 빨리 시들어 가고’라는 가사는 자신을 말하고 있었던 건 아니었는지. 김광석은 어항에 갇혀있는 붕어가 자신을 깨고 나가는 그림을 보며 자신도 그렇게 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을 품었다. 그는 그렇게 할 자신이 없다고 말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자신의 어항을 깨고 말았다.


범접할 수 없는 슬픔의 세계 : 영혼의 목소리


김광석은 슬픈 영혼의 목소리를 지녔다. 그래서 더더욱 그의 노래들은 침울한 분위기를 띠며 듣는 이들의 심금을 울린다. 나만 슬픈 것일까. 비극이야말로 정점의 카타르시스이다. 비극이란 감정을 정화시키는 작용을 한다. 그래서 어둡고 우울하지만 우린 김광석을 좋아한다.


삶이란 아름답거나 영원하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김광석은 더 많이 사랑하고 애써 힘을 내 일어나야 하는 것이라고 노래한다. 사는 것 자체가 역설이다. 김광석 목소리엔 떠나가는 모든 것들을 붙잡으려는 의지가 담겨 있다. 그의 노래들이 쓸쓸하고 애달픈 이유다. 이러한 맥락에서 ‘언니네이발관’ 이석원 씨는 김광석처럼 목소리에서 슬픔이 배어나오는 가수를 본 적이 없다며 “슬픔을 무슨 재주로 연습하겠나”라고 적은 바 있다.  


역설적으로 들릴 수 있겠으나 김광석 목소리의 최대 매력은 슬픔과 한설임에 있다. 솔직해지자. 김광석이 부른 노래들은 모두 어둡다. 심연의 끝에서 울부짖는 노래는 범접할 수 없는 그늘을 드리운다. 그 냉기를 접한 청중은 몸서리치고 전율을 느끼게 마련이다.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애상(哀想)이 노래가 되어 허공에 매달려 있다. 문화는 슬픔의 조각들이 공감될 수 있는 광장에서 태어난다. 문화산업은 그 고통과 슬픔의 결과를 포장한다.



20대 중반, 뒤늦은 나이에 김광석을 접한 한 대학생은 다음과 같은 메모를 남겼다.


“그(김광석)의 가락 있는 울음을 듣고 있자하니

내 심정은 펜을 찾으라 한다.

전염된 슬픔을 흘리고 싶지 않아 나는 펜에게 책임을 떠 넘겼다.

세상이 이렇다. 고요하지 않고 슬픔이 떠돈다.

구름의 그림자가 기쁨을 가린다.

산의 높이를 가진 빛도 종이 한 장 두께의 먹구름에 가려지는 이 세상.

한때 그의 그림자도 구름이 끼면 사라지고, 해가 뜨면 다시 짙어지기를 반복했으리라.

그가 무너진 날, 해가 떠도 그림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그가 귓전에서 운다......

내 맘속에 아직 살아 있을 행복은 어디로 갔을까.

보이지 않는 깜깜한 밤이로구나.”


김광석의 노래가 들린다. 그는 전부터 만들고 부른 노래들을 매번 새로운 시공간에서 다시 불렀고 지금 들린다. 어떤 노래를 부를 때 그도 분명 강한 감정을 그곳에 한 장의 점으로 실었을 것인데, 그것은 매우 힘든 일이다. 그는 새겨진 감정을 매년 느껴야 했다. 이미 강하게 자리 잡은 감정에 새로운 감정이 쉽사리 자리 잡기는 어렵거니와, 혹여 자리 잡아도 그것은 너무나 큰 혼란을 준다.


슬픈 노래를 계속 불러야 하는 건 고통이다. 감정을 여러 장소와 물체에 분산해 저장하고 또 새로운 것에 새로운 감정을 주입해서 때때로 꺼내보아야 하거늘. 그때의 김광석은 어떤 느낌을 가졌을까. 매번 감정을 새기며 사는 것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유난히 슬프고 우울한 노래를 많이 불렀던 김광석. 예술인은 그가 남긴 작품과 같은 운명을 지니지 않는가. 이런 측면에서 세상에 예술이 있다는 건 생명체를 진정 존재하게 하는 셈이다.  


물론 개인마다 노래에 대한 취향이 다르다. 필자의 경우 비라도 오는 밤이면, 김광석 노래가 고파진다. 그의 노래를 듣고 있노라면 눈물이 날만큼 슬퍼지는데, 아마도 그가 애절한 목소리를 가진 노래꾼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아니, 슬픈 영혼을 가진 어떤 이의 목소리라는 말이 더욱 적합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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