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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유리 Jan 16. 2019

두브로브니크 성벽 앞바다 입수는 실패

16일: 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

2박 3일 머무른 두브로브니크에서 사이 하루는 온전히 구시가지 구경과 바닷가 휴식으로 채우기로 했다. 강력 추천 코스인 성벽 위 산책을 이미 전날 저녁에 완료했으니 일정은 한결 여유가 있었다. 날씨도 맑아서 드디어 발칸의 6월 여름날을 제대로 만끽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두브로브니크 구시가를 향해 오늘도 깎아지른 내리막 골목 계단을 내려갔다. 저녁에 올라갈 때는 도무지 엄두가 안 나서 버스를 탔지만 아침에 내려가는 계단길은 할 만하다. 거주민이 된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오래된 골목이다. 오전에 구시가를 돌아보고 오후에는 성벽 밖 바위에서 바로 입수한다는 부자 바(Buza Bar)에서 바다에 뛰어들어 볼 생각이었다. 


두브로브니크 카드에는 구시가의 웬만한 박물관이나 갤러리가 다 포함되어 있다. 현대미술 갤러리나 자연사박물관, 해양박물관도 있다. 물론 하루에 다 볼 수는 없고 관심사에 맞게 선택해야 한다. 건물도 멋지고 역사를 강조한 주요 박물관 두 곳만 골랐다. 프란치스코회 수도원 박물관과 문화역사박물관(Rector's Palace)이다. 구시가지 입구에 들어서면 중세 시절 주민들의 상수원이었을 둥근 지붕의 수돗가가 있고, 그 맞은편이 프란치스코회 수도원이다. 14세기 초에 생긴 것으로 추정한다는 이 수도원은 유럽에서 가장 오래되었다는 약방이 있다. 그 자리 그대로 영업 중이어서 영업 지속 기간도 제일 오래되었다 한다. 아쉽게도 이날이 크로아티아의 공휴일이어서 문을 닫았다. 무슨 공휴일인가 했더니 '반 파시스트 항쟁의 날(Anti-Fascist Struggle Day)'이다. 2차 대전 당시 유고슬라비아 왕국이던 이곳은 독일 나치와 이탈리아 파시스트 군대에 점령당했다. 거기에 저항한 파르티잔 운동을 기념하는 거였다. 티토가 이끌던 유고슬라비아 공산당이 주도한 항쟁인데, 복잡한 분쟁을 거쳐 나라별로 갈라지긴 했지만 그 역사는 기념하고 있다. 아무튼 유명한 수도원 약방은 닫힌 창문 너머로만 보고, 붙어 있는 성당과 박물관이 된 수도원 내부 전시실을 구경했다. 

중세 프란치스코회 수도원은 지금 박물관으로 쓰인다. 1991년에 맞은 포탄 자국도 그대로 전시물이 되었다.

수도원 박물관의 전시물들은 당연하게도 수도원과 성당의 보물이나 예식용 물건들이다. 악보나 필사본이 일부 있고, 성인을 그린 그림들도 있다. 부침이 심한 지역의 유물이 대부분 그렇듯 정확한 설명은 별로 없고 시대만 추정하는 경우가 많다. 인상적인 전시물은 그런 중세 보물보다도 벽에 뚫린 포탄 구멍이었다. 크고 작은 포탄 구멍은 주로 1991년에 있었던 분쟁의 흔적이다. 유리판을 덮어서 그것도 보존하고 있었다. 중세풍으로 복구한 관광지에서 중세 분위기를 즐기다가도 최근의 분쟁 흔적이 계속 눈에 띄었다. 중앙대로인 스트라둔(Stradun)을 따라 직진하면 바로 닿는 광장의 화려한 스폰차 궁전에는 1990년대 분쟁에서 두브로브니크를 지키다 죽은 크로아티아 사람들을 기리는 공간도 있다. 각종 관청과 문서고로 쓰이는 스폰차 궁전은 꼭 베네치아 중심에 있을 것 같은 장식적인 건물인데, 접근성 좋은 방을 추모실로 할애하고 있었다. 


스폰차 궁전을 시작으로 주요 건물들이 모인 중앙광장에는 두브로브니크의 수호성인인 전설적인 성 블라시우스(St. Blasius) 성당이 있고, 그 앞 광장 중앙에 좀 뜬금없는 중세 기사상이 있다. 롤랑(Roland, 또는 올란도 Orlando)의 기사라고 불리는 작은 포디움이다. 도시를 수호한다고 해서 성 블라시우스나 롤랑의 기사 모두 두브로브니크에서 매우 사랑받는 상징이다. 특히 성 블라시우스는 골목과 건물 여기저기에 다양한 재질과 사이즈로 세워져 있다. 오랜 세월 도시가 잘 보존되어 왔으니 꽤 잘 수호한 셈이지만, 1990년대 분쟁의 폭격으로부터는 보호하지 못했다. 문화역사박물관(Rector's Palace)은 숱한 용도변경 끝에 박물관이 된 궁전이다. 1층(지하층)의 전시실에 폭격 당시의 사진들을 전시하고 있었다. 예쁘게 정비된 지금 건축물과 부서졌던 모습을 바로 비교해볼 수 있다. 물론 박물관에는 두브로브니크의 역사와 중근세 상류층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전시가 대부분이다. 생각보다 유물도 많고 잘 꾸려놓았는데, 내 기억에 제일 남는 건 그 폭격 사진들이었다. 

