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 재활원

파란색 점에 중독된 작가님들을 위하여

by 김잔잔

1.

인트로

한 손에는 여행 가방을, 다른 한 손에는 핸드폰을 든 여자가 느릿느릿 걸어간다. 앞으로 시원하게 펼쳐진 길가에는 가지각색의 꽃들과 나무들이 옹기종기 심어져 있다. 봄을 알리듯 만개한 동백꽃잎이 돌바닥 위로 살랑살랑 떨어져 내린다. 그러나 여자는 핸드폰에 정신 팔려 앞을 보지도 않고 걸어간다. 아름다운 풍경이 의미 없이 그녀의 곁을 스쳐간다.


2.

꽝-

얼마 지나지 않아 투명한 회전문에 머리를 박은 유팬이 인상을 찌푸리며 그제야 얼굴을 든다. 커다란 건물이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다. 그렇게 고층은 아니지만 가로가 길쭉한 건물은 규모가 상당히 커 보인다. 빌딩 벽면을 채우고 있는 널찍한 유리창들이 햇빛에 눈부시게 반짝인다. 회전문 옆에 연갈색 나무간판이 눈에 띈다.


브런치 재활원


그녀가 여행가방을 손에 쥐고 숨을 크게 들이쉬며 문을 연다.


3.

병을 진단받다

전체적으로 안정감 있는 원목 가구들로 이루어진 사무실, 전담 상담사가 펜을 한 바퀴 돌리며 이것저것 묻는다.


- 브런치는 언제부터 시작하셨어요?
: 약 한 달 전이요.


- 증상은요?
: 잠을 깊이 못 자요. 수면장애? 막 파란색 점이 왔다 갔다 하고, (한숨) 계속 핸드폰을 껐다켰다하고 그래요.


- 요즘 어떤 기분이 주로 들어요?
: (피식 웃으며) 그냥 일상이 제가 아니라 브런치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 같은 느낌. 무기력해요.


- 여기 브런치 재활원에서는 일상생활로 돌아가실 수 있도록 재활 프로그램을 시작하게 되실 거예요. 멘탈보다는 신체를 마음껏 움직이고 표현할 수 있는 활동들이 준비되어 있구요. 초반에는 일기 외에 다른 글을 쓰거나 읽는 것은 제한돼요.
: 헉, 읽는 것도요? 선생님, 저 잘할 수 있을까요?


- (밝게 웃으며) 걱정 마세요. 여기 더 심한 분들도 많아요. 며칠 있다 보면 나아질 거예요.


4.

재활의 시작

유팬에게는 102호 방이 배정되었다. 깔끔한 6-7만 원짜리 준호텔 룸 정도로 단출한 방이다. 침대 몇 개와 거울, 꽃병과 화장실이 전부인 이 곳에서 앞으로 일주일을 보내야 한다니. 한숨을 쉴 틈도 없이 스케줄표를 든 간호사가 그녀의 방을 노크한다.

- 선생님,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저 따라오세요.


5.

저마다의 사연

헐레벌떡 그를 따라 커다란 건물의 복도를 걸어간다. 좌우로 큼직한 방들이 병실처럼 빼곡하다. 은근슬쩍 방 안을 힐끗 엿보며 걸어간다. 죄다 평범한 사람들로 보이는데, 하긴 나도 그렇지.


그때, 간호사가 곁에서 속닥거린다.

- 저기 108호, 안경 쓴 중년 남자분 보이시죠? 한 달 전에 들어오신 선생님인데 좀 예민해요. 가까이 대화 나눌 일 있으면 조심하시라구요.

- 네? 겉으론 멀쩡해 보이는데...

- <헤밍웨이 따라잡기> 인가? 아무튼 브런치에서 이름을 날리시다 책을 한 권 출판하셨는데 잘 안됐대요. 그 후 차기작도 못 쓰고 출간 작가병에 제대로 걸리셔서 재활 중이세요.

- 헉, 나 그 작가님 정말 열심히 구독했는데 안 보이신다 했더니...

- 모르는 척하셔요. 그리고 여기선 '작가님'이라는 칭호는 쓰지 않고 그냥 다 '선생님'이라고 해요.

- 넵, 그럴게요.


6.

이건, 말로만 듣던 집단 상담?

그를 따라 들어가자 눈 앞에 여러 개의 의자와 삼삼오오 앉아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바람이 잘 드는 널찍한 방에 원형으로 의자가 배치되어 있었다. 어디서 많이 봤는데, 영화에선가?


- 여기 새로운 분, 잘 좀 부탁드려요.


쭈뼛거리며 빈 의자에 가서 앉자 사람들이 먼저 눈을 맞추고 인사를 한 뒤 이름을 물어왔다.


