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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유리 Jan 13. 2019

저녁에도 빛난 아드리아해의 진주, 두브로브니크

15일: 크로아티아 마카르스카, 두브로브니크

자타공인 '아드리아 해의 진주'라는 두브로브니크는 크로아티아의 남쪽 끝에서도 더 튀어나가 있다. 해안길을 따라 남쪽으로 가다 보면 잠깐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지나야 한다. 보스니아는 아직 솅겐 조약국이 아니어서 자유통행이 아니다. 그래서 들어갈 때와 나갈 때 국경 검문소를 각각 통과해야 한다. 7, 8월 성수기라면 그 검문 통과에도 꽤 시간이 걸릴 듯하다. 30분 정도면 통과하는 보스니아의 짧은 해안에는 보스니아 유일의 바다 출구인 네온 항구가 있다. 복잡했던 1990년대 발칸반도의 분쟁이 반영된 영토 획정일 것이다. 그 아래 두브로브니크가 속한 크로아티아의 남쪽 끝 조각은 그래서 보스니아와 몬테네그로로 둘러싸였다. 꼭 물음표의 아랫 점처럼 본토와 떨어져 있는데, 이 동떨어진 땅 가운데에 관광대국 크로아티아의 간판이라 할 수 있는 보물 같은 두브로브니크가 있다. 

두브로브니크 가는 길에 들른 작은 항구 마카르스카(Makarska)

자다르를 떠나 두브로브니크까지 쉬지 않고 달리면 세 시간 정도 거리다. 그 사이에는 스플리트를 비롯해서 크고 작은 해안 도시나 마을이 많다. 요즘 여행 블로그들은 대표적인 도시인 스플리트나 두브로브니크 말고도 해안을 따라 점점이 나오는 작은 도시나 마을을 추천하는 경우가 많다. 일주일 정도 여행에서 그런 소도시까지 들르기는 시간이 부족하다. 한 곳이라도 들러보자는 생각에 자다르와 두브로브니크 중간 즈음의 마카르스카(Makarska) 마을에서 점심을 먹었다. 한적하고 소박할 줄 알았는데, 한국 여행 블로그에 나올 정도면 이미 많이 찾는 곳인 모양이다. 해안을 따라 꽤 비싼 주차 시스템이 완비되어 있고 카페와 레스토랑이 줄지어 있었다. 딱 우리처럼 길 가다 들러 밥 먹고 산책하고 지나가기 좋은 세팅이었다. 해운대의 동백섬처럼 항구 한쪽에 등대가 있는 언덕이 이어졌고 좀 뜬금없지만 베드로 동상이 자유의 여신상처럼 서있다. 남쪽으로 가면서 한낮의 태양이 뜨거워짐을 느끼며 식후에 한 바퀴 산책까지 했다. 2주 이상 크로아티아 여행을 하는 사람이라면 이런 작은 도시를 숙박지로 머물러 보는 것도 여유를 즐기기에 좋을 듯하다. 


아직 우리 가족은 작은 마을에서 여유를 즐기기에는 큰 관광지 구경 욕심이 앞섰다. 오후 나절 열심히 달려 두브로브니크 구시가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절벽 위쪽의 에어비앤비 숙소에 여장을 풀었다. 숙소가 산 중턱 즈음의 도로변이었는데, 근처에 산꼭대기 전망대로 올라가는 보행로 입구가 있었다. 가이드북마다 나오는 '스르지 산 전망대 케이블카'를 타면 도착하는 그 전망대다. 방에서도 구시가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지라, 굳이 산꼭대기까지 전망을 보러 올라가는 코스는 계획에서 지웠다. 올라갔다면 더 멀리까지 보이는 바다와 어우러진 구시가지 요새의 온전한 형태를 보았을 것 같다. 그것도 좋지만, 가능하다면 숙소를 이런 전망이 있는 곳으로 구해서 아침저녁으로 전망 욕심을 해결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숙소로 정한 에어비앤비 창밖으로 보인 두브로브니크 구시가지

