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삶은 이어지고
1.
5월 4일에 쓴 글을 마지막으로 무려 일주일 만에 글을 버벅거리며 써보고 있다.
며칠 전에 미완성으로 끝낸 글을 이어 써보려다가 실패했다. 한 시간 반 동안 겨우 여섯 줄의 문장을 서두에 덧붙였다. '너는 아직이구나' 다시 작가의 서랍에 글을 넣어놓고 숙성시키기로 한다.
다시 나를 찾아온 텅 빈 화면.
불과 열흘 전까지만 해도 하루에 한 개씩 글을 쓰던 내가 왜 이럴까?
2.
나는 글이 안 써질 때마다 원점으로 돌아가 똑같은 질문을 한다.
"지금 너가 쓰고 싶은 이야기가 뭐니?"
이렇게 묻는다고 갑자기 크게 달라지는 게 있는 건 아니다. 안 써지던 글이 술술 나오거나 깨달음이 오는 경우도 드물다. 하지만 나는 자꾸만 내 진심을 물어본다. 마지막에 글을 갈아엎는 수고를 덜기 위해서.
3.
종종 글이 안 써질 때면 나도 모르게 기계적으로 공허한 말을 이어 붙여놓게 된다. 완성이 아닌 완성을 하게 되어도 역시나 결과는 좋지 않다. '아, 다 쓰고 나니 별로네'하며 영원히 불러내지 않을 작가의 서랍 깊숙한 곳에 처박아두게 된다. 그런 허무하고 떨떠름한 목적지로 가지 않기 위해 '야, 그런 뻔한 미사여구 말고 진짜 니가 쓰고 싶은 이야기가 뭐냐구' 자꾸 나를 닦달하는 것이다.
4.
그래서 나온 오늘의 대답은 이렇다.
"사실 없는데 굳이 고르자면 근황 토크"
그래서 할 수 없이 이렇게 글이 안 써지는 나날들에 대해 써보게 된 것이다. 글과 어색해지는 시기에도 어쨌든 흘러가고 있는 나의 시간들에 대하여.
3.
최근 오랜만에 영화를 보고 왔다.
극장에는 나와 내 친구, 다른 커플 한 쌍뿐이었다. 다양한 장르의 신나는 음악이 빵빵한 스피커에서 쉬지 않고 터져 나왔다. 나는 (할 수 없이) 자리에 앉은 채로 살포시 몸을 좌우로 흔들어 재끼며 리듬을 탔다.
무료하고 우울한 나날들에 이런 흥이 넘치는 영화라도 보고 나니 기분이 좋아졌다. 물론 다시 고요한 일상으로 돌아왔지만 영화 속 음악들을 반복 재생하며 심심한 하루에 흥을 불러일으키곤 한다.
(기분이 다운되는 게 느껴지는데 지푸라기도 잡고 추스르고 싶을 때! 이 곡을 추천합니다)
Anthomy Ramos - One More Time
Justin Timberlake 외 - Just Sing
4.
어버이날 선물로 부모님께 풍기인견 잠옷을 선물해드렸다. 사실 제로에 가까운 통장의 여건 상 이조차 어려웠는데, 재난 지원금 덕분에 어버이날을 제대로 챙길 수 있었다. (만세)
인견의 진정한 맛은 겉은 까슬까슬하고 살이 닿는 안쪽은 실크 같은 촉감이다. 여름에 지진이나 홍수처럼 긴박한 자연재해로 단 한 벌만의 옷을 챙겨야 한다면 나는 인견 잠옷을 인견 이불에 돌돌 감아 나오리라. 아멘.
역시 옷에서도 연륜을 무시할 수 없다. 나이 지긋한 분들이 왜 옷가게만 가면 (내 눈에는 비싸고 디자인도 안 예뻤던) 인견옷 근처에 떼로 몰려가 손으로 꼼꼼히 쓰다듬어보며 '짝퉁인견'과 '진짜인견'을 구별하고 있었는지 20대 후반인 지금에서야 이해가 간다. 아멘2.
5.
시금털털한 나날들 속에서 그나마 핫이슈 하나 더 말하자면, 내가 경미한 대인기피증을 스스로 진단 내리고 인정한 것이다.
원래도 다수가 있는 자리에 나가길 꺼려하고, 약속을 매우 귀찮아하는 사람이긴 했지만 그동안은 집순이 성향 정도로 생각하고 문제 삼지 않았다.
하지만 요즘의 나는 누군가를 만나는 일이 회사 면접마냥 떨리고 메슥거린다.
전에는 대인관계에 적극적인 시기와 소극적인 시기가 주기처럼 반복됐다면 요즘은 참 일관성 있게 소극적이랄까.
6.
다수의 낯선 이들과 함께 있는 장소에서 탈출하면 마치 숨통이 트이는 것처럼 자유로운 나를 보며 깨달았다. 사실 대인기피라는 말이 스스로에게 붙이기 썩 기분 좋은 말은 아니었는데, 일단 기든 아니든 인정하고 나니 훨씬 홀가분하다. 오히려 그렇다면 조금씩 만나는 사람을 늘려가는 연습을 해볼까? 해결방법을 찾으려는 용기까지 난다.
이래서 본인의 약점을 잘 알고 인정할 줄 아는 사람이 완벽한 척 숨기려는 사람보다 더 건강하게 보이나 보다. 그런 사람에게 또 부러운 점 중 하나는 타인의 비난에도 단단한 모습이다. '나도 알아' 이 한 마디면 끝나니 말이다.
7.
영화를 보고, 어버이날 선물을 준비하고, 경도의 대인기피증을 찾아보고.
글과는 멀어졌지만 삶은 참 변함없네, 싶다. 글이 끼어들 찰나도 없이 그저 살아내는 것만으로도 벅찬 나날들을 잠시 보내고 온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