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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유리 Dec 11. 2018

스트라스부르, 겹치고 섞여서 남은 예쁨

3일: 프랑스 스트라스부르

스트라스부르(Strasbourg)는 구시가가 예쁘다는 소문이 자자해서 꼼꼼히 보고 싶었던 도시다. 독일 이름이지만 프랑스 영토인 이 도시는 독일 여행자들에게는 모처럼 '프랑스스러운'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는 곳, 프랑스 여행자들에게는 '독일스러운' 독특한 집들을 볼 수 있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운하의 도시, 쁘띠 프랑스, 오랜 시간 문화가 겹치고 섞이면서 조화를 이룬 모습을 보리라는 기대가 있었다. 겹치고 섞이면 뭐가 뭔지 혼란스러울 수도 있겠건만, 스트라스부르는 그 장점만 모은 듯한 예쁜 이미지로 유명했다. 한국에서 최근 몇 년간 갑자기 늘어난 "크리스마스 마켓"도 스트라스부르의 크리스마스 장터를 본떴다고 선전을 한다. 


독일과 프랑스 국경에 올라앉은 이 독특한 도시는 두 나라의 애증의 관계를 예쁜 이미지로 포장한 느낌이었다. 제일 최근에 프랑스 영토가 된 건 2차 대전 이후다. 중세 시절 내내, 거의 800년간 신성로마제국에 명단을 올린 독일계 도시였다가 17세기 말 30년 전쟁 이후에 프랑스 영토가 되었다. 근대 민족국가 개념이 생길 즈음부터 프랑스 영토였던 셈이니 '국가 영토'로서는 프랑스가 차지했던 기간이 더 길다고 할 수 있지만, 그전까지는 줄곧 독일 영역, 독일 문화권이었다. 1870년에 독일이 근대 민족국가로 거듭나는 전쟁을 치르면서 점령하는 바람에 독일 영토가 되었다가 1차 대전 이후 프랑스가 되찾는다. 나치 독일이 몇 년 병합했다가 2차 대전 이후 다시 프랑스에게 돌아간 고달픈 '알자스-로렌' 지방 주도가 스트라스부르다. 

대성당 가는 길에 만난 구텐베르크 동상

정치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중간에 끼어 고생 많았지만, 그 와중에 창의적이고 예술적인 쪽에서 발전이 있었다. 한쪽의 규칙이나 관습이 절대적으로 통제할 수 없었기에 그만큼 자유롭기도 했다. 아침 먹으러 찾아간 대성당 주변 광장에서 별다른 표시도 없는 동상으로 구텐베르크를 만났다. 피골이 상접한 얼굴로 종이를 들고 있는 구텐베르크 동상을 보고서야 유럽의 활자인쇄술이 시작된 곳도 스트라스부르라는 생각이 났다. 책이 사치품이던 시대에 인쇄술과 출판업은 문화적인 혁명이나 다름없었다. 루터의 종교개혁이 퍼질 때는 그 인쇄술에 힘입어 가톨릭 프랑스를 향한 전초기지가 되었다. 가장 유명한 노트르담은 가톨릭 성당이지만 크고 작은 개혁교회 건물도 유명한 곳이 여럿 있었다. 건물만 봐서는 가톨릭인지 개혁교회인지 알 수 없었다. 그저 지을 당시에 가장 예쁜 방식으로 지은 모양이었다. 유명한 종교건물이 유독 많은 것도 문화적인 공존을 의미한다. 나치가 부숴버린 유대교 시나고그(신 시나고그, Neue Synagoge) 자리는 비워둔 채 기념하고 있었는데, 사진 속 시나고그도 장미창까지 갖춘 예쁜 성당 디자인 섞여 있었다. 

스트라스부르 노트르담 대성당

대성당(Cathédrale Notre Dame de Strasbourg)은 파리나 랭스의 대성당과 닮은 노트르담이었다. 그을렸지만 핑크색이 도는 갈색이어서 독특한 분위기가 났다. 주위 광장이 넓지 않아 큰 규모를 한꺼번에 볼 수는 없었다. 고딕 성당의 백미라는 성당은 내부에도 자랑거리가 가득했다. 예쁘기로 유명한 장미창이나 스테인드글라스는 물론이고 제단과 오르간도 유난히 컬러풀했다. 남달랐던 과학기술을 자랑하듯 한편에 설치된 커다란 시계나 지구본도 자랑이었다. 성당 근처 운하 쪽에 자리 잡은 로한 궁(Palais Rohan)은 보물창고 같은 박물관이었다. 주교나 귀족의 대저택이었는데, 프랑스 왕들이 방문하면 머물렀기에 저택보다는 궁전이 어울리는 화려한 집이다. 독일이나 프랑스 내륙의 웬만한 성당이나 저택보다 더 화려했는데, 중간적 위치라서 더 사치스러운 장식이 가능했을지도 모르겠다.  

