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1월 1일
'모든 성자의 날 (All Saints' Day)'이라 직역할 수 있는 만성절은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에서 공휴일이다. 성탄절을 제외하면 하반기에 공휴일이 이 날 뿐이다. 도심의 관광객 대상 숍이나 미국식 쇼핑몰 말고는 대부분의 상점이 문을 닫아 거리는 평소보다 훨씬 조용했다. 한국에서 번화한 거리가 휴일에 더 붐비는 것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연말의 성탄절은 그야말로 가족 위주의 명절이라 온 도시가 쥐 죽은 듯 고요하다고 한다. 만성절 하루 전인 10월 31일은 미국 핼러윈 영향이 있어서 아이들과 학생들이 분장하고 돌아다니는 모습도 눈에 띄었다. 대부분 리투아니아와 폴란드 사람들에게 핼러윈은 일부 젊은 층이 즐기는 미국식 장난일 뿐이다. 대다수에게 만성절 전야는 죽은 자들을 기리는 밤이다. 변장 파티보다는 가족끼리 경건하게 보내는 게 어울리는 분위기다.
2016년 만성절 전야에 구시가지의 ‘성 베드로와 바울 성당’에서 레퀴엠 공연이 있었다. 죽은 자들을 기리는 밤에 걸맞게 장송곡을 연주한 콘서트였다. 카우나스 시립 오케스트라와 합창단이 나오는 연주여서 부모님과 함께 거리 구경삼아 여유롭게 갔었다. 의외로 사람이 꽉 차서 서서 들었다. 리투아니아 현대 작곡가인 Ceslovas Sasnauskas의 레퀴엠을 했다. 생소했지만 성당의 느낌과 잘 맞는 짧은 공연이었다. 2017년에는 모차르트의 레퀴엠을 연주했다고 한다. 누군가는 코스튬 파티를 하고 있는 핼러윈 저녁에 한편에서는 성당이 꽉 차도록 모여서 미사를 드리고 레퀴엠 공연을 하는 모습이 대조적이었다.
만성절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비롯한 '모든 순교자들'을 기념하여 7세기의 교황이었던 보니파스 4세가 헌정한 날이라고 한다. 독실한 가톨릭 국가들이 지키는데, "All Hallows"라고도 불린다. 그 전날이 핼러윈이 되었다. 모든 성인의 날은 모든 죽은 자의 날로 확대되었고, 공동묘지나 추모비에 촛불과 꽃을 놓는다. 리투아니아도 공동묘지에 꽃과 촛불이 즐비한데, 폴란드는 더 열심인 모양이다. 폴란드 대사관의 지인 말로는 이날 바르샤바 근교 대형 공동묘지에는 극심한 교통체증이 빚어지고 촛불 때문에 축제를 방불한다고 한다.
공동묘지를 굳이 가보지는 않았지만, 예전에 카우나스 공동묘지가 있었다는 숙소 맞은편 공원에 몇몇 국가 영웅들의 묘지나 추모비가 남아있어 나란히 놓인 촛불을 볼 수 있었다. 온 국민이 한꺼번에 성묘하는 날인 셈인데, 꼭 가족 묘를 방문한다기보다는 모든 죽은 자와 모든 산 자가 묘지에서 만난다는 의미라고 한다. 유명인의 묘나 추모비에는 수많은 촛불과 꽃이 놓인다. 날씨가 좀 덜 궂고 덜 추웠다면 구경이라도 하러 가보겠으나, 오후 4시경부터 어두워지기는 초겨울에 아무리 색다른 분위기라도 묘지에 일부러 가고픈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만성절을 지나면 11월이고 그야말로 겨울이다. 2016년 만성절에는 전야와 휴일 내내 한국 뉴스를 들었다. 그때 한국은 매일같이 국기문란, 국정농단, 부패, 은폐, 탄핵, 하야 같은 키워드가 폭죽 터지듯 하면서 광장의 촛불시위가 날마다 뜨거웠다. 역사적인 사건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는 왠지 모를 아쉬움, 추운 날씨에 온 국민이 고생하는데 혼자 편하게 지낸다는 죄책감이 있었다. 리투아니아는 이미 10월부터 비에 섞인 진눈깨비나 눈이 간간이 내렸고, 11월 1일 만성절도 젖은 눈이 내렸다. 그 젖은 눈이 바람을 타고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만 들리는 휴일이었다. 시끄러운 한국과는 너무 멀어서 마치 상관이 없는 듯 딴 세상 같았다.
2017년 만성절의 조용한 저녁에는 아직 눈이 아니고 비가 지겹도록 내렸다. 차라리 한꺼번에 내리고 잠시 그쳐서 하늘을 보여 주면 좋으련만, 희뿌옇고 두터운 구름은 하염없이 가랑비를 뿌렸다. 눈이었다면 엄청나게 쌓였을 듯한데, 기온이 영하로 내려가지 않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차라리 한파와 눈이 낫다며 진저리를 쳤다. 눈이 오면 덜 축축하고 풍경도 예쁘다는 거다. 축축한 저녁에 들려오는 한국 뉴스는 여전히 변화무쌍했다. 사실 리투아니아 뉴스도 검색을 해 보면 러시아의 안보위협이라든지 유럽연합 내의 여러 일들, 리투아니아 정치권 스캔들도 있다. 하지만 그 수위나 긴박감이 한국 뉴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한국에 있는 외국인들이 뉴스를 안 본다고 가정할 때 과연 한국이 평온하게 느껴질지 문득 궁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