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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유리 Jan 13. 2019

석회질의 마법에 걸린 요정의 호수, 플리트비체

14일: 크로아티아 플리트비체 호수 국립공원

크로아티아 관광 리스트 최우선 순위에서 빠지지 않는 플리트비체(Plitvice) 호수 국립공원은 이미 한국에도 잘 알려져 있다. TV 프로그램의 힘이기도 하지만, 크로아티아를 찾는 모든 사람이 칭송을 아끼지 않는다. 한국 사람이 너무 많아서 청계산인 줄 알았다던 친구의 농담 섞인 감상도 들었다. 우리 가족도 빠질 수는 없었다. 자동차가 있으니 아예 국립공원 근처에 숙소를 잡고 1박 2일로 볼까 하는 생각도 했다가 접었다. 가볼 곳이 많은 관광대국 크로아티아 일정은 아무리 길게 잡아도 모자랐다. 이번 33일 여행 중에 7박 8일로 가장 오래 머무는 나라였음에도 유명한 곳들을 실컷 볼 시간이 없었다. 플리트비체 국립공원은 내륙의 산지에 있어서 아드리아 해안에 줄지어 나타나는 관광 명소들과 꽤 떨어져 있다. 당일치기로 하루 투자하기로 하고 자다르에서 왕복했다. 자다르에서 편도 1시간 반, 세 시간이 왕복에 소요되었다. 플리트비체에서 보낸 시간은 6시간 정도 된다. 


플리트비체 국립공원에서 호수 지역은 극히 일부분이다. 하지만 환상적인 경치의 주인공은 그 호수들이었기에 관광객들은 호수 주변에만 집중한다. 입장료는 환산하면 일률적으로 일인당 20유로 정도다. 코스는 A부터 K 프로그램까지 선택하면 되고 걷거나 버스, 배를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다. 가장 짧은 A 프로그램은 제일 유명한 폭포 전망이 보이는 아랫 호수 마지막 지점을 위주로 두어 시간 걷는 코스다. 일정이 빡빡한 패키지 관광객들이 주로 이용하는 모양이었다. 우리 가족은 천천히 윗 호수와 아랫 호수를 다 돌아보는 H 프로그램을 선택했다. 버스나 배를 전혀 타지 않는 K 프로그램이 가장 오래 걸리는 코스였는데 조금 무리일 것 같았다. 버스나 배를 적당히 타면서 모든 지점을 다 보는 코스로 정했다. 대부분 시간은 물론 걸어야 한다. 나무 데크로 모든 길이 걷기 편하게 되어서 휠체어도 간혹 보였다. 그래도 많이 걸을 생각에 트레킹 각오를 다지며 구경에 나섰다. 

플리트비체 호수 국립공원 윗 호수(상류) 구간

윗 호수(상류)와 아랫 호수(하류)로 구역을 나누지만 사실 여러 호수들이 겹치듯이 이어져 있다. 물이 남쪽에서 북쪽으로 흐르는 지형이라, 윗 호수 위치가 남쪽에 있어서 지도상으로는 위아래가 헷갈린다. 모든 홍보 사진에 나오는 가장 유명한 폭포는 아랫 호수에 있고, 우리가 택한 H 프로그램을 따라 가면 제일 마지막에 구경하게 되어 있었다. 네 시간에서 여섯 시간까지 걸린다는 H 프로그램이었지만, 열심히 걷기만 하면 서너 시간이면 될 것 같았다. 그런데 열심히 걷기만 하기에는 경치가 너무 좋아서 도저히 그럴 수가 없다. 걸음걸이 빠르기로 어디 가서 뒤지지 않는 우리 가족이지만 6시간을 꽉 채울 만큼 천천히, 계속 멈추어 가며 감탄사를 연발했다. '요정의 호수'는 과찬이 아니었다. 유난히 풍경이 예쁘거나 인상적인 폭포가 있는 곳은 줄을 서서 통과해야 할 정도로 사람들이 움직일 줄을 몰랐다.


일단 버스를 타고 윗 호수 꼭대기 부근까지 올라가서 내려오며 걷기 시작했다. 분명히 아랫 호수로 갈수록 더 멋진 장면들이 나오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계속 사진을 찍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쉽게도 하늘이 아주 파란 날은 아니었다. 구름이 많았고 해가 들어갔다 나왔다 하는 날씨였다. 덕분에 너무 눈이 부시거나 덥지는 않았지만, 아주 맑은 날보다는 호수 물 색깔이 덜 선명하다는 점이 아쉬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수는 비현실적인 푸른빛을 띠었다. 잔잔한 호수가 완만한 층을 이루며 다른 호수로 이어지고, 그 경계마다 크고 작은 폭포가 다양한 형태를 이루었다. 슬로베니아의 동굴군처럼 이 지역도 카르스트(Karst) 지형의 특색을 보여주는 사례라는 설명이 있었다. 유네스코 유산에도 벌써부터 올라가 있다. 이 일대가 석회암 지대이고 백운석이 섞여 있는데, 오랜 시간에 걸친 침식으로 이런 절경을 이루었다고 한다.  

