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안아준 계절은 너였어

그 겨울은 따뜻했네…

by Miyuki

가끔 생각한다. 신이 정말 존재한다면, 어떤 모습으로 우리 삶에 찾아오는 걸까. 빛처럼 찬란하게? 아님, 조용하고도 은밀하게?


어쩌면 그는, 우리가 더 이상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을 때,

가령 슬픔에 무너진 어느 겨울날, 예상치 못한 선물처럼 다가오는 건 아닐까.


나는 그해 겨울, 그런 선물을 받았다. 너무나 따뜻하고,

그렇게나 다정한 얼굴로 찾아온 기적 같은 선물.


그저 내 인생의 어느 한 페이지에 잠깐 등장했다가 사라진 사람인 줄로만 알았던 그 아이는 알고 보니 가장 어두운 계절에, 다시 나타나 나를 깊은 어둠에서 꺼내주었다.


어쩌면 우린 생각보다 단순한 존재일지도 모른다. 분명 방금 전만 해도 일을 마치고, 손이 덜덜 떨릴 만큼 배가 고파서 ‘사는 게 왜 이렇게 지치고 힘들지’ 싶었는데, 막상 따뜻한 밥 한 그릇을 배불리 먹고 나니, 전혀 다른 생각이 든다. 참 간사하다 싶으면서, 지난겨울 내게 일어났던 일이 갑자기 기적처럼 느껴졌다.


나는 그 아이와 함께 내가 자주 가던 동네 숲을 함께 걷고 있었다. 내가 외로움에 익숙해져 갈 무렵, 말없이 나를 품어주던 비밀의 숲 말이다.


겨울의 숲은 적막했다. 잎을 다 떨군 나무들은 해골처럼 가지만 남아, 언뜻 보기엔 생명이 멈춘 듯 보였다. 그러나 그 속엔 고요히 숨 쉬는 생의 기운이 숨어 있었다.


차가운 바람은 나무 사이로 길게 미끄러졌고, 축축하게 얼어붙은 낙엽은 발아래서 조용히 부서졌다. 공기는 투명했고, 하늘은 낮게 드리워진 연한 회색이었다. 햇빛은 나뭇가지 사이로 비집고 들어와, 가지 끝마다 은빛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럼에도 부서진 낙엽 사이로 흔적을 남기는 걸음마다 맑고 깨끗한 공기가 폐 속 깊숙이 스며들었다.


“여기가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곳이야.
사람들이 잘 안 다니는 숲길인데,
혼자 걸으면서 마음이 좀 정리됐거든.”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가늘게 뜨고는 숲의 풍경을 눈에 담았다. 이윽고 카메라를 꺼내, 겨울의 빛이 기울어가는 풍경을 천천히, 그러나 열심히 프레임 속에 담기 시작했다. 오후의 기울어진 빛이 숲을 어슴푸레 덮고 있었다.


그 아이가 어쩌다가 그 겨울을 나와 함께 보내게 되었을까.

지금 생각해도 믿기지 않는 일이다.


아버지가 떠난 후, 사촌 부부와 그렇게 멀어지고 나는 홀로 외진 동네로 이사를 나와 지냈다. 그런 내 상황을 한국에서 전해 들은 수인이는 긴 통화 끝에 간단명료하게 그러나 분명히 말했다.


언니, 제가 그리로 갈게요.


그리곤 정말 왔다. 두 달짜리 비행기표를 끊고, 손에는 대형 캐리어 두 개를 이끌고, 이곳으로 날아왔다. 진심으로 내게 힘이 되어주고 싶어서, 직접 얼굴을 보고 위로하고 싶어서 왔단다.


처음엔 얼떨떨했다. 하지만 공항버스 정류장에서 그녀를 마주했을 때, 그제야 이 기적 같은 일이 현실이라는 걸 실감했다. 우리는 다시 그렇게 이어졌다. 수인이와의 인연은 시간을 오래 거슬러 올라가 한국의 작은 공동체에서 시작된다.


