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받고 싶어 죽겠는데 미움은 단 한 뼘도 못 견디는 사람. 나는 그런 사람이다.
“혹시나 미움받을까 눈치나 살살 보고, 변덕스럽게 이랬다저랬다 거짓말이나 뻔뻔스럽게 하고, 사랑받고 싶어 죽겠다고 매달려 놓고 사랑받지 못할 거라고 도망가 버리지. 지가 못하겠다고 도망가 놓고는 또 자기를 미워하지 않았으면 좋겠고. 참 미친년.”
*넷플릭스 드라마<이 사랑 통역되나요?>중
드라마 속 이 짧은 대사는 마치 내 자기소개 같았다. 나는 늘 상대의 눈치를 살피며 사랑받기 위해 스스로를 지우고 과하게 맞춘다. 그러다 상대가 나를 조금이라도 싫어할 것 같은 기색이 보이면 미움받기 전에 먼저 도망가 버린다. 거절당하고 버림받는 아픔보다는 먼저 끊어버리는 비겁함이 차라리 덜 아프니까. 그 와중에 자기혐오까지 한다. 드라마 속 주인공처럼 스스로에게 외친다.
“참 미친년.”
이것이 우울이란 친구가 내 마음의 연못을 흙탕물로 흐린 뒤 겪는 가장 힘든 점이다. 우울이 내게 가져다준 것 중 가장 마음에 안 들고 불편한 것.
이 때문에 나는 사람 대 사람으로 너무 존경하고 좋아하는 선배와의 협업에서도 늘 ‘민폐’라는 단어를 가장 먼저 떠올린다. 내가 먼저 함께해달라고 제안해 놓고도 바쁜 선배의 시간을 뺏어 피해를 주고 있는건 아닐까 전전긍긍한다. 특히 글쓰기라는 작업의 특성상 깊은 내면을 공유할 수밖에 없는데, 심리적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공포를 느낀다. 나를 더 잘 알게 되면, 결국 나를 미워하게 되지 않을까. 함께 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나에 대해 깊게 알게 되면 실망하는 부분들을 발견하게 되겠지. 그럼 결국 버림받겠지. 그래서 나는 또 도망을, 먼저 버리는 다정함을 진지하게 생각했었다.
또 부끄럽지만 평생을 함께하기로 한 남편과의 관계에서도 나는 100퍼센트 안전하다는 믿음이 없다. 어제는 사랑한다는 표현을 세 번 해줬던 그가 오늘은 한 번만 표현해 주면 즉시 ‘내가 뭘 잘못했나? 사랑이 식나?’를 가장 먼저 생각한다. 주말엔 가끔 내가 약기운에 낮잠이 든 사이 남편이 혼자 집 청소를 하고 있을 때면 나는 또 “미안해”라는 말과 함께 그의 눈치를 살핀다. “괜찮아. 피곤하면 잠들 수도 있지. 잘 잤어?”라는 다정한 그의 말에도 계속.
이 모든 게 5개월 전 우울이란 친구를 만나고 시작되었다. 그렇기에 증거 없는 나 혼자만의 병적인 인지 왜곡이란 점도 안다. (다행인 건가…?) 그럼에도 멈춰지지 않는 것을 보면, 어쩌면 나도 모르는 사이 평생 속으로 삭혀온 것을 그 친구가 꺼내준 걸지도 모르겠다.
“너 지금 한계야, 더 가면 큰일 나. 그러니까 지금 바로잡아!”라며 “펑!”하는 굉음과 함께 터트려준 경고등.
약의 부작용으로 멜라토닌을 먹고도 고작 3시간밖에 못 자고 일어난 열네 번째 새벽 5시. 나는 결국 친구를 먼저 버릴 다정함을 한 손에 쥐고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친구는 이런 나의 이야기를 듣고 '방음벽이 없는 방에 사는 사람' 같다고 했다. 남들은 신경도 안 쓰는 미세한 잡음과 타인의 감정적 소음까지 온몸으로 흡수하니까. 읽고 싶지 않은 부분까지 모조리 읽히고, 보고 싶지 않은 부분까지도 보이기 때문에 방전된 거라고.
