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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림 Apr 28. 2021

시선

셋, 책일기

친구들, 우리는 날마다 문자를 나누는데 어쩜 이렇게 날마다 보고 싶을까요? 보고 싶다고, 언젠가 다시 만나는 날을 기원한다고 말했던 팅팅님의 지난 일기가 기억에 남아요. 보고 싶어요 저도!!


우리처럼 글을, 문자를 사랑한 여인이 있었어요. 정세랑 작가님의 소설 <시선으로부터>의 주인공 심시선 여사요.

할머니는 욕도 표현의 일종이라고, 다만 정확하고 폭발력 있게 욕을 써야 한다고 말했었다.  -p183    

신선하지 않아요? 욕도 표현의 일종이라며 제대로 써야 한다고 하는 그녀의 시선이. 심시선은 먹고살기 위해 글을 썼다고 하지만 제 생각에 그녀는 글쟁이로 타고난 사람이에요.

  

사실 <시선으로부터>를 처음 펼쳤을 땐 좀 실망을 했어요. 그동안 제가 사랑했던 정세랑 표 SF 소설이 아니라서요. 그런데 늘 얘기하듯 저는 책 읽는 속도가 느린 탓에 한 번 읽은 책에 두 번 손을 뻗기란 고된 작업과도 같은 수순인데 글쎄 제가 결코 얇지 않은 이 책을 두 번이나 읽었어요. 심시선에게 빠져서요!

 

심시선은 그 시대의 여성들과는 다른, 깨어있는 여성이었어요. 제사 문화는 전통문화라고는 하나 요즘 같은 세상에 형식만 남고 마음이 사라지면 고생뿐이라며 없어져야 할 관습이라고 얘기했고, 해외 유학을 했던 이력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결혼을 세 번이나 하고 그 와중에 남편의 전처가 낳은 아이까지 직접 키우면서도 솔직하게, 숨김없이, 그리고 부끄러워하지 않고 자신을 이야기했어요. 덕분에 심시선의 2세, 3세들도 구김 없이 자랐고 소설의 한 대목에서도 말했듯 '시선으로 부터 뻗어 나온 가족들'은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지지 않고 꺾이지 않'죠. 읽는 내내 시선의 가족들이 시선의 뿌리가 맞구나 충분히 느낄 수 있었어요.

     

가족들은 시선의 십 주기를 앞두고 생전에 심시선의 발자취가 남아 있는 하와이로 다 함께 날아가 각자의 방식으로 각자의 추억 속의 심시선을 회상해요. 그림 하나 없이 오로지 글로 그들을 만나면서도 그들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눈에 그려지는 것 같아서 연신 흐뭇한 미소가 피어올랐어요. 문득 시선의 가족들 모습을 시선이 제 안에 들어와 지켜보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기도 했어요. 또 울트라 스펙터클한 사건 하나 없이도 인물들의 감정과 하와이의 분위기를 세세하게 묘사하는 정세랑 작가님의 필력이 정말 마음에 들었어요.

 

또 한번은 그런 일이 있었다. (...) 누가 시선에게 정수기를 팔러왔다. 태호는 시선의 지인을 전부 아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 사람이 자주 보험을, 다단계 회사의 치약을, 온갖 쓸모없는 물건들을 팔러 온다는 걸 알았다. (...) “아니, 장모님, 척 봐도 장모님을 이용하는 거잖아요? 훨씬 좋은 정수기가 세상에 쌔고 쌨는데요.” (...) “저이는 정수기가 정말 좋은 물건이라고 생각하고, 매번 좋은 물건을 나에게 챙겨준다고 생각하고 있어. 그렇게 생각하게 두는것도 괜찮지.”  -p271-272

심시선은 그런 사람이었어요.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는 사람. 순하고 무결한 사람을 본능적으로 알아챌 수 있고, 악의의 냄새가 나지 않는 사람을 기꺼이 보듬어줄 줄 아는 사람. 저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어요. 훗날 할머니가 되었을 때 작은 것에 동동대지 않고 무거운 순간에도 부드러운 미소를 잃지 않는 넉넉함을 가진 사람이 되고 싶어요. 한때는 그런 사람은 경제적으로 풍요롭거나 사회적으로 지위가 높은 사람만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흔히 말하는 가진 자의 여유랄까요. 그런데 그건 꼭 물질적인 것에서 비롯되는 건 아닌 것 같더라고요. 주변을 조금만 둘러봐도 나보다 월등하게 많이 가진 사람들이 더한 욕심에 뒤덮여있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잖아요. 중요한 건 물질적인 풍요가 아니라 마음의 풍요라는 걸 깨우치고 있답니다.

  

만약 당신이 어떤 일에 뛰어난 것 같은데 얼마 동안 해보니 질린다면, 그 일은 하지 않는 것이 낫다. 당장 뛰어난 것 같지는 않지만 하고 하고 또 해도 질리지 않는다면, 그것은 시도해볼 만하다.  -p289

우리에겐 글이란 것이 그런 것 같아요. 해도 해도 질리지 않아서 우리는 매일매일 글을 쓰잖아요. 정세랑 작가님은 작가의 말 말미에 “존재한 적 없었던 심시선처럼 죽는 날까지 쓰겠다.”라고 했어요. 정세랑 작가님도 글을 쓰고 쓰고 또 써도 질리지 않나 봐요. 우리와 정세랑 작가님의 공통점을 발견했네요? 후후. 우리도 심시선처럼 평생을 애벌레처럼 읽고, 애벌레처럼 쓰는 사람이 되기로 해요.  


-리밍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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