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구역 미친년은 나야!
BGM 거미-친구라도 될걸 그랬어
1.
눈부신 샹들리에, 눈이 닿는 곳마다 피어있는 생화 장식, 로맨틱한 조명. 예쁘게 차려입고 삼삼 오오 모여 웃음꽃을 피워내는 하객들로 가득 찬 이곳. 나는 지금 전남친의 결혼식에서 마이크를 들고 홀로 서 있다.
이제 누구도 나를 막을 수 없다. 마치 이 날을 위해 태어난 것처럼 인생 최대치의 용기를 끌어올리는 중이다. 신랑과 나의 히스토리를 모르는 하객들은 열렬한 환호를 보내고 있다.
심지어 저 쪽 정장을 입은 젊은 남자들은 의자를 박차고 일어났다. 다들 내 히트곡 '벚꽃처럼 당신이 온 순간'을 기대하는 눈치다. 신랑 얼굴은 먹구름이 피어나다 못해 거무스름한 곰팡이가 피어나는 것 같다.
어휴, 쫄보. 아직 시작도 안 했거든.
내가 올 줄은 꿈에도 몰랐을 동창 몇몇은 입을 막는다. 그야말로 뜨악. 쟤가 왜 여기 있대. 깽판이라도 칠 세라 걱정 반, 이런 쇼는 처음이라는 기대 반으로 나를 바라보는 것 같다.
옆에 있는 친구를 쿡 치며 수군대는 애들도 있다.
-야, 그래도 얼굴 알려진 가수인데 지 히트곡이나 부르고 가겠지.
난 속으로 대답한다. 응, 아니야.
처음엔 나도 전남친 결혼식을 가는 것도 막장인데 거기서 축가는 작정하고 미친 거지,라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오히려 꼭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처럼 경건하다. 그래, 나는 마지막까지 진실되고 우아할 거라고.
2.
사회자에게 사인을 넣자, 곧 반주가 거대한 예식장에 울리기 시작한다.
두 손으로 마이크를 다시 한번 꼭 잡는다. 반주가 나오자 내 18번을 아는 동창 친구들이 아연실색한다.
"미친년, 결국 저걸 부른다."
내 히트곡이 아닌 낯선 다른 가수의 곡에 고개를 갸웃하는 이들의 표정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노래는 시작됐고 나는 내 갈 길을 간다. 마치 내 노래처럼 자동반사적으로, 필사적으로 첫 소절을 내뱉는다.
"벌써 넌 내가 편하니, 웃으며 인사할 만큼"
구석에 있는 지영이가 활짝 웃으며 '잘해' 입으로 소곤거린다. 옆에서 민정이는 눈을 감고 '명가수다' 감탄하고 있다. 어휴, 역시 나보다 더 미친 내 친구들.
3.
까맣게 나를 잊었니 니곁에 있는 사람 소개할 만큼
견디긴 너무 힘든데 자꾸만 울고 싶은데 내 옆이 아닌 자리에 너를 보고 있는 게 왜 그게 행복한 걸까
눈을 감고 최대한 말하듯 가사를 불러본다. 상철이와 드럽게 끝나고 나서 나는 18번이었던 이 노래를 한 번도 부르지 않았다. 유명해지고 아무리 많은 팬들이 요청해도 이런저런 핑계로 피해 갈 정도로 내게는 더 이상 부를 수 없는 폭탄 곡이었다. '내 옆이 아닌 자리에 너를 보고 있는 게 왜 그게 행복한 걸까', '차라리 친구라도 될걸 그랬어' 이게 말이 되냐며 애꿎은 거미를 많이도 욕했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난 지금은 그 절절한 심정을 이해하며 한 소절 한 소절 최선을 다해 부르고 있다. 역시 인생은 어디로 흘러갈지 모르는 것. 그저 파도에 몸을 맡긴 채 잔잔하게 흘러가다 역풍을 맞기도 하고, 전남친 결혼식에서 축가를 부르기도 하고 뭐 그러는 것.
4.
친구라도 될 걸 그랬어 모두 다 잊고서
다른 사람 만나는 널 보아도 슬프지 않게
그저 바라보고 있었어 한참동안 니 옆에
그 사람까지도 잠시라도 더 보려고
다시 혹시라도 널 보게 되면
그땐 모르는 척해볼게
웃어도 볼게 지금의 너처럼
상철이와는 대학 동기로 만나 비밀 연애만 3년을 했다. 우연히 운 좋게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데뷔하고 나서도 수많은 유혹을 뿌리치며 2년을 더 만난 사이였다. 만났다고 하기도 안쓰러울 만큼 많이 지지고 볶으며 이어나간 오 년이었다. 내 스케줄은 점점 많아졌고 언제나 시간이 부족했다. 상철이는 나의 부재에 지쳐가다 결국 공개연애를 할 게 아니라면 그만 만나자고 선언했다. 이제 막 발돋움은 한 커리어에 공개 연애가 어떤 결과를 가져올 지 그는 뻔히 알면서도 선택을 요구했다. 결국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 소속사에 이야기했을 땐, 단칼에 광고 위약금을 책임질 수 있으면 그렇게 하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상철은 그 이후 단 한 번도 내게 연락하지 않았다. 처음엔 이별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오래된 연인이기 전에 우리는 대학 때부터 모든 시간을 함께 하던 절친이었으니까. 상철이가 없으면 나도 없는 것 같았으니까. 어떻게 나의 성공이 우리 이별로 이어질 수가 있는지 밥을 먹다가도 화가 났다. 그러다가도 퉁퉁 부은 눈으로 노래가사도 잊어 버릴만큼 힘들 때는 몇 번이나 찾아가 자존심 다 버리고 매달려 울기도 했다. 그는 날 잊고싶다고 말했다. 애인도 잃고, 절친도 잃고 어찌어찌 인사라도 하는 사이도 못 될 만큼. 그렇게 씁쓸한 엔딩이었다.
