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 앞에 앉아

세상 밖으로 내 안의 음표를 꺼내던 순간

by Miyuki

학교를 졸업하고 쉼 없이 달려온 지 9년쯤 되었을 무렵, 나는 정말 몸도 마음도 한계에 다다른 듯했다. 아침마다 끌려가듯 출근했고, 점심시간이면 도망치듯 거리로 나가 광화문 근처 덕수궁 돌담길을 천천히 걷곤 했다. 도심 한복판에서 그나마 숨을 돌릴 수 있는 공간이었지만, 머릿속은 전혀 평화롭지 않았다. 구불구불 이어지는 돌담을 따라 걸으면서도 생각은 복잡했다.

“도대체 여기에서 무얼 하고 있는 걸까.”

“언제까지 이런 삶을 견딜 수 있을까.”

한동안 나는 견디는 사람처럼 살았다. 버티면 무엇인가 달라질 거라고 믿고 싶었지만, 정해진 패턴의 지루한 일상은 내 감각들을 그저 무디게 만들 뿐이었다.

오후 세 시 즈음이면, 감정은 절정을 향했고, 나는 눈에 보이지 않는 벽 앞에 서 있는 기분에 자주 사로잡혔다. 어느덧 마음속에 자라난 이탈의 감정은, 점점 더 뿌리를 깊이 그리고 넓게 뻗어 내려가고 있었다.

그 무렵, 나는 나 자신에게 묻기 시작했다.

무엇이 나를 숨 막히게 만들고 있는지.

정말로 내가 원했던 삶이 무엇이었는지.

답은 천천히 드러났다.

나는 오래전부터 창작을 갈망해 왔다는 걸.

내 머릿속에는 정리되지 않은 멜로디의 파편들이 늘 어지럽게 돌아다녔다. 나는 그것들을 그냥 흘려보내고 싶지 않았다. 그것들을 붙잡아 형태를 부여하고, 감정을 덧입히고, 하나의 완결된 무엇으로 만들어보고 싶었다.

문득, 피아노가 떠올랐다. 오랫동안 나와 함께 해온 악기. 이 익숙한 악기를 처음부터 다시 배우고 싶어졌다. 연주가 아니라, 창작하는 사람으로서.

그 욕망은 두려움과 설렘을 동시에 동반했고, 나는 조용히 준비를 시작했다. 1년 동안 돈을 모았고, 마침내 나는 사표를 내고 혜화동으로 향했다. 서울재즈아카데미로.

작편곡과에 등록한 후의 시간은 숨 가쁘게 흘러갔다. 나는 매일 오선지를 마주했고, 코드와 템포와 장르라는 낯설지만 설레는 단어들을 익혀나갔다.

음악이라는 언어는 익숙하다고 생각했지만, 창작의 세계는 그보다 훨씬 넓고 낯선 세계였다. 규칙을 익히는 것이 아니라, 부수고 다시 조립하는 일이었다.

나는 연습실 하나를 빌려 매일 피아노 앞에 앉았다. 연습실은 업라이트 피아노가 딱 하나 들어가기 좋은 크기였다. 작은 공간이었지만 햇빛이 적당하게 들어선 그 안락하고 비밀스러운 공간을 나는 틈날 때마다 드나들었다.

하얗고 검은 무거운 건반이 꽉 들어찬 검은색 피아노 앞, 딱딱한 나무 의자에 하루 종일 앉아서 비트를 해체하고, 리듬을 재배열하고, 감정을 덧입혀 곡을 만들었다.

때로는 보컬리스트 친구를 빌려와 내 멜로디에 묵직한 목소리를 얹고, 기타리스트의 선율로 곡의 결을 바꿔보기도 했다. 음악은 내 안의 세계를 무한히 열어주기도 했지만, 때로는 그 무한함이 나를 압도하기도 했다.

하루 종일 혼자 앉아서 곡을 만드는 날은 좀 외롭기도 했다. 막상 좋아서 시작한 일인데 외롭다는 건 전혀 예상 밖의 일이었다. 그러면서 나는 서서히 깨달았다. 음악은 혼자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함께 만들어갈 때 더 깊어진다는 것을.

나는 작곡과 동기 친구들과 매주 만나서 자신이 만든 곡을 서로에게 들려주며 피드백을 주고받았다. 피아노 앞에 앉아 조심스럽게 악보를 펼치는 그 시간은, 마치 모노드라마처럼 진지하고 소중한 시간이었다. 이건 이래서 좋고, 저건 저렇게 바꾸면 더 살아날 거라는 격려의 말을 나누며 우리는 서로의 음악을 키워주었다.

마침내 1년 반이라는 시간이 흘러, 마지막 공연이 다가왔다. 나는 함께했던 동료들을 다시 불러 모았다. 보컬, 기타, 베이스, 드럼, 그리고 나. 우리는 한 곡을 위해 수많은 밤을 새웠고, 그 곡은 우리의 시간과 성장의 기록이 되었다.

공연 당일, 우리는 무대 위에서 그 모든 것을 후회 없이 쏟아냈다. 음표들은 하나의 호흡이 되었고, 소리는 다채로운 감정이 되어 무대를 꽉 채웠다.

공연이 끝난 그 밤, 우리는 술집에 모여 서로를 바라보며 잔을 부딪쳤다.

“우리 진짜 해냈다. 이제 다 끝난 건가”

누군가의 말에 모두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음악 안에서 하나가 되었고, 끝이라는 아쉬움에 서로를 따뜻하게 꼬옥 안아주었다.

그 후로 나는 다시 혼자가 되었다. 창작은 여전히 고독하고, 음악은 여전히 거대하게 느껴진다. 나는 그 길 위에 오래 머무르지 못했지만, 돌아보면 후회는 없다. 가보지 않은 길 앞에서 미련을 품기보다, 가보고 내려놓는 편이 내겐 더 어울리는 일이었다.

나는 지금도 여전히 피아노 앞에 앉는다. 어떤 날은 음표 하나가 문득 떠오르고, 어떤 날은 이유 없이 손이 건반을 향한다. 그럴 땐 천천히 멜로디를 따라가며 세상 밖으로 음표를 자유롭게 꺼내 놓는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 최고의 뮤지션이 아니어도 괜찮다. 노래를 만들고 싶을 때, 내 노래를 자유롭게 만들 수 있다면 나는 그것만으로도 족하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