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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K에게. 0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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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영원 Jan 30. 2022

아빠의 말


아빠에게 무뚝뚝한 딸이다. 아빠는 다정하고 애교 있는 딸을 원하는지도 모르겠으나. 장녀 특유의 성격을 넘어서서 조금 더 딱딱하게 구는 것이 나.

내가 아주 어릴 때. 아빠와 나는 특별히 친했다. 보통의 ‘딸 바보’ 와는 차원이 다른 사람이 우리 아빠. (딸 바보 일화는 차마 여기에 다 쓰지도 못할 지경이니. 언젠가 따로 쓰는 편이 낫겠다)

언제 어디서부터 였는지는 모르겠다. 특별한 부녀지간은 평범 이하로 떨어졌다.

아빠를 떠올리게 하는 단어들은 심플하다. 책임감. 끈기. 참을성. 배려심. 측은지심. 준법정신. (그 밖에 명석한 두뇌활동에 포함되는 좋은 기억력. 뛰어난 이해력. 우수한 문제 해결 능력. 철저한 준비성...)

두뇌활동에 감탄을 한 적은 숱하게 많은데, 그중에서도 기억력이나 타고난 준비성은 따라잡을 사람이 없을 것 같다. 한번 본 것. 한번 들은 것. 한번 배운 것을 잊어버리지 않는 사람이라고 말하면 얼추 비슷한 설명이 되려나. 어릴 때 어깨너머로 본 피아노곡을 50년이 지나도록 기억하고 친다든지(피아노 배운 적 없음. 악보 보는 법 모름. 따라서 자신이 치는 건반이 무슨 음인지 모름. 손의 위치를 기억한다고 했다) 20대부터 60대인 지금까지 운전을 해왔는데 단 한 번도 딱지를 뗀 적이 없다는 거라든가. 심지어 접촉사고를 낸 적도 없다.(엄마가 제일 끔찍해하는 부분은 이 부분이다. 어떻게 사람이 딱지 한번 안 날아오게 운전을 할 수 있는가. 에 대한 감정적 거부감. 옛날에는 내비게이션도 없었는데)

그밖에도 중학교 때 종종 모르는 수학 문제를 들고 가면 한 번의 막힘도 없이 술술 풀어내는 거라든가. 아. 얘기하려면 너무나 많다. 꾸준히 해오지 않았던 것들을 마치 어제까지 해왔던 일인 양 해내는 아빠를 무섭고. 대단한 사람.이라고 여겼던 게 이상한 일이 아닐 것이다.

나는 아빠의 딸인데. 내가 가진 것들 중 많은 것이 아빠에게서 나왔을 텐데. 외형을 제외하면 물려받은 것이 무엇인지 도통 알 수 없었다. 

더구나 아빠는 직업군인이었다. 올곧은 나무는 부러지기도 쉽다고. 아랫사람의 잘못을 상관인 아빠가 책임진다는 명목으로. 전부 뒤집어쓰고 옷을 벗었다. 공군 조종사였던 아빠가 얼마나 많은 생명을 구하고, 나라를 위해 애써왔는데. 불명예 퇴직은 그런 일들을 모두 없던 일로 만들어버리기에 충분했다. 나는. 내가 다 알지 못하는 일을 겪었고. 알지 못할 시간을 살아온 아빠를 온전히 이해하고 사랑하지 못했다.

 

과묵하고. 쉽게 화를 내거나 동요되지 않는 성격의 사람. 일을 진행할 때. 그 일을 성공했을 때와 성공하지 못했을 때의 경우를 모두 염두해 두는 사람. 어떤 돌발 상황에서도 당황하거나 흥분하지 않는 캐릭터. 현실에서 이런 사람은 우리 아빠뿐일 거라고 생각하며 살았다. 그러던 중 최근에 나눈 아빠와의 대화에서. 내가 놓치고 있는 것들을 발견했다. 그렇지. 아빠의 말. 과묵한 사람들의 말은 집중해서 들어야 한다. 꼭 해야 할 말만 하기 때문에, 그들이 얼마나 많은 사고의 회로를 거쳐 지금의 말을 내뱉게 되는지 헤아려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아빠의 말은 모두 나를 위한 말밖에는 없다.

 


1. 샤부샤부를 먹으면서 나눈 대화

 

 

(내 그릇에 야채 건져주면서)

"사람이 하고 싶은 일만 하고 살 수는 없는 거다. ”

 


(야채를 소스에 찍어 먹으면서)

- 하고 싶은 일만 하면서 잘 사는 사람들도 있어.

