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름, 영글던 시간들
내가 여덟 살 즈음, 동네 곳곳이 포도밭으로 가득하던 시절을 기억한다. 눈을 뜨면 햇살이 쏟아졌다. 말 그대로, 쏟아졌다. 마당 너머 골목길, 그 너머 야트막한 언덕까지, 온 동네가 부드러운 금빛으로 뒤덮였다. 포도잎은 푸르게 번들거렸고, 바람은 그 사이를 능청스럽게 지나갔다.
그 포도밭 안에서 우리는 하루 종일 뛰어다녔다. 누가 술래였는지도 잊어버린 채, 숨바꼭질이 끝나면 흙바닥에 앉아 작은 냄비 하나로 소꿉놀이를 시작했다.
누군가는 “나는 아빠 할래!” 하고 외쳤고, 또 누군가는 “넌 아기야!” 하며 배냇짓을 흉내 냈다. 우리는 스스로 역할을 정하고, 때로는 싸우고, 이내 다시 웃으며 손을 맞잡았다.
그늘진 포도잎 아래서, 우리는 조용히 영글고 있었다. 세상이 뭔지 잘 몰라도 괜찮았다. 그땐, 그냥 그렇게 웃고 뛰어노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포도철이 오면 동네 전체가 달큰한 향기로 진동했다. 낮은 포도나무 사이로 기어들어가면, 그 안은 초록빛 비밀 공간 같았다. 아이들 키만 한 가지 사이로 잎사귀가 만드는 그림자와 햇빛의 조화가 눈부셨다.
가지마다 매달린 포도알들은 작고 단단했으며, 마치 보석처럼 반짝였다. 가끔은 포도 하나하나에 바스락거리는 얇은 종이 포장지가 감겨 있었는데, 그 소리는 지금도 귀 속에 남아 있다.
우리는 엄마가 되고, 강아지가 되고, 하루에도 열두 번씩 역할을 바꾸어 소꿉놀이를 했다. 포도밭은 우리에게 무대이자 우주였다.
하지만 세상은 조용히, 그리고 거침없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재개발. 아파트. 분양. 낯선 단어들이 어른들 입에서 오르내렸고, 논과 밭은 어느새 회색 펜스로 둘러싸였다. 포도밭도, 놀이터도, 하나씩 사라졌다.
우리 가족도 마찬가지였다. 형편이 넉넉지 못했던 우리는 더 외곽의 낯선 동네로 이사했다. 처음 보는 골목, 처음 보는 학교, 낯선 얼굴들 속에서 새로 적응하느라 어린 마음에 힘이 들었다.
그럼에도 나는 옛 동네를 잊지 못했다. 초등학교 3학년이던 어느 날, 친구들이 너무 보고 싶어 전철표를 샀다. 엄마 몰래, 작은 불량식품 몇 개와 함께. 전철로 네 정거장. 열 살짜리에게는 엄청난 모험이었다. 익숙한 골목으로 들어서자, 높은 아파트들이 하늘을 막고 있었다. 마치 내 추억 위로 그림자가 들어선 것 같았다.
그리고 나는 알았다. 끝났구나.
어린 날 우리의 웃음소리도, 비밀 터널도, 얇은 종이 포장지를 감싸고 있던 설렘도, 이제는 없다. 시간이 흐르며 친구들과의 대화는 어색하게 끊겼고, 우리는 점점 더 모르는 사람이 되어갔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더 이상 그 동네로 향하지 않았다. 그리고 언젠가 우연히 그 동네를 다시 찾았을 때, ‘포도마을’이라는 이름의 아파트 단지가 그 자리에 들어서 있었다. 너무도 말끔하고, 너무도 낯설게.
아이러니했다. 포도는 없고, 이름만 있었다. 그 많던 포도밭의 흔적은, 이제 아파트 이름 하나만이 그곳이 예전에 포도밭이었다는 사실을 남겨놓았다.
그곳은 더이상 내가 뛰놀던 포도밭이 아니었다. 그 시절의 웃음도, 목소리도, 햇살에 반짝이던 포도알도, 이젠 상상에서만 존재했다. 사라졌다는 건, 붙잡을 수 없다는 뜻이다. 너무도 당연해서 슬픈 진실.
나는 종종 생각한다. 그날, 그곳, 함께 숨었던 여자아이들. 질투하고, 울고, 금세 웃으며 손잡던 그 순간들. 그리고 그 속에 있던 나. 세상을 무서워하지 않고, 마음을 솔직하게 꺼내놓을 줄 알던, 여자 아이. 내 유년기의 모든 계절은 그 포도밭에서 피어났다.
나의 포도밭 소녀. 세상을 다 알지 못해도, 마음껏 웃고, 울고, 사랑할 줄 알았던 그 아이는 지금도 내 안에 있다. 나를 처음으로 세상과 연결해주었던 그곳. 내가 처음으로 진짜 마음을 배운 곳. 그곳이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있다.
잘 지내니? 포도밭 소녀야.
너는 여전히, 포도잎 사이로
햇살을 머금은 얼굴로 내게 말을 거는 듯해.
누군가에게 엄마가 되어 밥을 지어주고,
언니가 되어 손을 내밀고,
강아지가 되어 굴러다니던 그 모든 순간들.
너는 그 안에서 삶을 배우고 있었어.
사랑을, 용서를, 기다림을.
울고, 웃고, 토라지고, 다시 손잡으며
넌 그렇게, 조용히, 영글어 갔지.
햇살에 반짝이던 포도알처럼.
세상은 변해도
너의 맑고 단단한 마음만은 변하지 않길.
고마워.
나의 가장 찬란했던 계절,
나의 포도밭 소녀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