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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K에게. 0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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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영원 Mar 24. 2022

꿈의 해석(1)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인간의 무의식에 대해 깊이 탐구했을 뿐만 아니라 꿈에 관한 책까지 썼을 정도로 철저히 꿈을 분석한 사람이다. 그가 해석한 꿈의 원리가 전부 들어맞는다는 생각은 안 하지만, 어느 정도 일리는 있다고 인정하는 바. 오랫동안 묵은 불면증을 앓고 있다. 문제는 고작 2~3시간 자는 와중에 꿈은 엄청나게 꾼다는 거다. 단순히 꾸는 꿈의 개수가 많을 때도 있고, 하나의 꿈을 아주 긴 시간 꾸는 경우도 있다. 꿈에 관해서는 제2의 프로이트라고 자부할 만큼 꿔댔다고 보면 된다. 그 때문일까. 기억을 중시하는 것을 넘어 철저히 지배당하는 스타일이다.     


다양한 꿈을 꾸지만 그중에서 자주 꾸는 꿈은 따로 있다. 주로 무언가에게 쫓기는 꿈. 무언가를 찾는 꿈이다. 맞아. 정말 쫓기거나 찾아 헤매거나.     

두 번째로 많이 꾸는 꿈은 ‘과거의 일’이다. 과거에 있었던 일련의 사건들. 같은 꿈을 사흘 내내 꾼 적도 있을 정도인데 그런 날은 하루의 시작을 완전히 망쳐버린 느낌.     

꿈속에 누군가 등장하기라도 하면 좀 낫다.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인 꿈도 있으니까. ‘망망대해 작은 뗏목 위의 꿈’ 은 살면서 꿔본 꿈 중에 손꼽힐 정도로 끔찍했다.     

내리쬐는 태양에 뜨겁기도 하고 눈이 부시기도 하여 일어나 보면 작은 뗏목 위에서 깨는 것이다. 더운 한낮. 바다 한가운데 햇볕은 내리쬐고 그 햇볕을 피할 곳은 없다.     

뗏목 위에 앉아서 해가지길 기다리는 수밖에. 밤이 되면 시커먼 물아래서 어떤 존재가 나올지 몰라 무릎을 부둥켜안고 덜덜 떠는 꼴이란. 사방이 물이라서 바닷물 특유의 비릿한 냄새와 습한 기운도 한몫한다. '정녕 이게 꿈이 맞나.' 싶을 정도로 현실감 있는 꿈.     

비라도 내리는 날에는! 오, 다시 생각해도 정말 끔찍하다. 그러나 가장 끔찍한 부분은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라는 점이다. 현실에서 혼자 있는 것과 꿈속에서 혼자 있는 것에는 쓸쓸함의 간극이 깊다.     

그래도 가끔 누군가 나온다면. 보고 싶어도 지금은 볼 수 없는 사람들.     


꿈을 꾸면서 알게 된 사실이 있다. 꿈에도 주기가 있다는 사실. 주로 악몽의 순환이라서  그것을 ‘악몽의 주기’라고 이름 붙였다. 예를 들면 여름이 오기 전에 꼭 심한 감기에 걸리는데 5월과 6월 사이에 싫어하는 유형의 악몽이 전부 등장하게 된다. 몸이 쇠약한 상태에서는 정신도 쇠약함에 동참하게 되는 건지.     

‘악몽의 주기’를 파악하고 난 뒤에는 알 수 없는 공포감으로부터 확실히 담담해졌다. ‘나는 이미 알고 있어.’ 하는 기분이 묘한 안도감을 주는 것이다. 인간은 대부분 알지 못하는 일이 갑작스레 벌어지는 상황을 즐기는 편이 못된다.     


나의 인맥은 두 갈래로 나뉜다. (나의) 불면을 걱정하는 사람들과 내가 불면증에 걸린 환자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로. 불면증을 심각한 병으로 인식하는 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처음엔 ‘이러다 말겠지. 잠 좀 안 오는 게 뭐 별거라고.’ 생각했다. 심각한 것들 로부터 도망치는 습관이 상태를 악화시켰다.     