- 유ㅍ, 아 아니, 김아리입니다.

- 아이구, 반가워요. 나는 장쌤이라고 부르세요. 그래 김쌤은 어디 김 씨고?

- 저는 신선영이에요. 하루 종일 누워서 브런치 새로고침만 하다가 결국 제 발로 들어온 지 일주일 정도 됐어요.

- 나는 일 년을 했는데 구독자수가 10명이라 우울증 왔잖아, 저 쪽 학생 보이지? 쟤는 작가 신청만 13수 했어.

- Hi, I am Mark. Insomia. 그 부얼묜증? (불면증)


실환가. 브런치로 인해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가지각색의 병을 앓게 될 줄이야. 브런치가 국내를 넘어 글로벌 기업으로 쭉쭉 뻗어나가 위상을 떨칠 때만 해도 브런치 재활원 같은 곳이 생길 줄 아무도 짐작하지 못했다. 이곳에서 나 같은 '파란색 점 중독'환자들은 차고 넘쳤다. 이밖에도 하루 종일 브런치 글만 본다고 아내가 여기 재활원에 집어넣은 남자부터 다른 작가와 스스로를 계속 비교하며 심각한 대인기피증을 겪다 제 발로 찾아온 사람들까지, 그 사연도 저마다 기구했다.


7.

재활의 핵심 : 몸을 움직여라

약 두 시간이 넘도록 <집단 치유 프로그램>에서 끊임없이 말을 하고 또 듣다 보니 어느새 진이 빠지는 기분이었다. 내가 최근 이렇게 많은 사람들과 몇 시간 동안 수다를 떤 적이 있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에라 모르겠다, 침대에 누워버린 유팬에게 다시 간호사가 찾아왔다.


- 선생님, 쿠킹 클래스 가실 시간이네요.

- 벌써요?

- 네, 오늘 메뉴는 시원한 알탕에 파전이라는데요?

- 바로 갈게요.


8.

그렇게 쿠킹 클래스에서 또 사람들과 웃으며 한바탕 요리를 하고 오니 시간은 어느덧 오후 3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진짜 사정없이 사람을 굴리네' 괜히 혼잣말은 그렇게 투덜대도 유팬의 얼굴엔 점점 화색이 돌고 있었다. 처음에 들었던 불신과 회의는 어디로 가고 어느새 실룩실룩 웃음이 나고 뿌듯함까지 느껴지는 것이었다.


9.

편안한 밤

그 후 옆방 신선생님을 따라 물속에서 미친 듯 에어로빅을 하며 땀을 빼는 아쿠아로빅에 도전했다가 넋이 나간 후 저녁을 먹고 미술 치료 프로그램을 다녀온 유팬은 한 달 만에 처음으로 깊은 숙면을 취했다. 재활원에 들어온 이후로 브런치를 읽지도 쓰지도 않은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10.

재활원에서의 일주일

프랑스 자수에서부터 실내 암벽 등반까지, 그녀는 브런치 재활원에서 다양한 프로그램들을 경험하며 새로운 취미를 갖게 됐다. 독특한 인연으로 만나 함께 한 사람들의 개성 넘치는 이야기와 소재는 글쓰기에 영감을 불어넣어 주기도 했다.

어느덧 일주일을 정신없이 명랑하게 보낸 유팬이 마지막 프로그램을 마치고 짐을 정리하는데 상담사가 문을 두드렸다.

- 선생님, 여기 축하 꽃다발이랑 카드 두고 가요. 수고 많으셨어요.

조심스레 열어본 카드에는 따뜻한 한마디가 쓰여 있었다.

<무언가에 중독되지 않은 삶은 공허하다. 그러나 스스로 빠져나올 수 있는 용기가 없는 삶은 무모하다>

- 축하드립니다. 작가님의 앞날을 응원하며 브런치 재활원이 -


11.

어쩌면 완치

웃으며 문을 열고 나오는 유팬. 햇살이 뜨겁다. 저 멀리서 핸드폰만 보며 걸어오는 또 다른 환자가 보인다. 쉴 새 없이 움직이는 그의 엄지손가락을 보며 일주일 전 자신을 떠올린다. 씩씩하게 팔을 움직이며 걸어가는 그녀, 실수인 척 어깨를 살짝 부딪히자 그제야 남자가 핸드폰에 눈을 뗀다. 유팬이 여유 있게 웃으며 말을 건넨다.


- 죄송해요. 근데 날씨 참 좋죠?




2020.4.29. 오늘의 상상 끝.


(본 글은 브런치의 짜릿짜릿한 중독성을 희화화한 상상의 단편으로 작가의 경험을 과장하여 반영했습니다. 후후 믿어주세요. 물론 자가진단 결과 미래에 재활원 갈 가능성은 높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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