셋, 책일기
친구들~ 저에게 고민이 하나 생겼어요. 들어주실래요?
지난 1년 5개월은 저에게 특별한 시간이었어요.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고, 내친김에 책도 한 권 펴냈고, 운 좋게 수필가가 되었어요. 그런데 지금 저는 갈 길을 잃고 헤매고 있어요. 글 쓰는 일과 제 글의 지향점이 뿌연 안갯속에 갇혀서 또렷하게 보이지가 않아요.
저는 수필가가 되었지만 소설가를 동경해요. 글을 쓴다면 소설가이길 바랐고, 글 쓰는 사람이 되어서도 여전히 소설가를 꿈꿔요. 수줍게 고백건대, 저는 쉽게 다가서지 못하는 소설 쓰는 일(사실은 운 조차 띄우지 못하고 있는 일)을 벌써 몇 편이나 쓰신 팅팅님과 에세이 보다 소설 쓰는 것이 편하다고 말씀하시는 영지님이 부럽고 존경스러워요. 그리고 수줍게 하나 더 고백하건대, 그런 두 분이 제 친구라는 게 제 어깨를 하늘로 승천하게 해요.
어떻게 하면 소설가가 될 수 있는지 궁금했어요. 소설과 수필은 장르만큼이나 쓰는 기법 또한 다르다고 들었거든요. 그래서 김연수 작가님이 쓰신 <소설가의 일>을 읽어봤어요. 김연수 작가님은 “일단 쓰라, 뭐라도 쓰라, 고민 말고 쓰라” 하시는데 저에게 소설을 쓰는 일은 몇 날 며칠을 고민해도 결국 단 한 줄도 쓰지 못하는 숙제예요. 영지님 말씀처럼 우리 글쟁이들은 영혼으로 일을 하는데, 좀처럼 속에 것을 꺼내지 못하니 영혼이 시들어가는 기분인 거 있죠?
이 삶이 멋진 이야기가 되려면 우리는 무기력에 젖은 세상에 맞서 그렇지 않다고 말해야만 한다. 단순히 다른 삶을 꿈꾸는 욕망만으로는 부족하다. 어떤 행동을 해야만 한다. 불안을 떠안고 타자기를 견디고 실패를 감수해야만 한다. 그러므로 지금 초고를 쓰기 위해 책상에 앉은 소설가에게 필요한 말은 더 많은 실패를 경험하자는 것이다. -p54
생각하지 말자. 구상하지 말자. 플롯을 짜지 말자. 캐릭터를 만들지 말자. 일단 한 문장이라도 쓰자. (...) 한심한 내용일지라도 글자수를 헤아릴 수 있다면 소설을 쓴 것이고, 제아무리 멋진 이야기기라도 헤아릴 글자가 없다면 소설을 쓴 게 아니다. -p199
저는 세상이 이렇게나 넓은데 간간이 여행을 떠나는 것 말고는 지금 살고 있는 마을을 벗어난 적이 거의 없어요. 학교도 직장도 친구들도 저와 가까운 마을 언저리에 있어요. 본격적으로 글을 쓰면서부터 다른 지역들을 일삼아 찾고 있지만 아직도 저의 울타리는 제가 사는 마을에 머물러 있어요. 글 쓰는 사람이 되고 저는 더 넓은 곳에서 더 많은 경험을 쌓지 못한 채 흘러버린 지난 시간들이 아까울 때가 많아요. 되도록 많은 사람들을 경험하고, 되도록 많은 곳들을 가보고, 되도록 많은 것들을 먹어봤으면 좋았을걸... 그랬다면 그 모든 것이 글감이 되고 영감이 되어 줄 수 있었을 텐데... 아마 다양한 활동을 하는 친구들이 글을 쓴다면 지금의 저보다 훨씬 더 생동감 넘치는 글을 쓸 수 있을 거예요. 어쩌면 이런 경험의 한계점들이 수필보다 상대적으로 창의성이 더 필요한 소설을 쓰는 데에 아쉬움을 주는 것 같아요.
지나간 세월을 후회해 봐야 뭐 하겠냐마는, 이렇게 저는 글 쓰는 일로 경험의 귀중함을 깨우쳤어요. 그래서 요즘 저는 뭐라도 하나라도 더 경험하려고 막 나대고, 막 다니고, 막 먹고(?), 막 쓰고 있어요. (막 써도 건질 문장은 없지만요.)
결국 인정해야만 하는 건 내가 아는 바가 없기 때문에 한 줄도 못 쓴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이 고통을 해결하고 싶다면 벽에다 머리를 박을 게 아니라 먼저 자신의 무지를 인정하고 자기 바깥의 삶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면 된다. (...) 자신이 잘 몰랐던 일들에 대해서 알아가는 재미를 느끼는 게 더 중요하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은 흥미롭고, 미처 몰랐던 인생의 의미를 발견하는 것은 뜻밖의 기쁨이다. 날마다 이 재미를 위해 시간을 내는 것. 그게 바로 소설가의 일이다. -p232
한 권의 책을 쓰고 얼마쯤 시간이 지나면서 마음이 다급해졌어요. 다음 책은 언제 나오냐는 질문에 머쓱해지고, 좀처럼 써 내려가지 못하는 소설이란 장르를 놓지 못하는 제 모습이 융통성 없는 글쟁이로 보였어요. 스스로의 한계를 마주하고 있기가 조금 힘이 드네요.
그런데 두 분 친구들과 글을 나누며 여러분도 저처럼 고민스러운 시간을 보내고 있고, 글 쓰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은 일임을 공감할 수 있게 되었어요. 함께 글을 쓰는 이 프로젝트가 아니었다면, 이런 우리의 네트워킹이 아니었다면 알 수 없었을 거예요. 이런 연결감 속에서 영감과 원동력을 얻을 수 있다는 게 감사해요.
소설가의 일생이란 그런 것이다. 그 일생 앞에서는 다작이라는 말도 무의미하고, 수면용 소설이라는 말도 무의미하다. 그저 어떤 시간의 흐름이 있을 뿐이다. 우리에게 자신이 경험한 시간의 흐름을 소설로 보여줄 수 있다면 결과적으로 그는 소설가가 된다. -p12
우리 너무 결과에 목 메지 말아요. 지금 우리가 고뇌하며 쓴 단 한 줄의 문장이 어떻게 쓰여진 건지, 어떤 과정으로 어떤 마음으로 쓰여진 건지 우리는 알잖아요. 지금처럼 경사스러울 땐 손바닥이 새빨개지도록 아낌없이 박수 쳐 주고, 넘어져 있으면 한 손씩 내밀어 양손을 잡아 일으켜 주기로 해요. 혼자 또 같이, 인생과 세상을 잘 헤쳐나가요 우리.
작가들은 잘 죽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작품만큼이나 그 작품을 쓰는 과정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작품과 작가는 동시에 쓰여진다. 작품이 완성되는 순간, 그 작가의 이부도 완성된다. 이 과정은 어떤 경우에도 무효화되지 않는다. 만약 국가가 한 작가의 작품을 모두 불태운다고 해도 그 작품을 쓰기 전으로 그를 되돌릴 수는 없다. 한 번이라도 공들여 작품을 완성해본 작가라면 그 어떤 비수에도 맞설 수 있는 힘의 원천을 안다. -p28
그런데 정말, 두 분은 어쩜 소설을 그렇게 잘 쓰세요? 저에게 노하우 전수를 좀...!!
리밍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