예기치 못한 사건이나 일상의 흐름을 깨부수는 모든 것들을 그저 별일 아닌 것으로 여기는 게 힘든 순간을 이겨 내기 위한 방법(좋은 방법이 아니다)으로 쓰였다. 이겨낸 것이 아니라 어쩌지 못해 버티는 일. 외면하는 일이 되고 말지만 말이다. 나는 행복을 먼 곳에 두고 찾는 사람이었고 언제나 행복해지길 꿈꿨다. 현실의 내가 행복하다고 느끼지 못할 때마다 괴로웠다. 그렇다고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불면과 두통은 내가 가진 부정적인 것에서 자라났을 것이다. 나는 부정적이길 타고났으니까.     

계획적이거나 철두철미하지 못해서인지 몰라도. 일과 일상생활의 온도차가 극심했다. 일할 때만큼은 완벽주의자 행세, 현실의 나는 너무 작고 부스러지기 쉬운 형태.     

공적으로만 나를 아는 사람과 사적으로만 나를 아는 사람. 그 둘이서 나에 대해 얘기한다면. 뭐야 얘. 이중 인격자인가. 할 수도 있을 정도다. 일 밖에서의 나는 일상 바보 소리를 들을 정도로 덜렁거리는 캐릭터. 요즘은 그걸 뚝딱거린다고 말하던데. 정확히 어떻게 표현해야 덜렁 거림을 묘사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아주 대부분의 경우 모든 에너지원이 증발해버린 사람 같다고 느낀다. 일상의 사사로운 부분을 챙기지 못하고 사는 것이다. 내 손으로 직접 요리를 해 먹는 일 말고는 철저하게 배터리가 방전된- 고물 덩어리.     

잠을 긴 시간 동안 못 자면 신체에 여러 가지 증상이 나타난다. 안구건조. 두통. 어지럼증. 헛구역질. 구토. 갈증... 예민한 사람일수록 다양한 증상을 겪게 되는 구조고- 나는.     


예민한 사람.     


다른 것들은 견딜만해도 가장 고통스러운 증상은 두통이다. 두통이 있는 사람들은 알고 있을 거다. 신체의 그 어떤 부위의 고통보다도 고통스럽다는 걸. 팔이나 다리. 배의 통증이- 정신력으로 버틴다는 말이 통한다면. 두통 쪽은 그게 안 된다. 정신의 개입이 통제된 느낌.     

불면증을 겪는 사람들은 바로 이런 점이 억울하다고 할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본인은 잠이 너무 많아서 탈이라나. 잠 못 자는 사람이 부럽다고 얘기하는 경우도 있으니까.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의 얘기를 계속 들어보면. 꽤나 논리적인데 그 논리가 너무 짜증 나서 나도 모르게 미간이 찌푸려지거나 두 주먹이 꽉 쥐어진다.     

잠을 자지 않으면 남들이 자는 시간 동안의 시간을 벌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자는 시간 동안 공부를 더 하면 되잖아.” “돈을 더 벌 수 있잖아.” 음. 그런 건 두통을 겪지 않을 때의 이야기다. 잠을 자지 않는데 머리가 온전할 리 없다. 그리고 두통은 내가 관할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고.         

몸과 정신이 깨어 있는 시간은 말 그대로 쉴 수 없는 시간이다. 어떤 책에서 인간은 ‘잠’을 통해 쉼을 허락받았다고 했다. 나는 쉴 수 없는 시간 동안 많은 것들을 생각하고. 다짐하고. 결심하고. 슬퍼하고. 화를 낸다. 이미 지나간 시간들에 대해서는 기억하는 것도 기억하지 않는 것도 할 수 없어서 괴롭고. 아직 오지 않은 시간들에 대한 불안함과 초조함에 괴롭다.   

  

새벽은 호소할 수 없는 시간. 모두들 잠자리에 들 시간.     

