셋, 책일기
리밍 님의 일기를 읽고 생각해보니 그러네요. 먼 미래에 어떤 할머니가 되고 싶은지 생각해보니, 오늘을 어떤 태도로 살아낼지가 그려지는 것 같아요. 리밍 님이 언제나 침착하고 초연한 태도와 베푸는 너른 마음을 보여주시는 이유는, 작은 것에 동동대지 않고 무거운 순간에도 부드러운 미소를 잃지 않는, 그런 너른 풍요를 가진 할머니를 목표로 하시기 때문일까요?
우리들은 운명이 분명하다고 또 느껴요! 저도 어제 윤여정 님의 수상 소감을 들으면서, 언젠가 은퇴하신 엄마한테 추천해드린 <<시선으로부터>>를 계속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윤여정 님이 정말 심시선 여사님 실사판 같지 않나요...?! 정말 멋진 할머니 이야기라고 흥분해서 엄마한테 추천했지만, 엄마의 흥미를 일으키지는 못했나 봐요. 책은 몇 주째 거실 테이블 위를 지키고 있거든요. ‘엄마는 멋진 할머니에 관심 없어, 칫’이라고 답하셨던 걸로 기억이 나요. 그런데 이번에 윤여정 님의 수상소감과 명언을 함께 읽고서, 엄마는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시더니 말씀하셨어요.
아씨, 엄마도 뭐라도 해야 하는데.
나, 지금이라도 뭐 좀 해봐야 하는데.
지나가던 자동차의 헤드라이트가 그 꽃을 비추는 순간 그것이 살면서 본 가장 아름다운 흰색이란 걸 깨달았습니다. 빛날 준비가 되어 있어서 거의 스스로 빛나는 것처럼 보이는 그런 흰색요. 그것을 칠십대에야 깨달았으니, 늦어도 엄청 늦은 거지요. 여전히 깨닫지 못한 게 너무 많다는 생각이 듭니다. -280
엄마는 육 남매 중 셋째, 딸 중에서는 둘째로 태어나셨어요. 여자라서 숨죽여야만 했던 어린 시절에는 매일 ‘왜 살지, 그냥 안 살았다면 좋았을 텐데.’라고 생각하셨다고 해요. 엄마가 18살이 되던 해, 외할머니가 불치병에 걸리셨고 3년간의 투병 생활 끝에 돌아가셨어요. 그 후 엄마는 집에서 멀어지고 싶은 마음에 대전을 떠나 서울에서 바로 일을 시작하셨지요. 27살을 2달 남겨놓은 10월, 노처녀 딱지를 피하기 위해서 당시에 만나던 남자와 결혼을 했고, 이듬해 저를 낳으셨어요.
그러니까 엄마는,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어떤 사람이고 싶은지, 어떤 할머니가 되어 늙어갈 것인지, 돌아볼 수가 없었어요. 그럴 시간 없이 억눌린 채로 숨 가쁘게 달려오신 거예요. 아무도 그런 생각을 해야 한다고 엄마에게 가르쳐주지 않았어요. 그런데 엄마는...... 제게 그런 것들을 어떻게 제게 가르쳐줄 수 있었을까요? 너무 신기해요.
사람들은 모두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가지죠. 엄마도 분명 그렇고요. 하지만 엄마가 품은 미래 시제의 주인공은 언제나, 저였어요. 엄마가 품은 과거 시제의 주인공은 언제나, 고생만하며 살다가 빨리 가버린 불쌍한 외할머니였고요. 엄마는 현재 시제의 주인공도 되지 못했어요. 스스로를 언제나, 헌신하고 받쳐주는 조연으로만 생각하셨거든요.
외할아버지의 치매가 심해진 작년 10월, 엄마는 20년간의 해외 생활을 정리하시고 한국에 돌아오셨어요. 온종일 대화가 안 통하는 노인과 시간을 보내려니, 엄마는 예전 기억을 들춰보신 모양이에요. “아부지, 그때 우리 그랬잖아요. 아부지, 그땐 우리한테 왜 그러셨어요. 아부지, 엄마가 참 불쌍하게 살다가 가셨어요. 아부지, 이렇게 살다 갈 걸 뭐 그렇게 악착같이 모았어요.” 뭐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엄마는 과거의 조각을 되찾으신 모양이에요.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엄마는 20년 만에 처음으로, 아니 어쩌면 난생처음으로, 해야 할 일이 아무것도 없는 그런 나날을 맞이하게 되었어요. 처음에는 많이 조급해하셨거든요. 막막해하시기도 했고, 침울해하시기도 했어요. 하지만 점점 적응을 하셨고, 주어진 일과를 소화해내는 일상이 아닌, 스스로 일과를 만들어가는 일상을 연습하고 계세요. 어쩐지 엄마가 현재를 자신의 것으로 만드신 것 같아서 마음이 들떠요.
