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2월 2일
리투아니아의 크리스마스 시즌은 한 달 정도다. 그 시즌의 시작을 알리는 행사가 크리스마스트리 점등식이다. 성탄절 한 달 전 즈음의 토요일을 잡는데, 2016년에는 꼭 한 달 전인 11월 26일이었다. 2017년에는 12월 2일 토요일에 빌뉴스와 카우나스 모두 점등 행사가 있었다. 카우나스의 트리 점등 행사를 두 번 참석했다. 첫 해와 비교도 해보고, 좀 더 적극적으로 시즌을 즐겨보고자 저녁에 구시가 광장으로 향했다. 일 년 내내 산책을 다녀도 한 번도 사람이 많다는 느낌을 받은 적 없는 구시가 거리가 명동거리처럼 붐비는 날이다. 젊은이들이 많이 모이는 재즈 축제를 해도 이 정도로 붐비지는 않는다. 6시 전후에는 아이부터 어른까지 점등식이 열리는 구시가 광장을 꽉 채우고도 사방에서 계속 사람들이 몰려든다. 카우나스의 20만 인구가 이 날은 여기 다 모이는 듯하다. 평균 키가 한국보다 크니, 앞에 선 사람이 조금 크다 싶으면 도무지 앞이 보이지 않는다.
2016년에는 이미 눈이 와 있었고 기온도 훨씬 낮았으며, 행사 중에도 진눈깨비가 휘날려서 사람들 사이에 끼어서 서 있기가 쉽지 않았다. 초보자답게 5시에 구 대통령 궁에서 열리는 사전 개막행사를 구경하고 6시에 구시가 광장에 도착했으니 앞으로는 갈 수가 없었다. 최대한 열심히 움직여서 겨우 구경했었다. 대통령 궁 앞의 사전 행사에서는 몇 가지 공연을 한 뒤 2층 테라스에 중년 신사가 나타나 1920년대 공화국 시기에 대통령이 했을 법한 훈화 말씀을 하면서 시즌 개막을 알렸다. 구시가 광장에서 열리는 본 행사는 6시부터다. 4시면 해가 져서 어두워지는 시기라 6시는 마치 밤 10시 정도는 된 듯한 분위기인데, 한적하고 어두워서 나가기가 꺼려지던 시간에 온 동네 사람들이 떠들썩하게 광장으로 몰려간다. 시내버스도 꽉 차고, 광장 진입로에는 콘서트장에서 흔히 파는 반짝이는 머리띠나 막대기를 판다. 아이들이 많이 오니 솜사탕과 풍선도 등장한다.
작은 구시가는 갑자기 몰리는 인파를 감당하지 못한다. 경찰도 이런 날이 드물어서 그런지 진짜 심각한 압사 위기가 아닌 한 그저 지켜보고 있을 뿐 별 조치가 없다. 2016에는 점등식 후에 광장 진입로가 심각한 병목 현상을 일으켜 빠져나오지를 못했었다. 오래간만에 서울 지하철 9호선의 출근 시간대 노량진-여의도 구간에 끼어 있는 기분을 느꼈다. 야심 차게 해외에서 '태양의 서커스' 공연팀을 초청해 시각효과가 큰 공연을 했었다. 공연은 공짜로 보기 미안할 정도로 멋졌는데, 그 때문인지 사람이 정말 많이 몰렸다. 2017년은 그런 환상적인 공연까지는 아니고 '열린 음악회'처럼 무대를 꾸미면서 캐럴 부르고 사회자가 분위기를 띄워 점등하는 행사였다. 그래서인지 작년보다는 사람이 좀 덜 붐볐다. 비교적 개인 날씨에 온도도 영상이고 공연도 짧게 끝나 숨 쉴 틈이 있었다. 덕분에 여유를 가지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트리 주위로 이미 마켓을 조성해서 부스들이 둘러 섰고, 한 켠에 범퍼카, 회전목마, 인형 뽑기 같은 이동식 시설이 들어와서 작은 유원지를 만들었다.
해마다 트리 디자인이 화제가 되고, 어디 트리가 더 예쁜지 도시 간 경쟁도 있는 모양이다. 카우나스 구시가는 작은 광장에 어울리게 트리도 작은 편이지만 창의적인 트리를 만든다는 자부심이 있다. 몇 년 전에는 페트병을 활용해서 재활용품 트리를 만들었다고 한다. 작년의 테마는 '무너진 회전목마의 부활'이었다. 공화국 시기 광장에 회전목마가 있었는데 2차 대전 때 망가져 없어졌다고 한다. 트리 아래쪽을 회전목마로 만들어 천천히 회전하는 트리였고 목마나 마차를 탈 수도 있었다. 작지만 아기자기하고 예뻐서 썩 마음에 들었다. 높고 조명이 많이 달린 백화점 스타일의 빌뉴스 트리보다 훨씬 애착이 가는 트리였는데, 투표 경쟁에서는 빌뉴스에 졌다고 한다.
회전목마 테마에 맞게 태양의 서커스 공연도 조명을 넣은 말 모양 풍선을 활용해서 효과를 냈다. 불 돌리기 같은 볼거리도 추가되었다. 그래도 점등식은 역시 산타 할아버지와 카우나스 시장님, 아이들이 하이라이트를 장식한다. 점등과 함께 스피커를 총동원해서 볼륨을 높여 장중하게 느껴지는 캐럴로 마무리했다. 리투아니아 사람들도 불꽃놀이를 정말 좋아해서, 행사 마지막에는 작은 광장 위 하늘에 쓰기에는 과분한 양의 불꽃도 터진다.
2017년 트리의 테마는 '커피숍'이라고 했다. 딱히 역사성을 부여하기보다는 소소하게 즐기기로 한 모양이다. 전 해에 너무 힘을 많이 썼던 모양이다. 큰 커피잔 모형을 하나 앞에 두었을 뿐 트리도 단순했다. 대신 주변을 둘러싼 크리스마스 마켓이 더 풍성해졌다. 작년의 인파를 기억하고 각오했던 것에 비하면 수월하게 점등식이 끝나서, 나도 핫와인을 사 들고 마켓을 기웃거렸다. 달콤한 군것질거리를 조르고, 꼬마열차를 타거나 인형을 뽑느라 아이들이 제일 신이 났다. 광장을 벗어나 카우나스 성채가 있는 강변 공원으로 나가니 성채도 백화점처럼 모서리를 따라 전구 조명을 달아서 빛나고 있었다. 앙상한 나무에도 눈송이나 산타, 사슴 모양 조명 장식을 달아서 깜깜한 공원이 색다른 분위기를 냈다. 모두 사진을 찍으며 즐기느라 여념이 없다. 날씨가 온화해서 한참을 산책하다가 은은하게 조명을 밝힌 자유로로 돌아왔다. 밤 11시는 된 것 같았지만 실상은 8시도 안된 초저녁이다.
2016년에 점등 행사를 구경하고 돌아가던 내 스마트폰에는 190만 명이 모여 촛불을 들었던 서울 광화문 광장의 촛불집회 소식이 있었다. 역사적인 현장에서 멀리 떨어져서 낯선 사람들 틈에 끼여 트리를 보고 있었으니, 점등식 관람이 힘들었다는 투정은 아무에게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진심으로 성탄의 평화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2017년 트리 점등 행사는 비교적 맘 편하게 즐겼다. 독일 대도시들에 비하면 구멍가게 수준이지만, '우리 동네'가 된 카우나스의 소박한 트리와 마켓이 더 정겨워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