깨어 있는 정신은 나쁜 것들을 즐긴다. 과거의 일. 슬픈 기억. 화나는 기억. 미래에 대한 걱정과 고민. 없는 고민도 만들어 낼 기세로 철저하게 칼날을 세우고 파고들고. 또 파고들고. 예리한 칼날이 마음을 후벼 놓아서. 기분 좋은 아침을 맞이한 때가 언제 인지 기억도 안 난다.     

게다가 잠들고 나서는 무슨 꿈을 이렇게 많이 꿔 대는지. 몇 시간 자지도 않는데. 그마저도 편한 잠은 못된다. 이럴 거면 엄청난 천재성이나 타고날 것이지. 천재 예술가의 흔한 질병으로 딱 알맞은 불면증을 겪고 있으면서.     


불면이 초래한 두통은 환상을 선사하기도 한다. 물론 나에게는 잠을 자는 일이 훨씬 더 환상적인 일이지만. 영화 올드보이에서 나오는 개미 환상 같은 일은 현실에서도 일어난다. 처음에는 꿈을 꾼 것인 줄 알다가. 그다음에는 ‘시력이 나빠서야.’ 하고 타협안을 제시. 그럴 수 있는 일이란 걸 알게 되었다. 제일 자주 반복적으로 겪는 환상이 있는데. 모든 사물이 위아래서 잡아당긴 것처럼 길쭉하게 보이는 것이다. 사람도 마찬가지라. 거리를 걷는 사람들이 전부 기다랗게 보인다. 외계인처럼 키가 비현실적으로 커지고 왜곡되어서.    

 기다란 환상을 경험하는 순간은- 두통이 심해서 어떤 일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괴로울 때다. 그럴 때는 한 걸음 내딛는 것도 울렁거려서 어디 앉아서 쉬거나 벽에 기대야 한다. 머리는 또 왜 이렇게 무겁게 느껴지는지. 이러다가 내 목이 훅 하고 부러지는 거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한 적 있다. 일 하는 중에 이런 현상을 경험할 때는 아무렇지 않은 척 연기해야 하는 수고로움이 따르지만. 환상 자체가 나쁘지는 않다.     

가장 큰 환상은 언제 잠든지도 모르게 스르르 잠에 빠지는 일. 현실에서 좀처럼 일어나지 않으니까 환상적인 일 그 자체. 언젠가 펼쳐질 환상을 위해-지금 이 순간도 견뎌내는 중이고. 그래도 까만 밤에 잠드는 사람들이 부러운 건 어쩔 수 없다.     


잠 못 이루는 새벽이 언제부터였는지 떠올려보면. 열아홉의 가을? 겨울? 가을과 겨울의 중간 계절로 기억한다. 특별한 계기가 있다거나 일생일대의 사건을 겪은 해도 아니었다. 그동안의 습관이 조금씩 쌓여서 이런 결과를 낳은 것인지. 예민한 성격 때문에 잡념들에게 집어삼켜진 건지. 원인을 알 수 없는 증상에 몸도 마음도 지쳐만 가는 일을 지금까지도 당하는 중이다.     

10년이 넘도록 수면장애를 겪다 보니. 체력적으로 너무나 큰 손실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며 산다.     

불면증을 고치기 위한 노력도 해봤다. 상담치료와 수면제 복용. 그 밖의 다양한 시도들.     

상담치료는 정말 고역이었다. 정신과 상담이라는 게 의사에 대한 어느 정도 믿음이 있어야 효과가 있는 일인데. (이하 생략)     

치료 자체도 언제까지 계속해야 하는지 기약 없는 고통이었다. 불면증과 관계된 모든 것들이 고통.      

그래서 “저는 어디든 머리만 대면 잘 잔답니다.” 하는 말을 하는 사람을 보면 온 마음을 다해 부럽다. 그것은 정말 축복이다! 쌍꺼풀 진 큰 눈이 축복이 아니라(다시 생각하니 이것도 축복 맞다) 자고 싶을 때 잠이 오는 것 자체가 축복.     


절친한 친구를 만났을 때 제일 먼저 받는 질문은- “요즘 도야?” “똑같지?” “잠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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