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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유리 Jan 19. 2019

스타리 다리 하나로 충분한 모스타르

17일: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모스타르

두브로브니크에서 스플리트로 가는 날이다. 크로아티아의 해안선을 따라 곧바로 올라가면 두 시간 정도의 거리다. 바로 올라갈 수도 있었지만, 계획을 짜다 보니 잠깐 스치듯이 지나가는 보스니아 땅이 좀 아쉬웠다. 이왕 보스니아 국경을 들어서는 김에 잠깐 가볼만한 곳이 없나 찾아봤다. 수도인 사라예보를 가보고 싶었지만 이번 여행에 끼워 넣기에는 너무 멀었다. 이런 생각을 한 사람이 나만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크로아티아와 비교적 가까운 모스타르 방문을 추천하는 정보가 많이 눈에 띄었다. 바다를 끼고 관광대국으로 탈바꿈한 크로아티아와 바로 옆의 내륙국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는 분위기가 확연히 다르다. 국경검문소를 지나 언덕도 많고 도로도 좁아진 보스니아 땅을 두 시간 정도 열심히 달렸다. 분지처럼 내려앉아 강을 끼고 있는 모스타르는 보스니아에서는 꽤 큰 도시라 한다. 아직 주차를 비롯한 관광인프라가 체계적이지 않다. 구시가 주변 환경은 개발한 지 얼마 안 된 지방 소도시 같았다.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유명 관광지가 된 모스타르는 주요 포인트가 딱 하나, 스타리 다리다. 스타리 다리는 현지어로 "Stari Most (Old Bridge)"라 하여 말 그대로 '옛날 다리'다. 더 옛날부터 목조 다리가 있던 것을 16세기 중반에 석재로 '다시 지은' 오스만튀르크 제국의 다리다. 절벽으로 푹 파여 있는 강을 가로질러 도시의 양쪽을 이어주는 중요한 다리였다. 오스만 제국 전성기에 변경의 주요 도시가 되면서 야심 차게 지었던 모양이다. 발칸 지역에 남아있는 이슬람 건축의 정수라고 한다. 이스탄불에 멋진 건축물을 여럿 남긴 전설적인 건축가 미마르 시난의 제자인 미마르 하이룻딘(Mimar Hayruddin)이 건축했다고 되어 있었다. 건축가 이름 앞에 꼭 그 스승을 언급한다. 건축가 시난의 이름은 곧 술레이만 시대의 황금기를 대변한다. 그 이름을 같이 붙여서 이 다리에도 더 의미를 부여했다. 모스타르라는 도시 이름도 '다리 파수꾼(bridge keeper)'이라는 뜻이라니, 여기는 '기승전 다리'다. 

모스타르의 스타리 다리와 구시가는 2000년대 중반에 복구되어 유네스코 문화유산이 되었다.

중간에 교각 없이 가운데가 뾰족한 아치형의 다리는 수백 년 전 것이라 생각하면 신기하기는 하다. 다리 아래서, 다리 위에서, 다리 건너에서 계속 다리를 넣어 사진을 찍게 된다. 무려 427년간 무너지지 않고 잘 서있다가 1993년에 크로아티아 군의 폭격으로 무너졌다. 두브로브니크에서는 보스니아와 몬테네그로 군의 폭격을 받았던 도시를 봤지만, 여기서는 크로아티아 군의 폭격을 받았던 다리를 본다. 전쟁 후에 세계은행과 유네스코가 적극 나서서 재건했고 2004년에 다리를 완공했다. 그리고 2005년에 다리를 포함한 구시가 일대가 유네스코 문화유산이 되었다. 도시 여기저기에 재건 기념 푯말들이 있다. 


다리 밑에서 한참 올려다보며 구경하다가 터키풍 모스크와 미나렛이 더 많이 보이는 건너편으로 건너갔다. 아치형 구름다리는 경사면이 계단이라기보다는 완만한 비탈에 가깝다. 돌바닥이 매우 반들반들해서 약간 물기만 있어도 미끄러웠다. 다리 위에서 구경하는 사람도 많고, 다들 미끄러워질까 조심하느라 건너는 데 한참 걸린다. 건너가서 구시가 골목에 접어들면 걸음이 더 느려진다. 좁은 길에 양옆으로 늘어선 상점과 식당이 즐비하다. 기념품 중에도 터키식 장신구나 찻잔, 직물이 많다. 터키의 바자르 근처에 온 것 같다. 강을 따라 형성된 골목을 인파와 함께 흘러 다녔다. 

