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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유리 Mar 17. 2018

공연 문화는 생활의 일부

2017년 10월 23일

카우나스 중심가 자유로를 따라 걷다가 모두의 만남의 장소인 중앙 분수대를 지나면 금방 연극을 하는 극장이 나온다. 길가에 면해 있어서 자주 바뀌는 연극 공연 일정과 광고가 늘 보인다. 리투아니아어 연극은 엄두조차 나지 않아 들어가 본 적은 없다. 카우나스 소속 극단과 외부 극단들, 아마추어 공연까지 사시사철 공연이 있고 관객이 꾸준히 드나든다. 조금 더 가면 비타우타스 대공 동상과 로마스 칼란타 기념물이 있는 작은 공원 뒤로 꽤 오래된 음악극장이 보인다. 지금은 뮤지컬 극장이라 불리는데, 19세기 말 완공 이래 연극, 발레, 오페라 등 다양한 공연을 해 왔다. 옆에는 인형극장도 따로 있다. 조금 더 걷다가 북쪽으로 꺾어 잠시 올라가면 오케스트라 공연 전용 필하모닉이 있다. 카우나스 시립오케스트라의 거점이고 유럽 전역에서 많은 연주자들이 와서 공연을 한다. 학생들과 아마추어 단체 공연도 많이 한다.

음악극장은 자유로 중앙 광장 겸 공원 안쪽으로 자리하고 있다. 그 앞은 아이들 놀이터다.

인구 20만 남짓의 작은 도시이지만 오페라, 뮤지컬, 발레, 오케스트라, 연극, 인형극까지 다양한 공연이 연중 내내 있다. 공연장 규모가 크지 않아서 어디에 앉아도 무대가 별로 멀지 않다. 몇몇 뮤지컬이나 발레 공연 표가 매진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공연 당일 시작 시간 전에 가서 표를 사도 된다. 가격도 크게 부담스럽지 않다. 공연 관람에 취미가 있다면 언제라도 부담 없이 공연을 골라 볼 수 있다. 각 성당에서도 합창이나 오케스트라 위주로 공연이 많이 열린다. 성당 공연들은 기부를 전제로 하겠지만 대부분 무료다. 중요한 시즌에는 전문 연주팀의 공연도 있지만 아마추어 팀들의 합창, 중창, 악기 연주가 자주 열리고 각급 학교 학생들의 발표회도 많다. 지인이 공연을 하면 대부분 꽃을 선물하는지라 공연 때마다 꽃을 든 사람들이 줄지어 들어간다. 재즈 공연을 하는 라이브 바나 시설을 갖춘 식당도 많아서 저녁마다 취향에 따라 즐기러 다닌다. 여름에는 몇 주 동안 음악축제가, 가을에는 댄스 페스티벌, 봄에는 영화제가 열린다. 날씨가 좋은 날이면 거리 공연도 계속된다.

주교좌성당의 만성절 전야 공연은 시립합창단과 오케스트라였다. 성당마다 아마추어 중창팀이나 합창 공연도 많이 열린다.

매일 걷는 거리 이곳저곳에 작은 공연장이 있고 공연을 가까이 즐기는 문화가 갖추어져 있다. 한국도 크고 작은 공연장이 늘어나고 라이브 바와 클럽도 다양해져서 공연문화를 즐기는 인구도 증가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 비용 부담도 크고 공연문화가 일상에 밀착되어 있다는 느낌은 잘 들지 않는다. 클래식 음악처럼 전용 공연장에서 열리는 공연은 여전히 진입장벽이 높은 편이다. 카우나스는 작은 도시이니 공연장도 작고 현란한 무대 장치나 세계 최고 수준의 연주를 즐길 수는 없다. 그렇지만 이런 작은 도시에도 공연장이 종류별로 갖추어져 있고 공연이 끊이지 않으며 관객이 꾸준하다는 점은 부러웠다. 유럽의 문화적 저력은 이런 작은 도시에 자리 잡은 일상적인 문화생활에서 비롯된다. 근대 이전부터 소규모라도 다양한 문화생활이 일상의 일부로 정착되어 있었다.

