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율하 Jun 08. 2024

37살의 나는 꽤 근사할 줄 알았지

데니오빠랑 결혼 할 줄 알았던 과거의 나

파란 하늘 하늘색 풍선은 우리 맘속에 영원할 거야~ 너희들의 그 예쁜 마음을 우리가 항상 기억할 거야. 하나둘셋 안녕하세요. god입니다.


드라마 ‘응답하라 1997’에서 H.O.T에 열광하는 여자주인공이 나온다. 거의 매 회에 하얀 풍선을 들고 있다. 승호부인이라고 부른다. 방송국에서 아빠한테 뒷덜미를 잡혀가던 모습을 보면서 남 일 같지가 않았다. 

© siora18, 출처 Unsplash


나는 2000년대 god (요즘 소위 말하는)덕후였다. 학교가 끝나면 버스를 타고 여의도에 있는 방송국에 갔다. ‘우리 오빠들’ 얼굴을 한 번이라도 더 보려고 말이다. 학원을 빼먹고 지방까지 기차를 타고 내려가는 건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중학생이었던 나는 직장인 팬들이 참 부러웠다. 추운 날 길거리에서 오들오들 떨면서 줄을 기다렸지만 어른 팬들에겐 따뜻한 차가 있었다. KBS 로비에 있는 카페에서 ‘우리 오빠들’을 기다린 적이 있다. 나는 아끼고 아낀 용돈으로 4천원짜리 커피를 겨우 한 잔 시켰다. 하지만 어른 팬들은 샌드위치와 이것저것 여유롭게 주문하고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어린 나에게 부모님, 선생님을 제외하고 가장 멋진 어른의 모습은 저 때가 제일 처음이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하면 기껏해야 20대 초중반쯤 되었을 그 어른 팬들이 그땐 왜 그렇게 커 보였는지 모르겠다. 나도 어른이 돼서 돈을 많이 벌면 그 당시 ‘우리 오빠들’ 에게 선물도 더 좋은 걸 사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지방 공연도 다니면서 더 열정적으로 덕질을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런데 그 시절이 이렇게 흑역사로 남게 될 줄이야. 그렇게 막연히 어른이 된다는 건 하고 싶은 걸 여유롭게 할 수 있게 되는 일 이라고 생각했다.

© peterplashkin, 출처 Unsplash

고등학교 1학년 때 첫 담임선생님인 O 선생님은 세계 지리 담당이셨다. 선생님은 대학 졸업 후 바로 임용고시에 합격했다. 우리 반은 선생님이 그렇게 맡게 된 첫 제자였다. 당시 여름방학 때 O 선생님은 유럽으로 배낭여행을 떠났다. 배낭여행 중 반 학생 모두에게 엽서를 써서 보내주셨다. 그리고 우리는 방학 기간 중에 그 엽서를 받게 됐다. 내 것은 선생님이 파리에서 테제베를 탄 후 쓴 엽서였다. 그 의미 있는 선물을 받고 언젠가 떠날 유럽여행을 꿈꿨다. 그런 선생님의 모습은 너무나 어른스러웠다. 내게 세계여행을 꿈꾸게 만들어 준 O 선생님은 당시 25살이었다.


20살 대학교 신입생 시절 개강총회에서는 복학생 오빠들이 있었다. 고 학번 선배들은 막 군대에서 전역하고 복학한 후배들을 예비군 냄새가 난다며 놀려댔다. 그리고 우리 신입생들에게는 복학생 선배들에게 맛있는 밥을 많이 얻어먹으라고 했다. 신입생 때는 지갑을 여는 게 아니라고 조언 비스무리 한 것들도 해줬다. 그 때는 복학생 오빠들이 얼마나 커 보였는지 모른다. 괜히 행동도 어른스러워 보였다. 똑같이 술을 먹고 장난을 쳐도 20살 동기들과는 다르게 확실한 무게감이 있었다. 그런 어른스러운 모습에 호감을 느끼고 복학생 선배와 신입생이 CC가 되는 경우가 흔했던 것 같다. 하지만 곱씹어보면 그 복학생 선배들의 나이는 기껏해야 스물셋, 넷 정도 되는 꼬꼬마였다.


 내가 커다란 나무처럼 근사한 어른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은 모두 기껏해야20대 중후반이었다. 내 과거 속 기억 어디에도 37살의 어른은 없었다. 요즘 티비 속 드라마에서 그럴듯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의 나이가 나보다 어리거나 비슷하게 설정된다. 그걸 보면서 내가 나이를 적당히 먹었다는 걸 깨닫는다. 37살이면 정말 멋있는 어른이 되어 있을 줄 알았다. 삶의 여유를 즐기면서 하고 싶은 것들을 마음껏 하는 삶을 살고 있을 줄 알았지. 


직장인들이 목에 메고 있는 사원증이 대단한 커리어를 증명하는 증명서 같았다. 예쁜 옷과 구두를 신은 직장인들 모습을 보면서 나도 저 안에 언젠가 속하게 될 거라는 부푼 꿈을 꾸었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나오는 ‘대리님’이라는 단어가 얼마나 멋있는 단어로 들렸는지 모른다. 현실에 나와 보니 이상과 현실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37살의 나이는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나는 결혼은 했지만 아이가 아직 없는데 동창 중에는 벌써 아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는 경우도 있다. 또 아직 결혼하지 않은 친구도 있다. 과거에는 어떤 기준에 맞춰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경계가 무너지면서 다양한 삶의 모습들이 사회를 이룬다. 삶에 정답은 없지만 내 나이 정도가 되면 어느 정도의 기준을 두게 된다.  자산규모와 사회적 지위, 회사에서 인정 등 말이다. 나는 지금 내가 세운 그 기준에서 어느 정도 위치에 있는 것일까?


© the5th, 출처 Unsplash

 현실의 나는 지극히 평범하다. 아침에 일어나서 운동하러 갔다가 늘 같은 시간 마을버스를 타고 회사로 향한다. 3번 출구로 나와서 10분 정도 걸으면 회사에 도착한다. 그렇게 9시간 동안 회사에서 열심히 일을 하고 퇴근한다. 앞서 말했듯 내가 꿈꾸던 삶이 무엇인지 단정적으로 표현하기는 어렵지만 이런 보통의 직장인은 아니었던 것 같다. 나는 내 37살이 꽤 멋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단조롭고 또 평범하다. 나 역시 수십만 명의 사람들이 겪고 있는 출근과 퇴근 그리고 업무의 일상을 똑같이 살아가고 있다. 이렇게 평범한 보통의 삶을 살 줄 알았다면 과거에도 그냥 적당히 살 걸 그랬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