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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유리 Apr 26. 2018

한식만 빼고 다 있는 카우나스

2018년 2월 3일

한국식품점은커녕 한식당도 하나 없는 카우나스에서 한식이 그리워지면 대책이 없다. 스스로 한식 없이도 꽤 오래 버티는 사람이라고 자부해 왔지만, 어쩌다 빌뉴스의 강 선교사님 댁에서 한식을 만나면 정신없이 먹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방학마다 한국에서 싸온 반찬과 먹거리들은 몇 달 동안 찬장에서 심리적인 보약 같은 존재가 된다. 요리에 도무지 취미도 능력도 없기에 인스턴트의 비중이 엄청나다는 단점이 있지만, 찬장 가득 채운 라면을 보면서 마음이 풍요로워지고 힘이 난다면 보약이 별거겠는가 싶다. 요새 한국에는 나처럼 요리와는 상관없이 살면서도 맛있게 먹고 싶다는 싱글족들이 늘어나고 있다. 덕분에 라면 말고도 간편한 인스턴트식품이 눈부시게 발전해서 여간 다행스럽지 않다. 심지어 건강해 보이는 인스턴트들도 많다. 

봄맞이 선물처럼 서울에서 날아온 일용할 양식의 일부

방학마다 한국에 나가서 먹거리를 잔뜩 챙겨 오지만, 죽어도 요리는 안 하는 딸이 제대로 안 챙겨 먹을 게 분명하다고 믿는 엄마로부터 몇 번 한국으로부터 먹거리 소포를 받기도 했다. 아무리 부치지 마시라고 해도 소용없이 날아온다. 필요 없다고 해놓고서도 도착했으니 우체국에 와서 찾아가라는 문자가 오면 또 선물 보따리 받는 기분으로 달려가게 된다. 간혹 폴란드 바르샤바에 다녀올 때 한인 마켓에서 사 올 수도 있고 정 필요하면 독일에서 인터넷으로 사는 방법도 있으나, 엄마가 챙겨 보내주시는 오리지널(?) 한국산 간식거리가 제일 좋긴 좋다. 자유로 중앙에 있는 우체국에서 소포를 받아 오는 일은 노동이지만 비싼 배송비가 덧입혀져 그런지 과자도 라면도 더 맛있다. 

빌뉴스에는 극소수지만 한국 식품을 파는 곳들이 있다. 사진은 세종학당이 있는 로메리스 대학(MRU)의 매점을 점령한 한국 라면, 과자, 음료수들

아무리 한국식품점이 없다고 해도, 사실 요리를 하는 인간이라면 어떻게든 해 먹을 수는 있다. 똑같지 않더라도 비슷한 재료는 있게 마련이고, 아시아 음식이 유행하면서 진짜 아시아 식재료도 팔기는 한다. 막시마 마트에도 아시아 코너가 있고, 일찍부터 유행해서 건강한 간편식으로 자리 잡은 초밥을 만들 수 있도록 일본 쌀부터 김, 생강절임도 있다. 중국식 굴소스, 태국식 칠리소스 등 각종 소스류 사이에는 어느새 한국의 쌈장과 초고추장도 들어왔다. 물론 소량만 직수입하기 때문에 다른 유럽 식재료에 비해 훨씬 비싸다. 한국에서 파는 같은 재료값을 생각하면 쉽게 손이 가지 않는다. 물론 요리를 하지 않는다는 게 식재료에 손이 안 가는 가장 큰 이유다. 왜 한국 라면은 아직 안 들어오는지 모르겠다며 그냥 지나친다. 해외 생활을 하면 요리사가 된다는 말은 내게는 해당이 안 되는 것으로 결론 났다. 옆방의 일본어 강사 카야코에게 슬쩍 물어봤는데 그녀도 식재료에는 손댄 적이 없는, 요리 없는 세상에 사는 여자였다. 반면 교환학생들 중에 의외로 남학생들이 요리사로 거듭나는 경우가 많아서, 기숙사 공용 부엌에서 한국 학생들이 매일 다 같이 식사를 만들어 먹는다는 경이로운 이야기가 들리곤 한다. 

