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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유리 Mar 11. 2018

동양인 여자의 겉보기 나이

2017년 9월 22일

리투아니아에 온 지 한 달 남짓, 한창 쾌적한 가을 날씨가 이어지던 어느 날 피트니스에서 운동을 하다가 웬 남학생의 데이트 신청을 받았다. 아무리 많게 봐도 내 나이의 절반 조금 넘을 것 같은 학생이었다. 피트니스에서 상대적으로 작고 왜소한 나는 위축되지 않으려고 열심히 움직이고 있었다. 화장기도 없이 운동복을 입고 있었으니 나이를 가늠하기 더 어려웠을 것이다. 나도 리투아니아 사람들의 나이는 지금까지도 예측이 안되니 할 말은 없다. 이 과감한 학생을 어찌할까 하다가, 한국에 교환학생도 다녀왔다고 소개를 하기에 아마 한국에 관심이 있어서 그런 거겠거니 하며 저녁때 한번 보기로 했다. 

대학이 몰려있는 카우나스 도심은 젊은 층이 많은 편이다. 

객원교수로 부임해서 겨우 적응을 하고 생활리듬을 안정시켜가는 중이었다. 관청이나 상점, 식당 등등 리투아니아 사람들과 소통하는 과정에서 동양인 여자라서 겪는 경험의 패턴이 포착되었다. 어리고 약해 보이는 겉모습으로 인한 것이다. 계속 만나는 사람들과는 금방 사라지는 문제들이지만, 잠깐 스치는 경우에는 이런 겉모습으로 인한 장단점이 명확했다. 어리고 약해 보이기 때문에 때로는 과도한 친절로 이득(?)이 되기도 하고 예상 밖의 무시나 놀림으로 짜증이 날 때도 있다. 


동양인 여자들이 겪는 이런 현상은 꼭 리투아니아라서가 아니라 동아시아 밖의 모든 나라에서 비슷하다. 문화권에 따라 다르겠으나 영미권이나 유럽에서는 무조건 나이보다 훨씬 어리게 보고, 왜소하니 약하게 보고, 어린아이 챙기듯 친절하게 대하거나 가르치려 들거나 무시하는 경우를 경험한다. 아시아계 인구가 많은 대도시에서는 많이 나아졌지만, 리투아니아처럼 아시아 인구가 적고 게다가 카우나스처럼 거의 없는 경우에는 옛날 이민 1세대가 경험했을 법한 '다름'에 대한 반응들이 느껴진다. 영어만 할 줄 아는 외부인에 대한 경계심이 겹쳐 그 특별대우 또는 차별대우가 조금 더 증폭된다. 

자유로를 다니다 보면 호기심 어린 인사들을 받을 때가 있다.

관청에 드나들 때나 우체국에서 소포를 찾을 때 안내판도 못 읽고 어리바리할 때는 어려 보이는 덕을 보기도 한다. 어디로 갈지, 무슨 버튼을 누를지 몰라 잠시 서 있으면 누군가 나타나 서툰 영어든 리투아니아어든 손짓 발짓을 해가며 도와주거나 해결할 수 있는 사람에게 데려다주었다. 최대한 간단한 영어로 용건을 이야기하며 잠깐 웃고 있으면 자기들끼리 상의해서 어떻게든 해결을 해준다. 이민국에서 비자 비용 처리를 실수했을 때도 내가 리투아니아어 서류를 읽지도 못하고 그저 웃고 있는 사이에 자기들끼리 열심히 의논하더니 어찌어찌 환불처리를 해 주었다. 우체국에서 소포 '받는 곳'이 아니라 '보내는 곳'에 줄을 서 있었을 때도 뭔가 자기들끼리 상의하더니 손짓으로 '다음에는 이렇게 하라'라고 안내하며 소포를 내주었다. 한국보다 훨씬 느리고 관료적이고 비효율적이어서 인내심을 요하지만, 비교적 수월하게 해 주려는 노력을 보여주었으니 이런 점은 덕을 보는 부분으로 칠 수 있다.

'1988'년도가 표시된 소련 시절 다리. 지금은 데이트하는 젊은이들도 많이 오간다. 

