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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유리 Jan 21. 2019

트로기르의 중세를 거쳐 자그레브의 근대까지

19일: 크로아티아 트로기르, 자그레브

스플리트를 떠나 크로아티아의 수도 자그레브로 향하는 날, 이번 크로아티아 일정의 마지막 날이다. 스플리트에서 고대 로마에 빠져 이틀을 지냈다. 인상 깊었던 유적 도시를 뒤로 하고, 오전에 근처의 트로기르에 들렀다. 스플리트 서쪽으로 해안선을 따라 가면 30분도 안 걸리는 작은 항구도시다. 트로기르 구시가는 조그만 섬이었는데 육지와 다른 큰 섬 사이에 끼여 물길을 막고 있는 형상이다. 여의도처럼 육지와 연결되어 있다. 원래 스플리트에서 머물던 중간에 시간이 남으면 와보려던 곳이었다. 스플리트를 열심히 구경하느라 그러지는 못하고 떠나는 날 잠깐 들렀다. 섬 둘레로 성벽을 두른 요새였을 구시가는 정말 작아서, 완전히 한 바퀴 돌아도 1킬로미터도 안 된다.

트로기르 구시가지 남쪽의 중세 요새와 긴 해변 광장

트로기르에도 항구는 고대부터 존재했다고 한다. 지금 남은 구시가 유적은 주로 중세 베네치아 지배 시기를 재현하고 있다. 스플리트와 가까우니 당연히 로마 시절부터 쓰임새가 많았을 것이다. 본격적인 개발은 11세기경부터 베네치아의 영향을 받으면서 시작되었다. 14세기부터는 아예 4백 년간 베네치아의 직접 지배를 받았다고 하니, 거의 8백 년을 베네치아의 영향 아래 있었다. 구시가를 둘러싼 성채도 십자군 성채처럼 생겼고 성당이나 공공건물도 중세 고딕, 르네상스 이탈리아 느낌이 많이 났다. 지금은 화창한 날씨와 어울려 반짝이는 작은 휴양도시다. 특히 남쪽에 일직선으로 뻗은 널찍한 해안 부두가 일품이다. 두꺼운 성벽은 일부만 남았고 중세풍 건물들이 노출된 해변 광장이 되었다. 200미터 넘는 긴 콘크리트 해변 광장에 일렬로 야자수를 심었다. 트로기르 홍보 사진마다 나오는 광경인데, 길어서 그런지 조그만 구시가가 커 보이는 효과가 있다.  


트로기르는 아직 체계적인 관광 시스템이 갖추어져 있지는 않다. 내부에 별 것 없어 보이는 성채 앞에서 현금으로만 입장료를 받고 있었다. 구시가 전체가 유네스코 유산이 되면서 복구는 많이 했지만 관리 시스템은 아직 아닌 것 같았다. 중심 광장에 자리 잡은 성 로렌스(San Lorenzo) 성당의 첨탑을 올라가 보려고 성당 입장료를 내려니 여기도 현금밖에 안 된단다. 가지고 있던 크로아티아 쿠나를 다 동원했는데 두 명 값밖에 안됐다. 난처한 표정을 잠깐 지었더니, 아저씨가 그냥 셋 다 들어가라고 끄덕이며 표를 주었다. 스플리트가 테마파크 같다면 여기는 좀 시골 유원지 같다. 시골 인심(?) 덕분에 2인분만 내고 셋이 첨탑을 올랐다. 주황색 지붕이 빽빽한 구시가 주변의 바다는 강처럼 보인다. 육지 쪽으로는 주황색 지붕 동네가 더 이어지고, 반대편 섬 쪽으로는 좀 더 넓은 강 같은 바다 너머 섬의 구릉이 보인다. 요트와 보트가 많이 다니는 길목이라 바다도 분주해 보였다.