전망을 보러 오르는 대신 저녁나절의 구시가지를 들어가기로 하고 깎아지른 경사면을 곧장 내려갔다. 내려가는 좁은 골목 계단길도 낡았으면서 잘 꾸민 분위기가 있었다. 바다 쪽으로 튀어나간 요새 형태의 구시가지 성채를 제외하고 육지 쪽은 전부 경사가 급한 언덕이다. 천혜의 요새였을 것이고, 지금은 그만큼 경치가 좋아 천혜의 관광 자원이다. 사실 두브로브니크는 나만 초행이고, 부모님은 십여 년 전에 패키지 관광 중 한나절 정도 돌아보신 적이 있었다. 그때는 아직 관광지로 개발이 진행 중이었고, 구시가 내부에도 복구 중인 건물이 많았다고 한다. 사실 두브로브니크가 세계적 관광 명소로 떠오른 것은 2000년대 중반부터다. 1990년대까지 진행된 발칸반도의 전쟁으로 인한 파괴 때문이다. 이미 유네스코 유산으로 지정되었던 구시가도 전쟁의 포화를 피해 갈 수 없었다. 다행히 그 후로 빠르게 복구가 되고 관광에 사활을 건 크로아티아에서 신경을 많이 쓴 덕에 관광지로서 명성이 금방 높아졌다. 


두브로브니크는 관광 시스템도 꽤 잘 갖추어져 있다. 우리도 '두브로브니크 카드'를 샀다. 1일권, 3일권, 7일권이 있는데, 1일권을 사면 24시간 사용할 수 있으므로 다음 날 이 시간까지다. 성벽을 포함해서 시내 주요 박물관이나 갤러리 입장이 연동되고 버스도 시간 내에는 무제한 탈 수 있어서 꽤 유용하다. 인터넷으로 미리 사면 10퍼센트 할인도 해준다. 카드를 사들고 구시가지 정문에 다가설 때 시간이 거의 저녁 6시였다. 부모님이 십 년 전에 성벽을 올라가셨었는데 너무 좋았다며 필수 코스로 지정하셨기에 성벽부터 볼 생각이었다. 성벽 진입로에 6시까지라고 쓰여있어서 내일로 미루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우리를 본 직원이 올라가겠느냐고 묻더니 바로 들여보내 주었다. 눈치를 보니 그 후에도 계속 관광객들을 들여보냈다. 워낙 해가 긴 6월이라 석양을 보려는 관광객들을 제지하기 미안했던 것인지, 초과 근무하면서 입장료를 더 챙기는 것인지 몰라도 고마울 따름이었다. 낮에 올라가면 그늘도 없는 성벽 위 산책이 너무 힘들 것이 분명했다. 석양에 비치는 구시가와 바다를 보는 것이 더 좋다는 감상평도 많이 들은 터였다. 

저녁 무렵 올라간 두브로브니크 성벽 전망

모두가 강력 추천하는 성벽 산책은 과연 훌륭한 선택이었다. 성벽으로 구시가 전체를 완전히 한 바퀴 돌면서 다양한 각도로 시내와 성 밖 바다를 구경할 수 있다. 중간중간에 카페도 있었고 전망대처럼 공간을 만들어놓은 지점도 꽤 있었다. 2000년대 중반에 부모님이 처음 오셨을 때만 해도 성벽 정비가 덜 되어 카페나 전망 공간 같은 것은 없었고, 내려다보이는 구시가에도 아직 무너져 있거나 정비가 안돼서 흉물스러운 건물이 많았다고 한다. 지금 성벽에서 내려다보이는 구시가지는 13세기와 14세기에 이곳을 차지했다는 베네치아 공화국 분위기에 맞추어서 복구를 마친 모습이다. 이탈리아식의 붉은색 지붕을 얹은 돌 건물들로 오밀조밀 가득한 구시가지 곳곳에 종탑이 올라온 성당이나 관청 건물이 섞여 있다. 어스름이 깔리는 저녁 시간이었고 이 날 석양은 구름으로 좀 흐릿했지만, 그 흐릿한 저녁 빛에 비친 은은한 모습도 참 곱게 보였다. 성벽 밖의 바다도 오늘은 잔잔했고, 멀리 간혹 보이는 배가 있을 뿐 조용하게 저녁 빛을 받아 남색으로 짙어져 갔다. 