이 20대 초반 남학생의 데이트 신청은 결과적으로 짜증 나는 경험이 되었다. 혹시나 내 나이를 알고 놀랄까 봐 미리 페이스북 연결을 승인해 주고, 계정에 나이를 공개해 놓았다. 한국에 교환학생도 다녀왔다고 했으니 한국 문화도 좀 알기를 바랐다. 최대한 이해심 넘치게 대해주려고 맘을 먹었으나, 결국 짜증이 앞서고 말았다. 인사도 제대로 하기 전에 '나는 너 같은 작고 귀여운 한국 여자아이들이 너무 좋아' 류의 언급이 나오는, 아시아 여자에 대한 근거 없는 자신감이 흘러넘치는 전형적인 태도가 드러난 탓이다. 한국에서의 교환학생 경험은 대부분 작고 귀여운 한국 여성들과의 즐거운 파티였던 것이다. 농구 강국답게 키가 190센티 넘게 크고 마른 체구에 영어도 잘하니 서울 도심의 클럽에서 꽤 인기가 있었을 것이다. 부득이 나이와 교수 신분을 열심히 강조해가며, 마침 박사과정 학생이었음을 꼬투리 잡아 논문 주제는 뭐냐, 공부는 어떻게 하고 있냐 등등 학업 상담으로 대화를 몰고 간 뒤 최대한 빨리 만남을 끝내고 혼자 밥 먹으러 갔다. 

날씨 좋을 때면 벤치나 계단에서 시간을 보내는 학생들이 많이 보인다.

한 가지 수확은 젊은이들이 데이트를 하는 방식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보통 데이트라고 하면 밥을 같이 먹는다. 하다못해 소개팅으로 처음 만나도 대부분 밥을 먹거나 최소한 다과라도 한다. 여기는 처음 만나는 경우 커피를 마시는 경우도 있지만 진짜 말 그대로 만나서 잠깐 걷거나 어디 앉아서 이야기를 하는 게 일차적인 패턴인 모양이었다. 경제적으로 한국보다 풍족하지 않은 이유도 있을 것이다. 밥을 먹는 게 필수가 아님은 확실했다. 특히 저녁 식사는 파티처럼 특별한 경우가 아닌 한 각자 해결하고, 만나서는 간단히 차나 술을 하는 거였다. 


내가 구세대이고 보수적이어서 소위 '요즘 젊은 학생들' 같은 '쿨함'을 발휘하지 못한 것일 수도 있지만, 기분 나쁜 것은 나쁜 것이다. 문화적 차이는 한쪽에서 일방적으로 이해해야 하는 게 아니다. 자기 동네에서라도 외국인을 처음 만난다면 그쪽의 문화적인 배경도 고려해야 한다. 워낙 작은 동네고 거기가 거기라서 이 학생도 그 후에 몇 번을 마주쳤다. 첫인상이란 참 강력한 것이어서 미안하게도 경계심을 높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 후로는 피트니스에서 말을 걸 듯한 남자들의 눈치가 보이면 일부러 더 열심히 운동을 하게 되었다. 

빌뉴스 구시가 서쪽 게디미나스 대로 주변의 한 카페골목. 빌뉴스는 비교적 다국적, 다인종이라 호기심은 덜한 편이다. 

어려 보이는 동양인 여자여서 주목을 끌 때마다 농담처럼 고맙다며 넘길 수도 있다. 하지만 과도한 친절도 상황에 따라 짜증으로 귀결된다. 옆 방에 사는 일본어 강사 카야코가 어느 날 페이스북에 분노에 가득한 포스팅을 올렸다. "나는 어려 보인다는 말이 기분 좋게 들리지 않는다고! 그걸 칭찬하듯이 굳이 말해주지 않으면 좋겠어!" 카야코는 내가 보기에도 정말 어려 보이는 일본 여성이다. 나보다 훨씬 작은 체구에 화장도 하지 않고 캐주얼하게 입고 다녀서, 처음에는 학부생인 줄 알았다. 모두가 너는 정말 어려 보인다는 말을 했을 것이다. 나도 처음 보는 사람들마다 대학생, 많이 쳐줘서 대학원생인 줄 알고 대화를 걸고는 교수라고 하면 깜짝 놀라는 반응에 지쳐 있던 때라 깊이 공감했다. 설령 어려 보인다고 해도 굳이 그걸 말해줄 필요는 없다. 실제로 어리다고 해도 처음 보는 사람이라면 충분히 존중을 표시하는 게 맞다. 그게 반드시 아시아의 예절만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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