트로기르 중앙 광장의 로렌스 성당, 포디움의 달마티안 중창단, 그리고 베네치아 스타일(?) 사자 조각
트로기르의 자그마한 중앙 광장

중앙 광장은 작지만 성당, 수도원, 관공서가 면해 있고 이탈리아 중세 도시처럼 직사각형 포디움도 있다. 천정이 있는 포디움은 땡볕을 피하는 널찍한 정자 역할을 한다. 거기도 소리 울림이 좀 있어서, 스플리트처럼 달마티아 포크송을 부르는 아카펠라 그룹이 공연을 하며 시디를 팔고 있었다. 그늘에서 쉬면서 듣기는 좋았지만 스플리트 로마 황궁 현관의 돔 천정 아래보다는 소리가 덜 울려서 시디를 사고 싶을 정도는 아니었다. 물론 광장 전체에 파라솔을 깔고 카페들이 영업 중이다. 카페에서 간단히 요기를 하고 아드리아 해안과 작별을 했다.


오후 일정은 크로아티아의 수도 자그레브까지 가는 장거리 내륙 운전이었다. 자그레브는 동북쪽 내륙 깊숙이 위치해 있다. 운전만 네 시간이 걸리는 산지의 고속도로를 달려야 나온다. 이제 33일 여행의 마지막 순서가 될 프랑스 북부 노르망디 해안에 닿기 전까지 바다 경치는 없다.


수도 자그레브는 아드리아 해안의 유서 깊은 고대나 중세 항구들에 비해 역사도 짧고 경치가 유명하지도 않다. 해변의 중세풍 휴양도시에 익숙해진 관광객의 눈에는 좀 재미없어 보인다. 비행기로 드나드는 대부분의 한국 관광객에게 자그레브는 크로아티아 여행의 시작과 끝이다. 하지만 길게 머무는 경우는 별로 없다고 한다. 자동차로 움직이는 우리 가족에게도 자그레브는 그냥 경유지였다. 스플리트(트로기르)에서 네 시간 걸리고, 다시 슬로베니아를 거쳐 오스트리아 비엔나까지 네 시간이 걸리는 그 중간에 자그레브가 있었다. 잠깐씩 쉬느라 5시간 가까이 걸려 자그레브의 에어비앤비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저녁때였다. 어스름이 깔린 구시가를 향해 저녁이나 먹자며 슬슬 나갔다. 우리도 여유 있고 게으른 저녁을 즐기며 크로아티아를 마무리하자면서. 오산이었다. 처음 온 도시에서 구경도 안 하고 휴식만 하는 건 우리 가족에게 어울리지 않는 거였다.

자그레브의 중심 반 옐라지치 광장의 저녁은 월드컵 행사로 분주했다.

식당 검색을 하다가 자그레브 구시가 주요 관광 스폿 지도가 걸려들었다. 몇 개 없고 서로 멀리 떨어져 있었다면 미련 없이 넘겨버렸을 것이다. 그런데 '구시가'라고 불리는 면적이 아주 좁았다. 볼거리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골목 몇 개만 걸어 다니면 한 시간 안에 다 볼 것 같았다. 어느새 지도 상 루트의 기점을 향해 발맞춰 움직이고 있었다. 기점은 다름 아닌 반 옐라지치 광장이다. 가로로 긴 광장의 북쪽이 중근세의 구시가, 남쪽은 근대 이후 확장된 신시가지다. 광장 한가운데 위풍당당한 반 옐라지치 씨의 기마상이 서있다. 반 옐라지치는 근대 크로아티아의 민족 영웅이라고 한다. 19세기 중반 크로아티아 장군이자 정치가로,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왕가 사이에서 크로아티아의 자치를 확보하려 노력한 인물이었다. 농노제 철폐 같은 업적도 있고 자그레브의 도시 발전에 공헌한 사람인데, 매우 정치적인 인물이라 평가는 갈리는 모양이다. 오늘 그 기마상은 러시아 월드컵에 밀려 잘 눈에 띄지 않는 신세였다. 러시아의 경기가 있는 날이었는데 러시아 단체들이 제대로 잔치를 벌인 것 같았다. 민속공연도 하고, 각종 천막과 무대, 대형 스크린이 설치되어 있었다. 그나마 크로아티아의 경기가 있는 날이 아니어서 광장에 발이라도 디딜 수 있었던 것 같다.