성 토마스 교회의 옛날 오르간, 모차르트와 슈바이처

개혁교회들은 그리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스토리가 매우 풍부했다. 마침 오르간 연주회가 진행 중이던 성 토마스 교회(St. Thomas' Church)에는 모차르트와 슈바이처 사진이 양 옆에 놓인 낡은 오르간이 전시되어 있었다. 두 사람 다 그 교회에서 연주한 적이 있다는 뜻이다. 근처의 작고 소박한 부클리에(Bouclier) 교회는 최초의 프랑스 (위그노) 개혁교회로, 제네바에서 종교개혁을 이끌던 칼뱅이 세운 것으로 유명하다. 칼뱅답게 너무 소박해서 주위의 화려함과 확연히 대조되었다. 개혁교회와 가톨릭 성당이 각각의 특성대로 공존하는 모습은 대학 건물에서도 보였다. 스트라스부르 대학 인문대 본관에는 건물 양편에 가톨릭과 개혁교회의 신학부가 각각 자리 잡고 있다. 대칭형 건물의 각각 반대편에 있으니 대립과 경쟁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어쨌든 한 대학의 한 건물에 있으니 조화와 공존이다. 그 건물 앞마당에서 주말을 맞아 무지갯빛 동성애 축제가 열리고 있어서, 조화와 공존의 허용 폭에 대해 궁금증이 일기도 했다. 


성당과 교회도 멋졌지만, 도시의 예쁜 이미지는 거리 풍경이 결정한 거였다. 대성당 주변 광장과 골목의 중근세 독일식 건물들이 정말 예뻤다. 잘 보존하고 꾸며 놓은 구시가 골목들은 왜 스트라스부르를 그렇게 예쁘다 하는지 절감하게 해 주었다. 운하 주변은 더 잘해놓아서, 난간이나 다리마다 사진을 찍지 않으면 미안할 정도였다. 운하에 면한 옛 세관(Ancien Duan)'이라는 이름의 식당에서 식사를 하면서 내내 감탄사를 연발했다. 재미없었을 세관 건물마저 멋들어진 식당으로 바꿔 장사를 하는 것도 대단했다. 

예쁜 것으로 가장 유명한 구역은 쁘띠프랑스다. 하지만 대가 컸던 탓인지, 예쁨이 지나쳐서 인위적으로 보이는 바람에 내 감상에서는 후순위가 되었다. 볼 거 많은 구시가를 하루 만에 다 보려다 눈과 다리가 지쳤던 탓도 있다. 저녁나절에 찾은 쁘띠 프랑스는 롯데월드의 매직아일랜드 같은 느낌이었다. 운하의 도개교나 물레방아, 갑문 위의 전망대 등 예쁜 포토 스폿은 수없이 많았다. 너무 많았던 게 흠이었다. 현대 도시의 모습도 조금 섞인 다른 거리들이 훨씬 매력적으로 기억에 남는다.


다음 행선지인 스위스도 프랑스와 독일 문화권이 겹친 곳이다. 하지만 이렇게 좁은 공간에 잔뜩 맞닿아 있는 느낌은 스트라스부르가 독보적이었다. 전쟁이 여러 번 휩쓴 걸 생각하면 전혀 아름답지 못한 모습으로 남을 수도 있었다. 그걸 가장 예쁜 모습으로 만들고 다양한 스토리까지 갖추어 내로라하는 관광지로 만들었다. 서울도 구시가에 이런 모습을 살리면 대단할 텐데, 아쉬운 마음도 든다. 훗날 개성이나 평양을 재개발(?)하게 되면 구시가에 이런 매력을 갖게 만들 수 있을까, 그것도 왠지 안될 것 같아서 미리 아쉬운 마음이 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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