대형 슈퍼마켓 막시마의 아시아 식재료 코너에 등장한 쌈장과 초고추장 / 작년 겨울에 교환학생들이 대접해 줬던 대단했던 저녁상

가정을 이루고 사는 극소수 아시아 동료들 중에는 요리를 하는 경우도 물론 있다. 리투아니아와는 관계없지만 음력설을 지날 때 중국어 강사 자넷(링링)이 집으로 초대해 주었다. 덕분에 중국 남방 하카인의 설음식을 경험했다. 자넷은 리투아니아 바둑선수 출신 남편과 결혼하여 아들 둘을 둔 엄마다. 하카 음식이라고 했을 때 중국 민족 구성에 대한 지식이 부족해서 얼핏 이해하지 못했는데, 주로 남방에 거주하는 한족의 일파이나 독특한 문화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하카 음식은 내가 알고 있던 중국 음식과 확실히 달랐고 맛이 훨씬 깔끔했다. 자넷은 리투아니아어도 꽤 잘하고, 리투아니아 국적 취득을 위한 시험공부를 하고 있다고 한다. 국적 취득 시험은 어디나 어렵지만 리투아니아도 만만치 않다며 이미 한 번 떨어졌다고 한탄을 했다. 이날 링링 집에 모인 손님들은 동아시아 각국을 망라했다. 중국어 선생님과 쿵후 선생님도 있어서 중국이 많기는 했지만 일본인 카야코, 대만인 교환학생도 있었다. 한국, 중국, 일본, 대만을 아울러 설 파티를 했다. 리투아니아인 남편까지 그 모든 비영어권 사람들이 영어로 대화를 하는 중에 자넷의 두 아들은 리투아니아어, 영어, 중국어를 섞어가며 장난을 쳤다. 

음력설을 지내러 자넷(링링)의 집에 초대받아 함께 했던 중국 하카음식과 여러가지. 내가 가져간 한국 강정도 디저트. 대나무잎으로 포장한 말린 차를 선물받았다.

카우나스에 중국 식당은 생각보다 많다. 구시가지 북쪽으로 한때 중국인들이 많이 유입되어 차이나타운을 만들려는 움직임이 있었다고 한다. 지금도 판다나 용 그림이 있는 붉은 간판에 홍등을 단 작은 중국 음식점이 골목마다 한 군데 꼴로 보인다. 손님이 많은 경우가 별로 없어 유지가 되는지 궁금할 때도 있다. 차이나타운 형성은 잘 안 되고 음식점만 몇 군데 남았다고 한다. 그중 구시가지 광장 근처에 페키나스(Pekinas) 라는 중국 식당이 있었다. '북경'이라는 뜻으로, 입구의 홍등, 벽에 걸린 한문 족자, 커다란 청나라 분위기의 꽃병과 대체로 붉은 실내장식을 보면 딱 중국집이다. 하지만 메뉴에는 초밥이라 부르는 롤도 많고 리투아니아 맥주에 어울리는 감자요리나 빵 튀김도 판다. 음악이나 직원들 복장은 맥주홀이다. 처음 가서 주문을 막 넣었을 때 난데없이 싸이의 '강남스타일'이 우렁차게 들려왔다. 우연일 수도 있고 한국 사람인 줄 알아보고 틀었을 수도 있는데, 어느 쪽이든 귀엽기 그지없다. 페키나스는 대표적인 중국음식점으로 자리 잡고 있다. 별 기대 없이 궈바오를 시켰는데 생각보다 맛있고 리투아니아 맥주와 잘 어울렸다. 동네 중국집의 향수를 상기시키는 맛이었다. 