광장을 출발해서 먼저 자그레브 대성당 앞으로 갔다. 서향이라 저녁 햇빛을 정면으로 받은 대성당은 눈이 부셨다. 성당 앞 기둥 위에 서서 성당을 바라보고 있는 황금 마리아상의 뒷모습도 번쩍거렸지만, 외관 보수와 청소를 한 지 얼마 안 된 게 분명한 성당이 더 빛났다. 뾰족한 고딕 성당 한쪽 첨탑은 계속 보수 중이었다. 마침 저녁 미사가 진행 중이던 내부도 깔끔했고 현대적인 마감과 장식도 꽤 보인다. 유적으로 보존하기보다는 계속 고쳐가며 사용하는 성당의 모습이다. 성당 옆 옛 담벼락 일부에는 1880년 지진 때 추락했다는 첨탑 꼭대기 부분과 그때 멈춘 성당 시계를 전시해 놓고 있었다. 몽골의 침략, 오스만 튀르크의 침략 등 여러 차례 무너진 대성당의 지금 모습은 17세기 이후에 개축한 것이다. 진짜 중세 자그레브를 기억하는 유적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자그레브 대성당과 중세 성문으로 남아있는 'Stone Gate'
레고 같은 타일 지붕으로 유명한 성 마가 성당

생각보다 언덕이 심한 구시가 동쪽으로 건너가는 길에 '돌문(Stone Gate)'이라는 중세 성문이 하나 남아 있었다. 13세기부터 있었다고 추정하는데, 원래 성벽 구조가 어땠는지는 알 수 없고 오르막 골목에 아치처럼 갑자기 나타난다. 그 와중에 작은 내부 공간은 성모 마리아에게 헌정된 채플이 되었다. 화재에서 살아남았다는 전설 같은 성모자 그림이 있어서, 촛불 켜고 기도하고 맹세하는 공간이 되었다고 한다. 우리가 지나가는 시간에도 기도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 문을 지나 올라간 골목에 자그레브 대성당보다 더 유명한 성 마가(St. Mark's) 성당이 있었다. 연대도 더 오래되어서 13세기부터 있었다고 하지만, 숱한 재건축과 레노베이션으로 겉에서 보면 완전히 새 건물이다. 레고를 연상시키는 컬러풀한 국가와 도시의 문장의 타일 지붕이 유명하다. 빨강, 파랑, 하양, 검정이 섞인 타일 작품은 19세기 말의 대대적인 보수 때 추가된 것이라고 한다. 역사는 길지만 지금 보이는 모습은 현대적 감각의 합작품인 셈이다. 내부는 너무 늦어서 들어가 보지 못했는데 왠지 티 없이 깔끔할 것 같았다.


성 마가 성당에서 길게 뻗은 골목을 내려오다가 니콜라 테슬라의 이름이 쓰여있는 집도 보았다. 그러고 보니 전기 천재 테슬라가 크로아티아 출신 이민자였다. 성당, 정교회, 수도원 등이 계속 이어진 언덕 위의 자그레브 구시가는 어느새 어둑어둑해졌고, 그때 영화처럼 가스등을 켜고 다니는 아저씨가 등장했다. 전기 천재가 살았던 오래된 동네의 저녁은 멀쩡한 전기 놔두고 근대 초기 버전으로 가스등을 켜서 분위기를 내고 있었다. 6월 말의 기나긴 저녁 햇빛 덕분에 한 시간 넘게 구시가를 누볐는데도 아직 밝았다. 언덕 내려오는 길에 대성당과 정교회, 시가지가 내려다보이는 전망까지 즐겼다. 언덕 아래의 자그레브는 가스등의 고즈넉한 분위기와는 딴판이다. 월드컵 경기를 즐기는 젊은이들이 골목마다 가득했다. 크로아티아 여행을 시작하거나 끝내는 중일 듯한 한국 젊은이들도 종종 보였다. 우리 가족도 젊음이 넘치는 거리 어딘가에서 축구를 흘깃거리며 늦은 저녁을 먹었다. 아빠는 어느새 진심으로 크로아티아를 응원하셨다. 끝까지 열심히 돌아다닌 크로아티아 일정을 마무리하며, 한국의 2002년처럼 크로아티아의 월드컵 선전을 기원했다. 결과적으로 한국의 2002년보다도 더 잘해서 준우승을 했는데, 거기 잠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도 진심으로 축하하는 마음이 들었다.

니콜라 테슬라의 집(생가) 표시와 가스등을 켜고 다니던 아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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