그리고 요즘 나오는 멋진 노인들을 보면서, 엄마는 드디어 엄마의 미래를 그리게 된 거예요. 윤여정 배우님이나, 드라마로 만들어진 웹툰 나빌레라의 주인공 70대 발레리노, 그리고 그 발레리노 역할을 맡으며 첫 주연을 해보신다는 박인환 배우님 같은 멋진 노인들이요. 이제 늙었어, 라는 말을 달고 사시던 엄마였어요. "정말 백 세 시대가 맞다니까? 우린 백세 넘게 살 거야." 엄마가 어제 처음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사실 엄마는 최근까지 저의 미래를 강제하시려고 했어요. 무엇이 되어라. 누구를 만나라. 그런 것들이요.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니 저도 엄마를 닮아서, 엄마의 미래를 강제하려고 했던 것 같아요. 멋진 할머니가 되라느니. 꼰대가 되지 말라느니. '요즘 생각'을 엄마에게 주입하고 있었어요. 엄마가 되고 싶은 할머니의 모습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전혀 생각하지 않은 거예요.
매일 비슷한 날들이 지속되면 머릿속에 깃발 같은 것이 남지 않는다. 깃발이 항상 좋은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단편적인 이미지들만이 종종 떠오른다. 침엽수의 침엽이 말도 안 되게 통통해서, 그러면 침엽이 아니지 않은가 생각했던 그런 짧고 아무래도 좋은 순간들만이. 생생한 조각조각들이지만 그뿐이다. -201
매일 엄마와 함께 산책을 해요. 오늘은 불광천에서 오리가족을 만났는데, 수풀에서 엄마 오리가 꿱꿱 소리치니 수영하던 아가오리들이 하나둘씩 엄마 곁으로 모여들었어요. 엄마오리는 숫자를 헤아리는 듯하더니, 다섯 마리를 모두 확인하고 앞장서 걸었어요. 아가오리들은 그 뒤를 줄지어 따랐고요.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엄마랑 강아지랑 셋이서 넋을 놓고 바라본 거 있죠. (사실, 본인이 대형견인줄 아는 저희 3.2kg 강아지는 오리들을 사냥하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네요.)
어린이가 세상을 위해 자신의 의견을 웅변하고, 청년들이 자연의 미래를 위해 오늘날의 편리를 포기하며, 책임을 다한 노인들이 새로운 꿈을 꾸는 세상. 적어도 오늘은,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그런 세상처럼 보이네요. 그 모습이 비록 세상의 아주 작은 조각일지라도 말이에요.
엄마의 꿈 찾기는 이제 시작단계예요. 일단은 쭈글쭈글한 할머니가 되는 것을 일차 목표로 삼으신 것처럼 보여요. 요즘 주름을 펴는 시술이 얼마나 쉽고 빠르고 저렴한지 아시나요? 하지만 순간의 유혹을 이기지 못해서 시작해버리면, 한 번이 두 번되고, 두 번이 정기권이 되고, 그러다 보면 얼굴 이곳저곳이 부자연스럽게 빵빵해져서 표정을 잃게 된다고 엄마는 이야기하세요. 팽팽한 얼굴의 할머니가 아니라, 일생을 나타내는 우아한 주름을 가진 할머니가 되고 싶다고, 엄마는 말씀하세요. 하지만 거울을 볼 때마다 필러 이야기를 하시는 것을 보면, 엄마도 순간의 유혹으로부터 자유롭지는 못하신 모양이에요.
한 사람이 다른 개인을 위해 해 줄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는 것을 오늘 또 느껴요. 꿈을 찾아주는 일도, 이뤄주는 일도, 대신해줄 수 없잖아요. 아무리 사랑한다고 해도 말이죠.
하지만 단 한 가지 할 수 있는 게 있다면, 그저 함께하며 이야기를 듣는 것이겠지요. 머릿속에 깃발처럼 남을 단편적인 이미지를 함께 쌓아가는 것뿐이겠지요. 세상 곳곳에, 시간 곳곳에, 추억할 거리를 심어두는 것이요. 너무나 소소해서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지만, 한 사람의 세상을 송두리째 밝혀줄 만큼 위대한 일이라고 믿어요. 그러니 일단은, 최대한 많은 시간을 함께 해야겠어요.
엄마 이야기를 하니 너무 길어졌네요. 사실 밤을 새워 이야기를 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그만큼 엄마에게 맺힌 것도 많고, 그만큼 엄마가 너무 좋거든요. 사실 어떤 할머니가 되어도 좋으니, 오래오래 함께 했으면 좋겠어요. 여러분도 마찬가지겠지요?
<<시선으로부터>>를 통해 많은 이들이 심시선 할머니를 사랑하게 된 것처럼, 모든 사람이 우리 엄마를 사랑하게 될 엄마의 일대기를 언젠가 써내고 싶은,
영지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