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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유리 Jan 22. 2019

쇤브룬 궁전 정원에서 비바람 맞기

20일: 오스트리아 비엔나, 쇤브룬 궁전

17년 전 대학 시절 유럽 배낭여행을 할 때 비엔나에 들렀었다. 오전에 도착해서 반나절 머물고 오후에 기차로 또 이동했다. 비엔나 시내에서는 '비엔나커피'만 한 잔 먹고, 나머지 시간의 상당 부분을 쇤브룬 궁전에 투자했었다. 노란색 궁전이 너무 예뻤다. 햇빛에 화사하게 빛나서 '소녀 감성'을 자극했다. 그 후에 본 파리의 베르사유 궁이 별 감흥이 없을 정도였다. 베르사유 궁은 너무 커서 전체적인 조화가 그려지지 않았다. 쇤브룬 궁전은 지나치게 크지도 않고 우아해 보여서 마음에 들었다. 그 기억을 다시 확인하고 싶었다. 이번에도 비엔나를 샅샅이 볼 시간은 없었다. 2박 머물며 궁전 위주로 보자고 하고, 도착하면서 쇤브룬을 먼저 가기로 했다. 숙소에 도착하기도 전에 쇤브룬부터 들렀다. 6월 마지막 주이니 이제 유럽 전체에 화창한 여름 하늘이 보장될 줄 알았다.


크로아티아를 출발했을 때는 화창했다. 발칸의 저렴한 물가를 끝까지 누리기 위해서 자그레브 재래시장인 돌라치 시장에서 과일을 사서 싣고 비엔나로 향했다. 슬로베니아를 다시 통과하기 때문에 슬로베니아 비넷 기간을 넉넉하게 사 두었었다. 오스트리아 국경 직전에 다시 오스트리아 비넷을 사서 붙였다. 비넷은 살 때마다 억울하다. 왜 하루나 이틀짜리 '통과용' 비넷은 없는 것인가. 휴게소에서 점심을 먹어 가며 네 시간 넘게 달리는데 하늘에 구름이 조금씩 늘어났다. 쇤브룬 궁전 주차장에 도착했을 때까지는 아직 구름보다 하늘색이 더 많이 보였다. 약간 흐릿한 햇빛이었지만 무난한 오후 날씨였다. 바람막이 잠바도 우산도 모두 차에 놔두고 유난히 가벼운 옷차림으로 내렸다. 왜 그랬을까.

쇤브룬 궁전 전경

쇤브룬 궁전은 17년 전과 별로 달라질 게 없을 테고, 내 키가 더 자란 것도 아니건만 궁전은 좀 작아진 듯 보였다. 노란 궁전 색깔은 여전했다. 이때까지는 해가 비쳐서 기억 속의 노란 궁전이 그대로 보였다. 내부 촬영 금지인 것도 여전했다. 왕가의 사냥터로 시작했다는 궁전은 점점 확장돼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내내 황실의 여름 궁전으로 쓰였다. 오래된 궁전이니 다양한 사람들이 거쳐 갔지만 관광객들의 관심사는 마리아 테레지아와 엘리자벳 두 사람의 사생활이다. 오디오 가이드로 둘러볼 수 있고 한국어도 있다. 이왕 온 김에 전부 둘러보는 확장형 옵션을 선택했다. 핵심적인 방들은 기본형만 해도 다 포함되어 있다. 궁전 인테리어에 특별한 관심 있는 게 아니라면 기본형만 봐도 될 듯하다.


오스트리아 제국의 전성기를 구가한 마리아 테레지아가 당연히 주인공이다. 남편과 사이도 좋았고 아이도 많이 낳았기에 궁전도 바빴을 것이다. 곳곳에 그 가족의 이야기가 많이 반영되어 있다. 여황제의 취향에 맞게 궁전과 정원도 계속 확장되었고 모양이 갖추어졌다. 색깔이 노란색이 된 것도 그때쯤이라고 한다. 남편 사후에 긴 세월 동안 검은 옷만 입었다는 여황제의 취향은 별로 사치스러운 편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물론 궁전의 현재 모습은 맨 마지막 주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이미 수명이 다한 제국을 20세기 초까지 버틴 프란츠 요제프 황제와 엘리자벳 황후다. 황제는 이 궁전에서 태어났고 여기서 죽었으니 그의 이야기가 더 많아야 될 것 같지만, 이야기의 주인공은 황후다. 시시(Sisi)라는 애칭으로 불린 황후는 뛰어난 미모로 대중적인 스타가 되었다. 부부 사이는 별로여서 외롭고 불행했다고 한다. 아들인 루돌프 황태자가 먼저 자살했고, 시시 황후도 노년에 암살을 당하는 드라마틱한 결말이었다. 그래서 관광객의 관심을 한 몸에 받는다. 취향은 훨씬 화려한 편이었다. 남아있는 방들의 인테리어나 가구, 장신구, 소품 등등 그녀의 취향을 반영해서 보존하고 있다.

