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우울한 계절을 보내고 있는 친구에게

온 마음을 다해

by 김잔잔

1.

밤편지. 이름만 그렇게 붙인 줄 알았는데 생각해보면 늘 쓰는 시간도 어둠이 내려앉은 저녁들이야. 너의 밤편지 속 하늘에도 어둠이 내려앉았더라. 그리고 그 하늘에 어쩜 그렇게 무겁고 괴상한 활자들이 날아다니는지. 이 편지를 시작하면서 전보다 덜 수정하고 덜 생각하자고 내게 말했어. 그리하여 전보다 더 진솔한 말들이 너에게 닿기를 바라.


2.

너는 내 아픈 손가락 같고 언젠가 꼭 내 소설에 나타날 등장인물 같기도 하고 정신과 의사가 되어 첫 번째로 맡았던 십 년 전 환자 같기도 하고 그래.


또 그래서 강렬하고 애달픈 기억으로 남은 것 같기도 하고 영원히 닿지 않을 친구 같기도 하고 나를 아프게 할 가시 같기도 하고, 참 그렇다.


3.

손끝에 나오는 단어들을 그대로 적기로 결심했지만 여기까지 써놓고 계속 썼다 지웠다를 반복하고 있어. 어디서부터 이야기해야 할지 모르겠거든. 나도 같은 경험이 있어,부터 시작해야 할지 오늘 내 하루는 이렇게 흘러갔어, 라는 편한 말부터 시작해야 할지. 나도 네게 말하지 않은 비밀이 있고 그 비밀은 가끔 나를 공허하게 해,라고 말해야 할지.


4.

옛날에 봤던 영화가 떠올라. 제목이 스타더스트였던 것 같아. 어떤 남자가 별을 데리고 주어진 역경을 헤쳐 나가는 이야기였어.


너무나 당연하게 금발머리 여자가 자신을 하늘에서 떨어진 별이라고 하고 그렇게 연기하는 데 정말 별처럼 보였어. 별은 하얀 원피스를 입고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다가, 격려했다가, 화냈다가,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표정을 짓기도 했어.


영화 끝엔 결국 자신을 이용해 영생을 얻으려는 악당들을 이기고 긴 입꼬리로 씨익 웃으며 더 환하게 빛나던 모습이 기억나.

5.

지금 나는 너가 꼭 그 별 같아.

잿더미를 뒤집어쓰고 터널을 걸어가는 한 여자가 보여.

그 사람 주변에는 사람들이 몰려 있어. 원래 모습을 몰라보는 사람들은 더럽고 음산하다고 수군거리는데 다른 한쪽에는 바라보기만 하고 다가가길 주저하는 몇 사람이 있어.

그리고 그중 어딘가에 안타깝게 바라보는 내가 있다.


뒤에 붙어 있는 거머리들과 맞서 싸워 떼어줘야 할지, 빗자루를 들고 씩씩하게 다가가 잿더미를 쓱쓱 털어줘야 할지, 그도 아니면 흙바닥에서 발을 쿵쿵 굴러 나도 흙먼지를 잔뜩 뒤집어쓰고 옆을 나란히 걸어갈지 잠시 고민하다가 집으로 돌아가 손을 정갈하게 씻는 내가 있어.


6.

젖은 손을 깨끗한 타월에 두드려 물기를 없애고 소매를 걷어붙이고 텃밭으로 나간다.

싱그러운 흙이 묻어 있는 당근과 양배추를 뿌리 채 뽑아 바구니에 담아 주방으로 다시 들어왔어. 싱크대에서 차가운 물에 적당히 씻어 나무 도마 위에 올린 후 탁탁탁 소리가 나게 보기 좋은 크기로 썰어 한쪽에 잘 담아두고 고슬고슬한 밥을 짓기 시작해.


밥이 다될 때까지 세상에서 가장 부드러운 계란찜을 만들고 싱싱한 야채로 반찬을 하고 디저트로 먹을 달달한 초코바나나주스까지 믹서기에 갈면 끝.


이 모든 것을 단정한 도시락에 가득 채워 넣고 따뜻한 모닥불에 넣어놨던 알밤을 작은 주머니에 담아 다시 터널로 갈 거야.


7.

너는 아직도 잿더미를 머리 위에 얹고 터널을 한 없이 걷고 있어.

나는 종종걸음을 걸으며 뒤에서 수군거리는 사람들을 바구니로 밀치며 너에게 다가가.


내가 온지도 모르고 흐리멍덩하게 앞만 걷는 너의 주머니에 먼저 따스한 온기가 퍼지도록 알밤을 넣어줄 거야. 그리고 내가 해 줄 수 있는 가장 따뜻하고 자신 있는 음식을 손에 쥐어주고 싶어.


조금 더 용기를 낼 수 있다면 터널 가운데 돗자리를 깔고 양초를 켠 다음, 바구니에서 음식을 하나하나 꺼내 정성스럽게 세팅하겠지.


그리고 너를 잡아 앉히고 난 후 아무 생각 말고 일단 이것부터 먹어보라며 계란찜을 푸짐하게 한 숟갈 퍼서 입에 넣어주려고.


너를 위해 이 모든 것을 기꺼이 아무 대가도 없이 잿더미를 같이 맞으며 해주고픈 내가 여기 있다. 너도 내가 나의 비밀로 인해 사람들에게 이유 없이 돌을 맞을 때 이렇게 해줄 수 있다고 말해줘. 지금은 너무나도 무거운 잿더미에 깔려 있더라도 스스로 별이었다는 걸 잊지 않고 대충 툭툭 털고 내게 와줬으면 좋겠어.

그전에 먼지투성이 속에서도 그렇게 긴 편지를 보내준 너에게 감사해!


내게 스스로를 사랑하고 좋아하고 행복하냐고 물었지?

난 수많은 말을 뒤로 미루고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방식으로 너에게 답장한 오늘의 내가 참 좋다. 오늘은 그냥 그거면 되지 않을까.

keyword
작가의 이전글내 부모님은 내가 선택할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