카우나스 필하모닉 공연장

부모님이 서양 고전음악을 좋아하셔서, 방문하신 동안 이곳의 오페라와 관현악, 성당에서 열리는 합창 공연까지 가능한 대로 다녀보았다. 한국에서 오페라나 관현악 공연을 보려면 미리 예매하고 혹시 할인받을 방법이 있나 열심히 알아보았을 것이다. 이곳 필하모닉 홀의 관현악 공연은 낮에 지나가다 들러서 오늘 공연을 확인하고 당일 표를 바로 샀다. '프랑스 작곡가의 밤'이라고 제목을 붙이고 프랑스에서 온 지휘자가 카우나스 오케스트라와 함께 현대 프랑스 음악을 연주하는 관현악 공연이었다. 흥행성이 없어 보였고 역시나 자리가 꽤 비어 있기는 했지만, 한 사람 당 12유로(약 1만 5천 원) 내고 적당히 좋은 자리에서 즐기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홀은 2층 객석이 무대를 둘러싼 아담한 크기다. 중간 휴식 때 나와 보면 연주자와 섞이기도 한다. 화려한 장식 없이 따뜻한 조명, 로비 벽에 예전 공연이나 연주자들 사진이 붙어있는 어떤 저택 같은 분위기다.

음악극장 무대와 내부

며칠 후에는 음악극장에서 오페라 '세빌리아의 이발사' 공연을 보았다. 이번에는 사흘 정도 전에 들러서 예매를 했다. 동네 극장이지만 100년 넘은 옛날 전용극장이라 객석이 발코니로 구별되어 있다. 정면에서 살짝 오른쪽 2층 발코니를 선택하니 한 사람당 20유로였다. 인기 뮤지컬 공연을 할 때는 제일 좋은 좌석이 50유로를 넘기도 한다. 그래도 환산해보면 고마운 가격이다. 최첨단 시설을 갖춘 대형 극장 같은 무대 효과는 없지만, 공연 경험이 많다 보니 모든 공간을 알차게 쓰면서 옛 세트를 다시 활용하는 요령도 보였다. 함정이라면 한국이 대부분 오페라를 원어로 하는 것과 달리 리투아니아어로 한다는 점이었다. 생각해 보면 너무나 당연한데, 한국처럼 가사를 자막으로 보거나 팸플릿에 가사가 나오는 것도 아닌 리투아니아어 이탈리아 오페라는 좀 당황스러웠다. 이탈리아어나 리투아니아어나 못 알아듣기는 마찬가지다. 왠지 더 일상에 가까운 친근한 공연으로 느껴졌다.

국경일이나 큰 장터가 설 때면 여러 팀이 오르는 야외무대가 선다.

가수들의 성량이나 수준이 유럽의 대도시에서 활약하는 유명한 가수들과 같을 수는 없다. 그래도 동네 극장에서 부담 없이 즐기는 오페라는 일상의 좋은 활력소가 된다. 가벼운 옷차림도 많지만 심심치 않게 드레스나 턱시도를 차려 입고 즐기는 관객들의 모습도 좋아 보였다. 유럽의 변방이고 개도국인 리투아니아의, 수도도 아닌 카우나스에서 이렇게 각종 공연을 즐기는 일상은 놀라웠다. 리투아니아 사람들의 문화적 소양이 유난히 높은 것인지, 유럽의 전반적인 생활방식이 이런 것인 지 궁금하기도 했다. 아마 후자에 가까울 것이다. 설령 한국에서 공연 가격이 매우 저렴해지고 소규모 공연이 길거리마다 매일 열린다고 해도, 평소 여유로운 시간과 즐기는 습관을 갖추지 못한다면 지속되기 어려운 것이 공연문화이다.

여름에 열리는 음악축제는 평소 한적한 모습은 간데없이 성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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