내가 한국에서 지낼 때, 그녀는 아이러니하게도 사촌 동생 부부와 더 먼저 알고지내 가까운 사이였고, 우리는 그저 어쩌다 몇 번 커피 모임에서 얼굴을 마주쳤을 뿐이다. 느긋하고 여유로운 성격에, 예술을 사랑하는 그 아이는 어쩐지 오래 알고 지낸 사람처럼 내 마음을 끌었다.


어느 날, 그 아이는 우리가 잘 맞을 것 같다는 생각으로 나에게 한 번 밖에서 따로 만나자고 했고, 그렇게 처음 함께 간 곳이 미술관이었다. 그림을 앞에 두고 이야기를 한참 나누다 보니 시간은 금세 흘렀고, 영화 한 편, 카페 한 자리, 그리고 결국 내 집에서 밤새도록 이어진 대화로 우리는 가까워졌다. 열 살 차이라는 숫자가 의미가 없을 만큼, 우리는 잘 통했다.


그러나 내가 미국으로 온 이후로, 자연스럽게 연락이 뜸해졌다. 몇 년에 한 번, 안부를 주고받을까 말까 하는 사이가 되어버렸다. 그러다 아버지의 부고와 관계의 단절 속에서 외로움에 잠겨 있던 내게, 그녀가 어느 날, 뜬금없이 다시 연락을 해온 것이다. 그리고는 주저 없이, 먼 길을 건너 나를 찾아와 주었다.


미국에서 보여줄 것은 넘치게 많았지만, 그녀가 돌아가기 전 나는 꼭 보여주고 싶은 장소가 있었다.


그 숲. 내 외로움과 상실의 감정이 고스란히 스며든 그곳. 우리는 그곳에서 사진을 찍고, 오래도록 이야기를 나누며 돌아왔다.


마치 시간이 과거로 되돌아간 듯, 우리는 다시 함께 웃고 울며 지난 계절을 내 작은 공간에서 살아냈다. 그 두 달은, 정말이지 기적 같이 따뜻한 시간이었고, 눈부시게 소중했다.


긴 겨울이 지나는 길목, 그 아이가 떠난 날, 믿기지 않아서 침대에 멍하니 앉아 있는데, 탁자 아래에 못 보던 종이 가방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가방을 열어 보니 안에는 정성스러운 글씨로 꼭꼭 눌러쓴 편지 두 장과, 겨울 내내 망설이며 들었다 놨다 했던 연갈색 스웨이드 가방이 들어 있었다.


편지를 읽는 순간, 끝내 참았던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내게 와서 소중한 시간을 선물처럼 함께 한 것도 모자라, 몰래 그렇게, 따뜻한 마음까지 두고 간 것이다.


나는 공항에서 그때쯤이면 한국행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을 그 아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수인아. 이번 겨울 말이야.
나한텐 정말 선물 같은 시간이었어.
고마워. 또 놀러 올 거지?


진심이었다. 슬픔이 너무 크고 깊어 어디에도 닿지 못하던 딱 그 시간에, 어쩌다 그런 따뜻한 기적이 내게 왔을까.

신께서 내 슬픔이 너무 오래가지 않도록, 이 친구를 선물처럼 보내주신 건 아닐까.


그해 겨울, 내게 진짜 선물은 스웨이드 가방이 아니라, 수인이었다. 그 겨울은 따뜻했고, 시간은 빛처럼 빠르게 흘러갔다.


그날 함께한 숲길과 그 겨울의 웃음들, 그 아이가 놓고 간 편지를 떠올릴 때마다 나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신은 때때로 사람의 얼굴로, 손의 온기로, 말의 숨결로 우리 곁을 지나간다고.


내 이성으로 설명할 수 없는 그 겨울의 시간은, 이제 내 마음에 단단히 자리 잡은 하나의 확신이다. 그것은 ‘기억’이 아니라, ‘선물’이었다.


“마음에는 이성이 알지 못하는 이유들이 있다.”
파스칼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