 


“너 멀미 심한 게 누구 닮은 거 같냐.”

 


(계속 고기랑 야채 건져 먹고 있음)

- 갑자기 웬 멀미. 엄마 닮았겠지. 아빤 멀미 안 하잖아.

 


“나 닮았을걸.”

 


- 멀미하는 사람이 제트기를 어떻게 조종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첫 비행 때. 엄청나게 토해서 기내가 온통 토사물 천지였다.”

 


-???

 


“두 번째 비행부터는 무조건 제일 아침 시간에 연습했어.

장갑에 고무줄 끼워서 입에 쓰고. “

 

“그렇게 열 번 타고나니까 안 토하더라.”



 - 아빠 친구들한테 들은 얘기랑 다른데.

그 아저씨들은 아빠가 제일 잘 탔다고. 처음부터 잘 탔다고 했잖아.

 


“이른 새벽에 연습했으니까 아무도 몰랐지.

장갑으로 입을 틀어막고 했으니. 조종석도 깨끗했다. “


 

- 그렇게 힘들었으면 그만두지. 미련하게 열 번을 더 탈 생각을 했어?


 

“내가 하고 싶어서 시작한 일인데. 그렇게 빨리 포기해버리냐 짜식아.”


 


2. 운전을 하면서 나눈 대화



 

(운전하면서)

“결혼은 언제 할 거냐.”


 

(조수석에 앉아서)

- 결혼 생각 없는데.


 

“이제 생각해야지. 나이가.”


 

-잘 은 모르겠지만. 안 할 것 같아. 별로 하고 싶은 마음이 안 드네.


 

(갑자기 핸들을 돌림. 끼익. 굉음 내면서 갓길에 차 세움)

“뭐? 결혼을 왜 안 해!!!!!!!!!!!!!!!!!”



(솔직히 놀랐음. 아빠가 소리 지르는 거 중학교 때 이후로 처음 봄)

- 안 할 수도 있지. 아빠가 옛날 사람이라 그래. 요즘 안 하는 사람 많아.


 

“그럼 나 죽고 너네 엄마도 죽으면 어떡하려고 하냐

남들 다 지들 가정 꾸려서 사는데 평생 혼자 살 거냐?!!!!!!!!!!!!!!!!!!! “


 

- 다른 선택을 한 거지.

나는 남편이 벌어다 주는 월급으로 애나 키우면서 살고 싶지 않아.

결국 애는 여자가 키우게 된다고.

결혼은 하고 싶은 사람이 나타나면 하고 싶은 순간에 할 거야.


 

“너 지금 뭘 단단히 착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대단하고 거창한 것만이 행복이 아니야. “

 

“남들이 그렇게 사는데 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어.”


 

- 다수가 가는 길이 옳은 길이라는 거야?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부와 명예를 얻는다고 행복해지는 게 아니라는 거다.

사랑하는 사람이랑 자식 낳고 오순도순 사는 게 행복이지. “


 

- 아주 딸을. 대단한 야망가로 생각하시네 우리 아빠.



“결혼은 해야 돼. 안 하긴 왜 안 해.”


 

- 그 말 아빠가 하는 거 되게 웃긴 거 알지?



"..."



-...

 


먼저 샤부샤부 먹으면서 했던 대화는 나에게 충격 그 자체였다. 나는 아빠가 날 때부터 제트기 조종사인 줄로만 알았다. 태어날 때부터 조종사로서의 능력을 갖춘 사람. 그런데 그게 아니라니. 다른 사람보다 훨씬 많은 노력으로 만들어낸 결과물이었다니. 보는 시각에 따라서는 미련하게 생각될 수도 있다. 하지만 열 번 탈 때까지 토하면서 조종대를 잡았을 걸 생각하니. (열 번이 아니라 스무 번이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목구멍이 간질간질거리고 뜨거웠다. 울컥하는 마음이 들면서 머리에 쿵 하고 충격을 받아서. 담가 놨던 샤부샤부 고기가 고무줄처럼 질겨지는 줄도 몰랐다.