플리트비체의 아랫 호수(하류)로 갈수록 그림같은 풍경이 더 많아진다.

수위 변화가 별로 없는지 길이 호수에 바로 면해 있다. 많은 구간이 물 위로 데크를 깔아 물을 내려다보게 되어 있다. 아침에 비가 온 흔적이 있었고 폭포 옆으로 간혹 지류가 흘러 젖어 있는 구간도 있었는데 전혀 미끄럽지가 않았다. 그러고 보면 이끼가 거의 없고, 호수에서 곧잘 나는 연못 냄새도 전혀 없다. 그림처럼 호수와 주변 숲, 그 경계의 오솔길이 깔끔하게 자기 색깔을 낸다. 문득 아빠가 석회질이 방부제 역할을 한다는 말씀을 하셨다. 며칠 전 슬로베니아의 블레드나 보힌 호수도 석회질이 강한 물로 이루어져 깨끗하고 투명하면서 초록빛이 살짝 도는 하늘색이었다. 플리트비체의 호수 물은 날마다 햇빛과 물속의 광물 성분에 따라 빛깔이 달라진다고 하는데, 대부분 청록색에 가깝다. 연못 같은 탁한 청록색이 아니라 바닥까지 다 보이는 투명한 색이다. 석회암 지대에서 석회질 강한 물이 고이면서 강한 방부제처럼 유난히 맑고 깨끗한 호수로 유지되고 있는 거였다. 


석회질 성분의 강력한 효과는 호수에 빠진 나무줄기나 낙엽들이 새하얀 화석이 되어 가라앉은 모습에서 뚜렷이 볼 수 있었다. 나무둥치나 낙엽이 물에 빠지면 썩게 마련이다. 하지만 이곳은 석회질(탄산염)로 덮여 그 모양 그대로 하얀 조형물이 되어버린다. 물속의 모든 것들이 석회로 하얗게 되니 물 색깔이 선명하지 않을 수 없다. 조그만 물고기까지 선명하게 보이는 배경이 된다. 그 하얀 바닥과 푸른 물을 한참 보고 있자니 방부제라는 석회질의 힘이 살벌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사실 유럽의 좀 오래된 숙소에서 설거지를 해본 사람이라면 그 석회질 물에 진저리 치게 마련이다. 그릇이나 수저의 물기를 바로 제거하지 않으면 하얗게 자국이 남는다. 싱크대도 조금만 방치하면 원래 반짝이던 스테인리스는 온데간데없고 뿌옇게 석회가 덮인다. 이곳은 초강력 석회 물로 물속의 모든 것들에 석회가 켜켜이 쌓여 다른 미생물이 침투할 틈을 주지 않는 곳이었다. 

플리트비체 호수의 하얀 바닥과 투명한 물의 비결은 강력한 석회 성분이다.

고농도의 석회 호수라 생각하니 환상적인 요정의 호수 이미지가 조금 상쇄되었지만, 예쁜 색깔이 선사하는 풍경은 천국 같다는 칭찬이 지나치지 않았다. 오후에 아랫 호수로 넘어오면서 날씨가 맑아졌고, 그 유명한 큰 폭포와 주변의 전망 포인트에 이르렀을 때는 밝은 햇살로 호수와 숲이 더욱 빛나 보였다. 계곡 하류로 내려온 셈이었기에 버스가 다니는 절벽 위의 길까지 지그재그로 오르막을 올라야 했다. 오르는 길 코너마다 되돌아보며 먼 경치를 눈에 담았다. 층층이 호수가 죄다 펼쳐 보이는 것은 아니었지만 숲 사이로 보인 몇 층의 호수와 자잘한 폭포들, 제일 아래의 큰 폭포까지 그야말로 절경이다. 관광지로 본격 개발된 지 오래되지는 않아서 편의시설이 좀 부족하지만 경치로 모든 것을 커버하는 곳이다. 석회질 많은 유럽 물을 매일 흉보고 있었는데 이런 요정의 호수를 만들어내기도 했으니, 자연의 모든 성분과 성질은 다 이유가 있는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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