그리고 딱 3년 후, 내가 가수로서 정상에 오른 지금. 상철이는 서바이벌에서 나에게 일대일 코치를 받던 아이돌 연습생과 결혼한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기사를 읽는데 총알처럼 한 줄이 날아와 박힌다. 5년 동안 한결같은 사람? 5년 연애? 머리가 빙빙 돌았다. 우리가 헤어진 게 삼 년 전인데, 이게 무슨 일이야.
5.
눈감지 말고 보낼 걸 가는 널 꼭 지켜볼 걸
차가운 너의 걸음에 마지막 내 눈물도 묻혀서 보내버릴걸
헤어진 후에 나는 오래도록 후회했다. 원망하고 욕하며 사람을 떠나보낸 것. 그의 서운함에 진심으로 공감해주고 사과하지 못한 것. 결국 그렇게 남보다 못한 사이로 끝내 놓고 나는 보란 듯이 스타가 되어 여기저기 다 출연하며 그 사람을 괴롭힌 것. 그런데 나 혼자만의 애처로운 착각이었다. 상철이는 뒤에서는 아이돌 연습생과 썸을 타면서, 앞에서는 찌질하게 헤어지자 말 못 하고 공개 연애를 운운하며 나를 힘들게 했다. 처음에는 오 년이란 시간을 배신당했다는 모욕감에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풋풋했던 시절, 내 5년을 아낌없이 퍼부었던 사람이 이것밖에 안되나 막 눈물이 났다. 그러다 자리를 털고 일어나 정신을 차렸다. 혼자 방구석에 이러고 있으면 누가 알아주나 싶은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래서 축가를 수락한 것이다. 아무것도 모르게 활짝 웃으며 '선배님께 꼭 부탁드리고 싶었다'고 말하는 연습생에게 '시간 내보겠다'라고 한 것이다. 대신 신랑에게는 비밀로 하자며 앙큼한 조건을 걸고. 세상에서 가장 절절한 발라드를 불러주고 싶었다. 내가 데뷔하기 전에도 노래방만 가면 부르던 이 노래. 친구라도 될 걸 그랬다며 후회를 뒤로 한 채 연인을 보내 주는 노래. 너와 나만이 아는 이 곡을 부르며 등줄기가 서늘해질 정도로 아찔한 너의 표정을 보고 싶었다. 너는 알지, 내가 지금 무슨 심정으로 이 노랠 부르는지.
6.
혹시 니가 다시 돌아올까 봐 나의 곁엔 아직 그대로 비워져 있어
너의 자리라서
소울 충만한 목소리로 비련의 여주인공처럼 마지막 소절을 마쳤다. 사람들이 영문을 몰라하면서 어쩔 수 없이 박수를 쳤다. 결혼식장에서 '친구라도 될 걸 그랬어'라니. 실시간 검색어에 오를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가슴에 턱 막혔던 뭔가가 내려가면서 눈물이 났다.
며칠 뒤, 상철이에게는 '미안하다' 문자 한 통이 와있었다.
유튜브에는 비공개 결혼식에서 누가 찍었는지 모를 동영상이 '가수 A양, 결혼식장에서 충격 축가'라는 제목으로 연일 올라와 있었고 그 아래에는 무수한 댓글들이 끝도 없는 상상 릴레이를 펼치고 있었다.
나는 통쾌했지만 한 편으로 지독하게 씁쓸했다.
노래를 부르다 언뜻 본 상철이의 안쓰러운 표정이 계속 리플레이됐기 때문이다.
그래, 너 잘 못살고 있었구나. 말하는 것 같아서.
나도 모르게 가지고 있던 한 켠의 진심을 들켰을까봐. 결국 내 지지부진한 미련까지 보여준걸까 봐.
7.
영화 속에서 왜 복수를 한 캐릭터들은 늘 잘 살지 못하는지 알 것 같았다.
상철이의 문자를 받고 소파에 길게 누워 흥얼거려봤다. 그때 난 결혼식장에서 보란 듯이 비꼰 게 아니라, 거미보다도 더 절절했던거구나. 왠지 웃음이 났다.
친구라도 될 걸 그랬어 모두 다 잊고서
다른 사람 만나는 널 보아도 슬프지 않게
그저 바라보고 있었어 한참 동안
니 옆에 그 사람까지도 잠시라도 더 보려고
다시 혹시라도 널 보게 되면
그땐 모르는 척해볼게
웃어도 볼게 지금의 너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