서서히 불어오는 비바람에 덮여 가는 쇤브룬 궁전 후원

한국어로 나오는 오디오 가이드를 다 듣느라 내부 관람에 시간이 많이 걸렸다. 후원 쪽의 카페에 잠깐 앉았는데, 날씨가 심상치 않았다. 이미 관람 중에 비가 한 번 지나간 모양이었다. 궁전 구경의 핵심은 정원인데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저 멀리 더 시커먼 구름이 몰려오는 게 보였다. 정원을 포기할까 하다가, 진짜 검은 구름이 뒤덮기 전에 빨리 가서 언덕 위 독수리 정자만 보고 오기로 했다. 글로리에떼(Gloriette)라고 불리는 언덕 위의 직사각형 정자는 전망대이자 파티 플레이스다. 월계관을 물고 있는 독수리 조각을 이마에 붙이고 있다. 궁전 후원 저편의 야트막한 언덕 위에 있는데, 걷다 보니 만만한 거리가 아니었다. 좀처럼 독수리 정자가 가까워지지 않았다. 멀리서 낮아 보였던 언덕은 점점 높아졌다. 결국 언덕 아래 넵튠 분수도 못 가서 비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쇤브룬 궁전 후원은 양 옆으로 나무도 많고 다양한 개별 정원이 있다고 안내문에 나와있다. 춥고 어두워지고 있어서 양 옆 정원의 존재는 잊었다. 오로지 언덕 위 독수리 정자로 직진했다. 그런데 이 중앙 길은 나무도 없고 잔디 화단만 있어서 비를 피할 수 없다. 독수리 정자 언덕은 지그재그 길을 만들었는데 비를 피할 차단물이 전혀 없다. 경사면을 완화해주는 지그재그 오르막은 비를 더 많이 맞게 할 뿐이었다. 결국 길을 벗어나 숲 쪽의 이면도로를 의지하여 겨우 올랐다. 독수리 정자는 양 옆으로 회랑이 있고 가운데 유리창으로 막힌 내부가 있다. 지금은 그 안이 카페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대관 행사가 있는지 문을 닫고 행사 준비 중이었다. 따뜻한 커피 한잔 마시지도 못하고 회랑에서 어정쩡하게 비를 피하며 전망만 구경했다.

최고의 전망대이기는 했던 독수리 정자. 단지 너무 추웠다.

우리처럼 날을 잘못 만나 비에 젖은 관광객들이 회랑에 모여 서서 오들오들 떨고 있는 상황은 좀 우습기도 했다. 그래도 안개가 끼거나 구름이 전망이 가리지는 않았다며, 다행이라며, 상황을 즐기려고 애쓰고 있었다. 카페 안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다시 내려가자니 억울했다. 이미 젖었고 여기서 더 추워질 것도 없다는 생각, 온 김에 할 건 다 하자는 오기가 들었다. 비가 조금 잦아든 틈을 타서 독수리 정자 옥상에 올라가는 입구를 찾아내 추가 표를 샀다. 이 날씨에 여기까지 올라오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한 팀 있다가 내려가고 나니 우리뿐이다. 고맙게도 비가 조금 오래 참아주었다. 구름 아래 착 가라앉은 쇤브룬 궁전과 비엔나 시내 전경을 벌벌 떨며 실컷 보았다.


하늘이 더 시커메지면서 그야말로 비바람이 시작되었다. 급히 하산을 했다. 쇤브룬 정원 출구가 아득했다. 탁 트인 정원에서 최대한 비를 피해 보겠다며 숲 쪽으로 바짝 붙어 출구를 향해 종종걸음을 쳤다. 나오는 길에 예쁘게 꾸민 작은 정원들을 지나친 것 같지만 의식할 여유조차 없었다. 중간에 바람막이 잠바와 우산으로 무장한 한국인 아주머니를 만났다. 얇게 입고 비바람 속에 필사적으로 움직이던 우리 가족에게 '아유 건강하시네요'라는 웃지 못할 인사말을 하셨다. 겨우 도착한 에어비앤비 주인은 '왜 나쁜 날씨를 몰고 왔냐, 어제까지 환상적이었는데'라는 더욱 웃지 못할 농담을 했다. 다행히 비엔나의 에어비앤비는 이번 여행 에어비앤비 중에 최고였다. 따뜻하게 샤워하고 푹 쉰 덕에 온 가족이 감기는 면했다. 날씨도 다 여행의 일부라지만, 어느 정도 예측하고 그에 맞게 일정을 짤 경우다. 드넓은 궁전 정원에서 만나는 비바람은 아무리 좋게 생각하려 해도 무리다. 그때 그 시절 집주인들도 비 오는 날 정원 언덕에 오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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