터키 풍이 많이 느껴지는 모스타르 구시가지 골목과 레스토랑의 '전통' 메뉴

구시가 중간 즈음에 다리 경치도 보이고 구시가 골목도 내려다 보이는 한 레스토랑의 2층 창가 자리를 차지했다. 다리 구경, 사람 구경하면서 이 지역 전통 요리라고 쓰여있는 메뉴들을 시켰다. 터키 분위기가 물씬 나는 꼬치 요리와 납작한 빵, 터키식 커피까지 있다. 보스니아 전통은 아무래도 터키에 더 가까워 보인다. 가격은 크로아티아보다 훨씬 저렴하다. 주변에 비해 비싼 레스토랑인 것 같았는데도 가격에 큰 부담이 없었다. 


스타리 다리는 일차적으로 도시의 양쪽을 이어주는 용도다. 하지만 유네스코 문화유산 지정과 함께 문화적인 공존, 조화, 관용 등등 좋은 의미가 많이 추가되었다. 발칸 분쟁으로 격전지가 되기 전까지 교회와 모스크가 나란히 공존하던 마을이었다. 주로 가톨릭인 크로아티아 사람들, 정교회 세르비아 사람들, 무슬림 보스니아 사람들, 유대인까지 다양한 종족과 문화적 배경이 섞여 살았다. 그러다 냉전 직후에 불거진 민족 갈등이 종교와 문화적 차이까지 적대시하게 만들었다. 강변에 면한 시끌벅적한 관광 골목을 벗어나 조금 안쪽으로 올라가자마자 공동묘지가 나왔다. 아담한 모스크를 하나 끼고 있는 꽤 큰 묘지다. 비슷비슷한 비석의 주인공들이 죄다 1993년에 죽었다. 크로아티아 군의 공격 때 죽은 보스니아 사람들이다. 이런 공동묘지는 아마 발칸 모든 국가의 웬만한 도시마다 있지 싶다. 이곳은 지리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섞인 경계 지역이라 상처도 더 커 보였다. 오랜 세월 어울려 살았지만 20세기 두 차례 세계대전, 냉전을 겪으며 많은 것이 쌓였을 것이다. 세기말에 결국 서로 죽고 죽이는 원수가 되었다. 다리와 도시의 재건 사업은 그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이기도 할 것이다. 

구시가지 관광 골목을 조금 벗어나면 만나는 한적한 터키풍 마을, 분쟁의 상처를 증언하는 공동묘지

1990년대의 보스니아 전쟁은 뉴스와 신문을 통해 직접 본 전쟁이다. 아직 과거사라고 하기에는 너무 최근의 일이다. 어쨌거나 전쟁은 끝났고 발칸 각국은 현 상황에서 최대한 잘 살아보려 하고 있다. 관광은 그 과정의 주요 산업이다. 이 관광객들 중에 당시 서로 싸웠던 발칸 각국의 사람들도 서로 방문하고 있을지 잠깐 궁금해졌다. 문화적인 차이는 전쟁 당시 적대감을 증폭시킨 요인이었다. 이제는 그게 중요한 관광자원이라 더욱 강조해야 한다. 크로아티아는 베네치아나 로마를 보여주는 유적과 성당을 공들여 재건한다. 보스니아는 오스만 튀르크의 전성기 때 모습과 모스크를 재건한다. 각자 가장 황금기라고 여기는 시기의 가장 특색 있는 모습으로 문화적인 다양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면서 서로 치유하고 다시 공존하며 이웃하여 지내는 옛 습관이 되돌아오면 다행이겠다.  


각종 정치적, 문화적 의미를 부여해서 더 명물이 된 모스타르의 스타리 다리에서는 매일같이 가운데 꼭짓점에서 뛰어내리는 사람이 있다. 호객을 해서 돈이 어느 정도 모이면 멋지게(?) 뛰어내린다. 하루에 한두 번도 아니고, 사람이 많은 시간에는 주기적으로 계속하는 것 같다. '저렇게까지 돈을 벌다니'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해마다 거기서 뛰어내리는 대회가 있다고 한다. 수십 미터 높이라 꽤 숙련된 기술이 필요한 고난도 스포츠였다. 화해와 공존을 의미하게 된 다리 가운데서 뛰어내린다는 좀 과도한 아이디어로 대회까지 열어가며 매력적인 관광지로 어필한다. 이제는 즐겁게 잘 지내보고자 하는 모든 노력이 좋은 결실을 맺어 가면 좋겠다. 


다리 한가운데에서 돈을 받고 뛰어내리는 사람이 가운데 걸터앉아 있다. 다리 위에서는 터키풍 기념품을 많이 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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