“네가 지금 얼마나 싹 방전된 상태인지 완전히는 아니지만 조금은 알 것 같아. 심지어 약까지 바꾸고 3시간밖에 못 자는데 멘탈이 버티는게 더 이상한 거라고 생각해. 그나마 너라서 이렇게 대단히 버티고 있는 거야.” 동이 틀 무렵 도착한 친구의 다정함은 내가 한 손에 쥐고 있던 먼저 버릴 다정함을 내려놓게 만들었다.
“너가 원치 않아도 분위기가 다 읽히는 건 너의 감정 스위치가 남들보다 섬세해서 그런 거잖아. 그 스위치를 마음대로 껐다 켰다 할 수도 없고...너가 사람한테 매달렸다가 끊어냈다 하는 것도 결국 그 스위치에 왔다 갔다 하는 감정이 너무 피곤하니까 조금이라도 덜 발버둥 치기 위한 방어기제 같은 거라고 생각해. 나 내일 아침에 랜딩하는데 너 보러 갈까?” 내가 나를 미친 사람이라고 스스로 몰아세울 때, 이 무조건적인 다정함은 나를 무너뜨렸다.
나는 이 지독한 불안을 고칠 방법을 여전히 찾지 못했다. 어쩌면 평생 '방음벽 없는 방'에서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 조금이라도 나를 덜 아프게 만들기 위해 먼저 너를 버리는 다정한 서툰 방어기제를 손에 쥐고. 오늘도 여전히 나는 사랑을 갈구하다 결국엔 먼저 도망가려는 나의 다정함이 안쓰럽다.
사랑받고 싶은 사람의 자기방어. 그것은 ‘너를 먼저 버리는 다정함’이다.
「주피의 음악편지」
'장들레 - 모르겠어요'
에세이의 여운과 함께 들어보세요♪
(TBS 주용진 라디오PD와 매주 함께 연재중)
저는 인간에게 달팽이처럼 촉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보이지 않는 촉수. 이게 밖을 향해 있는 사람, 나에게 향해 있는 사람 등 다양한 형태가 사람별로 존재하고요. 저는 촉수가 밖으로 향해 있는 사람입니다. 윤슬님처럼요.
수영장 다닐 때 수업이 끝나면 키판 청소를 하는데 제 차례가 아님에도 자꾸 제 신경은 키판 청소하는 분들에게로 향해서 결국 어느새 그걸 돕고 있었고, 식사 자리에서도 휴지가 필요해 보이는 사람을 바로 알아차려 먼저 휴지를 건네는 등...어찌 보면 세심하고 배려 많은 사람이지만 달리 보면 나를 모르는 체하고 타인에게만 반응하는 그런 사람이죠.
방송국에서 일하면서 이런 제 특성은 처음에는 큰 장점이 되어주었습니다. AD일 때 PD의 표정 변화에도 예민하게 반응하고, 행동 패턴을 읽고, 필요할 걸 미리미리 준비하는. 완벽한 AD였습니다.
하지만 촉수는 내 에너지만 쓰며 남의 시선만 탐할 뿐 나를 안아주지는 못했습니다. 제 에너지만을 고갈시켰죠. 그 상태 또한 알아채지 못하고요.
부모님이 주신 좋은 체력을 원천 삼아 삶을 살아왔지만 결국 충전을 안 하는 배터리의 운명은 방전이듯, 제 몸과 마음은 속 빈 강정처럼 변해갔습니다.
결국 상담과 치료를 통해 촉수를 나에게 돌리는 작업을 수년째하고 있습니다. 물론 수십 년을 살아온 몸과 마음은 말을 잘 안 듣지만요. 그래도 조금 더 나를 챙기고 나를 알아주기 위해 노력 중입니다.
나를 위한 사랑과 타인을 위한 사랑
나에 대한 관심과 타인에 대한 관심
나를 향한 시선과 세상을 향한 시선
그 경계를 조화롭게 지정하는 게 나를 살리며 남도 살릴 수 있는 그 경계. 물론 내 상태에 따라 그 접점은 달라지겠지만요.
오늘도 걸어봅니다. 나를 살리며, 남을 챙기며, 결국 이 교묘한 균형이 결국 사랑이 아닐까요?
오늘은 장들레님의 노래를 나눕니다.
사랑이 무엇인지, 진심은 무엇인지 묻는.
여전히 좋은 어른을 꿈꾸며, 따뜻한 사람이 되고 싶은데 그 길을 몰라 엄마에게 물어봅니다.
장들레님의 솔직한 톤과 목소리가 나를 안아줍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PMybeZLRzu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