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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유리 Mar 11. 2018

먹는 물: 역시 한국이 금수강산

2017년 9월 18일

빌뉴스 공항 근처 이케아에서 바퀴 달린 장바구니를 구입했던 가장 큰 이유는 바로 물이었다. '돌돌이'라 이름 붙인 바퀴 장바구니는 거의 일 년 가까이 마트에서 생수를 잔뜩 사서 나르는 물동이 역할을 든든히 해주었다. 첫 1년 내내 아크로폴리스 1층의 대형마트 막시마(Maxima)에서 1주일에 한번 꼴로 2리터짜리 생수를 7-8개씩 사서 돌돌이에 실어 날랐다. 그 후에는 그나마도 너무 노동이라는 생각에 브리타(Brita) 정수필터를 썼다. 필터가 생각보다 맘에 드는 물맛을 만들어주어서 생수를 사 나르는 수고를 하지 않게 되었다. 

카우나스의 두물머리 공원은 바로 물가에 접해 있다. 계절마다 다른 강의 수위에 따라 풀밭 면적이 크게 달라진다.

석회질이 많은 물은 유럽 어디나 공통적이고 한국인들에게는 식수로 먹기 꺼려진다. 왠지 더러운 물처럼 느껴지지만, 이곳 사람들은 그냥 마시는 경우도 많다. 석회질을 제외하고는 따로 유해한 성분이 없기에, 리투아니아 사람들은 수질에 대한 자부심을 드러내기도 한다. 산이 없이 평평해서 유속이 느린 탓인지 리투아니아의 수돗물도 석회질은 꽤 심하다. 비가 많이 오고 강과 호수가 많아 수자원은 풍부한 편이지만 그게 다 석회질 물이다. 처음 방에서 숙식을 시작했을 때 싱크대가 너무 허옇게 얼룩져 있어서 이게 원래 색깔인가 싶을 정도였는데, 언젠가 박박 닦아 보고는 한국의 싱크대처럼 윤기 나는 표면이 드러나는 걸 보고 놀랐었다. 전기 물끓이기나 냄비도 수돗물을 그대로 끓이면 이내 꽤 두껍게 석회가 엉겨 붙는다. 


결국 냄비에 라면을 끓이거나 쌀을 씻더라도 생수를 사서 쓰게끔 되었다. 평소에도 의식적으로 물을 많이 마시려고 노력하는 편이라 그냥 마시는 물도 하루에 1.5리터 이상 필요했다. 생수 한두 병만 사도 무게가 만만치 않은 장바구니는 일종의 훈련이 되었다. 돌돌이가 없던 첫 한 달 간은 거의 매일같이 마트에 들러서 2리터짜리 물을 한두 개씩 사 와야 했는데, 인디언 서머가 꽤나 길었던 작년 9월에는 이게 상당히 땀나는 노동이었다. 돌돌이가 생긴 후로는 일주일에 한 번씩 물을 8~9개씩 집어넣고 혹시 바퀴가 부서지지 않을까 염려하며 끌어 날랐다. 바퀴의 위대함을 새삼 실감하며 겨울에도 눈이 오지 않는 날을 골라 물 긷기 원정을 다녔다. 

소련 시절에 건설한 댐으로 수위를 조절하지만, 늦겨울과 초봄이면 수량이 늘어나서 나무들이 잠겨 거대한 주산지를 방불한다.

한국에서 교환학생을 온 학생들과 이야기를 하다가, 상당수가 생수 사 먹기 너무 무거워서 브리타로 해결을 했음을 알게 되었다. 예전 미국 교환학생을 갔을 때 브리타를 사용한 적이 있었고 교민들 집에서도 간혹 봤지만, 그것보다 생수가 낫지 않을까 싶어서 고집스럽게 물을 사서 날랐었다. 한데 한 학생이 자기가 다 비교를 해봤다며, 냄비에 끓였을 때 허연 자국이 가장 안 생기는 방법이 브리타 정수 물이라는 것이었다. 생수도 약간의 석회 성분은 남아있어서 자국이 좀 생긴다는 이야기였다. 계산을 해보니 비용으로도 브리타 정수필터를 쓰는 게 나아 보였다. 

독일처럼 여기도 맥주가 물보다 흔해 보인다. 마트에는 유럽 전역과 CIS 지역의 모든 술이 모여드는 듯하다.

그래도 왠지 모를 생수에 대한 신뢰를 고집하며 1년은 꼬박 물 긷기를 했다. 그러나 1년이 지난 여름의 어느 날, 물을 싣고 돌돌이를 끌기에는 햇살이 너무 강하고, 체류연장을 확정 짓고서 1년 이상을 더 실어 나를 생각을 하니 막막해져서 드디어 브리타 주전자와 필터 세트를 구입했다. 걸러서 먹어보고 끓여보니 과연 그 학생 말대로 생수보다 낫다. 냄비나 전기 물끓이기에도 거의 자국이 남지 않았다. 정기적으로 식초물을 끓여 석회를 제거해야 하는 수고가 줄어들었다. 줄어가는 생수통을 보면서 물 사러 갈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니 맘도 편해졌다. 그 후로는 생수는 혹시 모를 비상시를 위해 한 개만 사서 구석에 쟁여두고 브리타로 열심히 걸러 먹었다. 


돌돌이 장바구니는 어느새 신발장에 방치된 채 빛을 못 보게 되었다. 물을 사지 않는 장보기는 간단히 봉지만 있어도 해결되는 가벼운 발걸음이 되었기 때문이다. 사실 한국에서도 생수를 사 먹는 사람도 많고, 우리 집도 수돗물을 바로 먹는 집은 아니었다. 정수기를 쓰면서 정기적으로 필터 점검을 받는 방식을 선택했었다. 그래도 요리에 끓이는 물은 수돗물을 직접 쓰는 데 아무 거리낌이 없었다. 석회질 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냥 씻어 말려도 그릇에 자국이 거의 남지 않는 한국의 수돗물이 얼마나 대단한지 유럽에 와서 더욱 실감한다. 석회질 때문인지 몰라도 괜히 샤워 후 머릿결이 더 안 좋아지는 것만 같다. 수돗물을 쓸 때마다 한국이 진정 '금수'강산이라는 생각을 한다. 그 물에도 만족을 못해서 연수기를 쓰는 경우도 많다. 그야말로 한국 사람들은 물에 있어서는 럭셔리한 삶을 살고 있다.

'물놀이' 하면 바다보다 호수를 떠올리는 리투아니아. 석회질만 빼면 수량도 많고 깨끗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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