성벽의 가장 높은 지점은 당연히 산 쪽(동쪽)이었고 꽤 높이 올린 망루가 있다.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구시가지와 그 너머의 바다 풍경이 두브로브니크를 왜 아드리아 해의 진주라고 부르는지 자랑하듯 펼쳐졌다. 성벽 위에서 한참 머물면서 자세히 내려다보다 보니 주요 골목 근처가 아닌 뒷골목 쪽은 아직 무너진 채 방치되었거나 복구공사 중인 곳도 간혹 보였다. 고대 로마 때는 주목받는 항구는 아니었고, 비잔틴의 유적이 좀 있다고 한다. 지역 부족(세르비아 민족)들이 차지하고 있다가 베네치아가 차지하면서 달마티아 지역의 항구로 규정이 되었는데, 14세기부터 19세기 초까지 사실상 자유도시로 유지되었다. 오토만 제국이나 베네치아 같은 세력 사이에서 균형을 잘 잡으면서 번영을 누렸다는 설명이 있었다. 문화적으로 베네치아 영향을 많이 받아서 관광지로 꾸민 지금 모습도 이탈리아 요새 도시 같다. 

어두워질 무렵 성벽에서 내려다본 두브로브니크 구시가지

그렇게 균형을 유지했던 자유도시였지만 근현대 발칸반도의 혼란에 직격탄을 맞았다. 유네스코 지정도 하면서 구시가 보존에 노력을 했다는데, 1991년에 유고 연방이 해체되는 중에 그런 보존 노력은 허사였다. 크로아티아와 세르비아, 몬테네그로까지 얽힌 영토 분쟁 지역이 되면서 포위와 폭격이 몇 달 동안 지속되었다고 한다. 다음 날 돌아본 시내 건물들 중에 총이나 포탄 구멍이 표시된 곳이 간혹 있었다. 시청사 옆 박물관 한편에서는 당시 부서지고 파괴된 사진들을 걸어놓고 죽은 이들을 기리는 공간도 볼 수 있었다. 그런 일이 일어난 지 30년도 되지 않았고, 당시 죽은 사람들의 가족과 친척들은 아직도 한창나이일 것이고, 공격하고 방어했던 참전자들도 다 활동 중일 것이다. 이렇게 복구되고 관광지로 각광받는 두브로브니크를 보는 사람들의 느낌은 다 다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여기도 시간이 한참 더 지나면 지금 한국의 젊은 세대처럼 그런 분쟁은 역사 교과서로만 배우게 될 거다. 그렇게 되게끔 평화가 오래 유지되는 게 제일 중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망대 꼭대기에서 내려오는데 시내 골목 여기저기서 함성 소리가 들렸다. 이 날이 러시아 월드컵에서 크로아티아와 아르헨티나의 경기가 있는 날이었던 것이다. 고풍스러운 구시가지 골목마다 갑자기 월드컵 열기로 상기된 젊은이들이 부쩍 눈에 띄었다. 바다 쪽으로 트인 부두에 있는 야외 레스토랑에서 해산물로 저녁을 먹는 중에도 계속 간헐적인 함성 소리가 들렸다. 서빙하는 직원들도 서빙에 집중하지 못하는 게 너무 역력해서 웃음이 나왔다. 조용한 밤바다를 내다보며 해산물로 훌륭한 저녁을 먹었지만 결국 우리도 소리가 날 때마다 이기고 있는 것인가 궁금해하게 되었다. 결과는 러시아 월드컵 최대 이변 중 하나라고 하는 크로아티아의 3-0 승리였다. 하필 저녁을 먹고 다시 구시가를 가로질러 나올 때쯤 경기가 끝나는 바람에, 우리 가족은 그야말로 광란의 도가니 한복판을 가로지르게 되었다. 구시가라 차가 없어서 다행이었다. 

월드컵 아르헨티나 전 승리로 흥분한 두브로브니크 시내의 크로아티아 사람들

2002년 여름 서울 시내에서 월드컵 경기를 이길 때마다 밤새도록 미친 듯이 소리 지르며 질주하던 한국의 청년들과 하나도 다를 게 없었다. 다른 게 있다면 그때는 나도 그 또래 청년이었다는 것쯤이다. 깃발을 휘날리고 나팔 같은 호루라기를 부는 것도 다 똑같았다. 귀갓길 버스 타는 과정이 좀 힘들기는 했지만, 역사는 뒤로 하고 오늘을 즐기는 크로아티아 청년들을 본 것은 기분 좋은 일이었다. 그 월드컵에서 결국 크로아티아는 결승 진출까지 했다. 우승은 못했지만 한국이 2002년에 월드컵을 통해 보고 누렸던 국가 차원의 기쁨이 있었다. 우리 가족은 중세 요새 두브로브니크 구시가에서 그 모습을 일부 함께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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