광장의 성 블라시우스 성당과 롤랑의 기사, 성문 근처의 중세 수돗가도 1991년에 폭격 맞은 사진이 남아 있다.

중앙로를 벗어나 남쪽의 성벽 쪽으로 골목을 탐험하듯 돌아다녔다. 좁은 공터에 작은 장터가 있기도 하고, 좁은 골목에 고급진 부티크 숍이나 공예품점이 있기도 했다. 로마의 스페인 계단을 연상시키는 멋진 계단이 성벽을 향해 나 있어서 올라갔다가 커다란 예수회 성당(성 이그나티우스 St. Ignatius 성당이었음)을 마주치기도 했다. 그렇게 구시가 골목을 헤집고 다니다 피자로 점심을 먹었다. 맑은 날씨였다가도 대기가 불안정했는지 먹는 중간에 소나기가 왔다. 골목에 테이블을 놓은 피자집이었는데 튼튼한 차양을 잽싸게 쳐서 비를 막았다. 다들 이 정도 날씨 변덕에는 지장 없이 장사할 채비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채비가 없었다. 이때 오후의 바다 입수 일정이 수월하지 않을 것임을 알아챘어야 했다. 


성벽 밖으로 통하는 길을 검색해 절벽에서 바다에 뛰어든다는 부자 바(Buza Bar)를 찾아갔다. 유럽 여행하면서 구글맵에 감탄한 적이 많았지만, 이 부자 바 찾아갈 때 제일 감탄스러웠다. 성벽 틈으로 난 골목, 공사로 변경이 잦을 듯한 샛길을 도보 안내 기능이 잘도 찾아냈다. 부자 바는 모든 가이드북에 꼭 나오는 성벽 밖 바위 절벽에 있는 바다. 말 그대로 바여서 음식은 없고 병 음료만 판다. 그늘 없는 땡볕에 파라솔과 철제 테이블, 가냘픈 철제 난간이 전부인 그냥 바위다. 그래도 그 바위에서 바로 출렁이는 아드리아 해로 뛰어들 수 있다는 매력 때문에 인기가 대단하다. 원조가 어딘지는 모르겠지만 두 곳이 있다. 물론 바다를 경험할 수 있는 곳이 여기만은 아니다. 남쪽 성문 밖으로 나가서 구시가를 벗어나면 좁게나마 모래가 있고 해수욕장으로 개방되어 있는 반예 비치(Banje Beach)가 있다. 이왕이면 성벽에서 바로 수영해보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굳이 이곳을 찾은 거였다.

두브로브니크 골목 풍경과 성벽 밖 절벽의 부자 바(Buza Bar), 오늘 바다는 입수 불가능.

결과적으로 바다에는 못 들어갔다. 바다 밖 날씨는 화사하고 맑았지만 의외로 파도가 거친 날이었다. 과감하게 바위에서 뛰어내릴 수는 있어도, 다시 나올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수영에 자신 있어 보이는 현지인들이나 몇몇 젊은 학생들이 과감하게 뛰어내렸다가 겨우겨우 나오곤 했다. 여기서 뛰어내릴 생각으로 아침부터 옷 안에 수영복도 입고 다녔건만, 볼수록 점점 자신이 없어져 결국 일광욕만 하고 말았다. 최대한 가까이 내려가서 발만 담가보는 것도 파도가 세서 쉽지 않았다. 베테랑인 듯 보이는 현지인 할머니는 그 와중에도 유유히 뛰어들어 수영을 즐기고 계셨다. 


평소 바다에 대한 근거 없는 자신감이 충만하신 아빠는 꼭 몸을 담가보겠다는 투지로 뛰어드셨다. 결국 파도에 밀려 엉뚱한 바위를 타고 기어 나오시다가 무릎을 크게 까이는 상처가 났다. 안전요원이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엄마는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셨다. 자주 오는 듯한 한 현지인이 오늘 유난히 파도가 세다며, 성벽 말고 부두 쪽으로 도전해 보라고 알려주었다. 결국 부자 바는 포기하고 요트가 잔뜩 서있는 부두를 돌아 나가니 방파제 한쪽에서 사람들이 바다에 들락날락했다. 여기도 파도가 만만치 않았다. 아빠의 부상으로 소심해진 우리 가족은 입수는 포기하고 물보라와 경치만 즐기며 시간을 보냈다. 처음부터 반예 비치로 갔더라면 파도가 세더라도 물에 몸은 담가보았을 것 같다. 하지만 멀리서 봐도 반예 비치는 사람들이 바글바글했다. 야심 찬 성벽 바위 입수 계획이 실패해서 의욕도 상실했다. 자다르에서 잠시나마 해수욕을 해봤으니 다행이라며, 오전부터 돌아다녀서 피곤하기도 하다며, 그렇게 두브로브니크 앞바다 입수 계획은 접어 넣었다. 다음에, 언젠가, 또 올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아쉬움을 남겨두는 것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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