아빠는 핏줄에 대한 강력한 애정과 욕구로 가득한 사람인데. 자식을 위해서라면 어떤 일이든 할 만큼 희생정신을 타고났다. 나는 내가 그 점을 닮았을 까 봐 내심 불안하다. 말로는 아니라고 하지만. 만약 애를 낳게 된다면. '목숨 바쳐 최선을 다해 키워내겠지' 하는 무서운 생각이 드는 것이다. 아빠로서의 모습은 백점을 줘도 아깝지 않지만, 남편으로서의 아빠는 점수를 매길 수 없는 남자. 아빠는 모를 것이다. 결혼에 대한 환상을 착실하게 깨부숴 준 장본인이라는 걸. 그날 아빠와 나눈 결혼 얘기는 끝도 없이 원점으로 돌아가는 양상을 보였고. 우리 둘 다 지치고 말았다.


 

3. 아빠의 생일


 

아빠는 생일상을 몇십 년째 받아보지 못하고 있다. 본인 생일날 아버지가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나의 친할아버지는 내가 태어나기만을 기다리다가 돌아가셨다. 아빠의 생일날이 할아버지의 기일이기 때문에, 아빠는 미역국이나 케이크 대신 제사음식을 먹는다. 50대에 돌아가신 할아버지보다 열 살을 더 먹어 60대가 된 아빠여도. 여전히 쓸쓸하고 슬픈 생일을 맞는다. 그리고 아빠의 생일이 되면 아빠도 나도 아무 말이 없다. 기쁘게 축하를 건넬 상황이 만들어지는 일 따위는 일어나지 않는다. 할아버지가 무덤에서 일어나시지 않는 한.



4. 아빠의 수술



아빠와의 대화를 떠올려보고 아빠가 나에게 어떤 존재인지 떠올려보게 된 것은 아빠의 수술 때문이었다. 부정맥(심장이 일정하게 박동하지 않고 불규칙적으로 박동하는 질환)때문에 평소 약을 복용하고 있다는 건 알았지만. 당장 수술을 해야 할 정도로 심각하고 위험한 상황이라는 것은 몰랐다. 우리 가족은 힘들고 괴로운 일은 모두 혼자 감내하려는 경향이 있다. 수술 날짜를 혼자서 잡아 놓고, 입원절차를 밟을 때쯤 나한테 들켰다. 수술 전에 알아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보호자 서명란에 여러 차례 사인을 하고. 이런저런 위험한 상황이 생길 수는 있으나 병원은 책임질 수 없다는 내용의 비슷한 문장들을 듣고. 그것에 동의하고. 각종 검사를 받을 때 아빠 옆에 있어 주기. 이런 일이 있을 때만 자식 노릇, 딸 노릇을 한다. 환자복의 팔다리가 짧아서 두 번이나 갈아입는 아빠를 보면서 잠깐 웃기도 하고. 팔다리가 길쭉길쭉한 아빠의 체형과 내 체형이 판박이라는 점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동생과 번갈아 가며 입원실을 지켰고 수술 당일인 오늘- 나는 회사에서 일을 했다. 아버지가 수술받는다고 하면 하루 일 쯤은 빼낼 수 있을 건데. 아빠는 단호히 나를 거절했다. 오히려 이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마음이 무거워서 일이 손에 잡히지 않지만, 병원에 있었다면 바보같이 울기밖에 더 했을까 싶다. 대학교 졸업반인 동생 녀석이 나 대신 수술실 앞을 지켰다. 수술 결과와 경과를 동생을 통해서만 듣다가, 밤 열 시. 아빠와의 전화통화는 일분이 채 안된다. 조금 더 다정스럽게 이것저것 묻고 걱정하는 내색을 했어야 했는데. 나는 왜 이 모양 이 꼴인 걸까. 다정스럽지 못한 딸을 둔 아빠가 안됐다. 나는 이제 아빠의 처지를 불쌍히 여길 만큼 나이를 먹었는데. 왜 아직도 표현하지 못하는가.


수술은 잘 됐다. 회복 중인 아빠의 목소리에는 힘이 하나도 없다. 내색하지 않는 양반이 그렇게 안 보이려고 노력한 게 이 정도인걸 생각하면 속이 상한다. 심장을 20군데나 지졌는데 지치고 피곤할 것이다. 나보다 더 속이 상한 게 본인 일거다. 내가 멋지고 훌륭한 사람이 아니라서 화가 난다. 호강은커녕 걱정만 끼치는 딸내미는 최악인데. 최악이 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밤. 누굴 위한 노력인지 헷갈린다. 지금 이 상태면 두통과 불면과 다래끼가 삼위일체 된 새벽을 보낼 것이다. 수술이 잘돼서 다행이고 그렇지만 걱정이고 조금 슬프다. 방향을 알 수 없는 곳에서 서글픈 감정이 흘러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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