구시가 광장 진입 전에 만나는 페키나스 중국식당

페키나스 근처에는 아시안 라운지(Asian Lounge)라고 붙인, 어둡고 좀 고급스러운 분위기의 바가 있다. 식당이라기보다는 술을 위주로 팔면서 안주로 아시아 음식을 하고 있는데, 초밥(롤)이 많고 튀김 류가 좀 더 있는 와중에 고추장을 바른 군만두가 있어서 주문을 해 보았다. 촛불 장식에 옛날 영화를 비추는 스크린까지, 메뉴 말고는 아시아 분위기는 아니고 가격도 싸지 않다. 하지만 고추장을 바르고 파를 얹은 군만두는 의외로 꽤 맛있었다. 그 외에도 중국 요리를 하는 식당은 구시가와 자유로 주변에 종종 눈에 띈다. 아시아 한 국가의 음식만 전문으로 하기보다는 대부분 초밥(롤)을 하면서 따뜻한 요리로 중국식을 많이 하고, 수프 메뉴에 한중일이 모두 보이기도 하고, 샐러드로 김치를 파는 경우도 꽤 있다. 퓨전의 성격이 강하고 모던한 집일수록 가게 주인이나 요리사도 아시아 사람이 아니라 리투아니아 사람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미 아시아 음식이 유명해진 지 꽤 되었기에, 굳이 아시아계 사람이 아니더라도 식당 운영을 못할 이유가 없다. 리투아니아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영업이니 입맛에 맞추어 요리를 바꾸는 것도 현지인들이 더 용이하다. 

퓨전 아시안 음식들. 군만두 고추장구이, 김치맛 볶음면, 오른쪽은 아크로폴리스에 있는 중국집 Kinu Roze의 찹쌀탕수육

얼마 전에는 자유로 중간 즈음에 진짜 일본 아저씨가 하는 일식집 '가마쿠라(Kamakura)'가 생겼다. 일본에서 회사 은퇴 후 리투아니아 여인을 만나 옮겨 오셨다는 주인아저씨는 일본인 중 보기 드물게 한국에 대해 엄청난 과거 참회의 심정을 피력하는 분이었다. 식당은 정통 일식집은 아니고, 가격과 메뉴를 모두 리투아니아 학생들이 부담 없이 먹을만한 4~5유로에 맞추어 이곳에서 구할 수 있는 식재료만 사용한 간단한 식사류다. 덮밥, 라멘, 오므라이스, 돈가스 등이 있지만 일본이나 한국에서 먹는 맛과는 당연히 큰 차이가 있다. 그래도 일본인 주인이 하시는지라 한국 교환학생들 사이에서 서울에서 먹던 일식 라멘과 가장 근접한 집으로 알려졌고 학생들이 꽤 많이 드나든다. 일식집은 다양한 형태로 상당히 많다. '스시 익스프레스(Sushi Express)'같이 초밥 롤을 위주로 하는 체인점도 분식집처럼 곳곳에 있고, 초밥 롤은 일부 피자집에서도 팔 정도로 보편적인 메뉴가 되었다. 

자유로 가마쿠라(Kamakura)의 오므라이스 / 카우나스 외곽 메가(MEGA)몰 내 마나미(Manami)의 초밥롤

새로운 것을 찾는 사람들의 입맛을 적극 반영해서 다국적 식당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중국과 일본, 태국을 위시한 동남아시아, 인도 음식은 이제 누구나 알고 즐기는 식사메뉴로 자리를 잡았다. 조지아, 아르메니아, 레바논 같은 서남아시아 음식은 나 같은 동아시아 사람에게는 신기하지만 이곳 사람들에게는 오래전부터 알려진 것들이다. 한식의 세계화도 상당히 진척이 되었고 한류의 영향도 꽤 있는데 여기서 아직 한식이 전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많이 아쉽다. 초밥이나 중국요리를 내세운 아시아 음식점에 간혹 한국식에 가까운 메뉴가 한두 개 포함되는 정도다. 나뿐 아니라 한식을 먹어본 적 있는 다른 외국인들과 많은 리투아니아 사람들도 왜 한국 음식은 안 생기는지 궁금해하고, 혹시 직접 해볼 생각은 없느냐는 농담을 사뭇 진지하게 던진다. 아직 심히 아쉬운 수준이지만, 지금처럼 한류 열풍이 지속되고 아시아 전반의 음식에 대한 관심과 선호가 확대되면 언젠가 한식당도 생기고, 공용이든 단독이든 한국식품을 취급하는 상점도 생기리라 기대해 본다. 

아시아 주간 (Asian Week) 음식 행사 때 선보였던 한국음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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