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당당하게 말할 수 있다
여러 사람에게서 여러 번 쉽게 들었던 말이다.
그러나 나는 때때로 긍정하지 않는 것이 더 건강한 행위라 생각한다.
나의 거부감을 인정해주지 않는 행위는 어쩌면 스스로에게 더 가혹한 일이다.
그런 이유에서 매사 긍정하는 사람이기보다 '싫음'을 인정해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나의 본능적이고 단순한 이 거부감 역시 하나의 감정과 취향으로 존중해주기로 결심했다.
내 버킷리스트 중 하나는 차가 제일 막히는 강남대로 한가운데 당당히 서서, 지나가는 사람이며 자동차 혹은 돌멩이 신호등 할 것 없이 뭐든 보이는 것을 향해 너도 싫고 쟤도 싫고 아주 그냥 싫다고 빽빽 소리치는 것이다.
그러다 사람들이 힐끗힐끗 쳐다보면 바바리맨처럼 입고 있던 롱코트를 비장하게 열고 '싫은 건 나쁜 게 아닙니다'라는 슬로건을 동서남북 방향으로 고루고루 보여주고 싶다.
그러다 이제 됐다, 싶을 때쯤 자동차 보닛 위에서 엉금엉금 기어 내려오면 그제야 위선과 가식으로 둘러싼 사회에서 단단히 체한 음식들이 어디선가 기쁘게 소화되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하는 느낌이랄까.
이 사건을 시작으로 이달의 화제인을 취재하는 기자나 라디오 작가, 아니면 지나가는 동네 개가 나에게 묻는다면 가던 길을 멈추고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시간 넉넉하세요?'라고 되물어본 뒤 가방에서 주섬주섬 손때가 묻어 있는 노트를 꺼내어 내가 싫어하는 것들을 하나하나 정성스레 읊어주고자 한다.
가능하면 여의도와 종로의 대기업들을 내 발로 찾아가 순방하며 이것에 대한 자선 강의를 베풀고 싶기도 하다. 주제는 '싫음에 대한 통쾌한 고백'정도가 어떨까 싶다.
나는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라는 속담을 들을 때 왠지 짜증이 난다.
이 속담은 일하지 않고 탱자탱자 풍류나 즐기는 선인들의 무릉도원에서나 먹힐 말인데 번지수가 틀려먹어도 너무 틀렸다.
인간사회는 1을 주면 1을 받는 정형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 오히려 그보다는 1을 주면 -10을 받거나 빅엿을 받고 홧병에 걸리는 일이 부지기수다. 안타깝게도 현실 세계에서는 가는 말이 썩어야 오는 말이 고와지는 인간들이 있으며, 가는 말이 고와도 오는 말이 늘 썩어있는 부류도 존재한다.
이는 서비스직을 해보면 더욱 극명히 드러난다. 누적된 경험에서 심증이 너무나도 분명하여 성악설에 논리적 근거가 있든 말든 '아, 인간은 원래 악한 존재구나' 저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것이다.
나 한 사람부터 1을 돌려주자는 취지는 알겠으나 그만 하면 됐다. 이 속담이 생기고 강산이 변했지만 그런 나비효과를 기대하느니 차라리 '가는 말이 고와도 오는 말이 곱지 않을 수 있다'라는 수정하는 편이 더 낫겠다. 적어도 이 말은 냉정한 현실을 대비하라는 야무진 경고이자 투박한 위로가 된다.
5.
다음으로 내가 싫어하는 건 신발가게 사장님들이다.
신어보고 사야 하는 신발의 특성상 어쩔 수 없이 신발가게 앞을 서성거릴 때면 어김없이 그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대개 30-40 후반의 남성들이며 들어갈 때와 나갈 때가 다른 특성을 보이는데, 가게 앞을 서성이는 2-30대 여성들에게 특히 지리산에서 돈 욕심 없이 사는 삼촌의 웃음을 장착하고 과한 영업용 친절을 베푼다.
일단 가게 안에 들어가 초반 10분까지 그 친절이 유지되나 그 이후부터는 조금씩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열이면 열 일단 논리 없이 우기기로 시작하는데 예를 들면 "그거 신어, 딱 좋아", "한 개 남은 거야"등으로 슬슬 예열하다가 마음에 드는 디자인은 발이 불편하고 발이 편하면 디자인이 별로라는 수렁에 고객들이 빠져있을 무렵 바로 심리적 압박 수법에 들어간다.
예를 들면 "잘 맞기만 하는데 왜 그래?", "이거 싫어? 도로 갖다 놔?", "그래서 살 거야, 말 거야?" 등이 있고 자매품으로 "아저씨 못 믿어?"가 있다.
여기서 내 두 번째 버킷리스트가 탄생했다. 바로 똑 부러지게 말 잘하고 드세다고 소문난 부녀회 아줌마들과 우르르 이 곳에 몰려가 한 마디씩 해주고 오는 것. 이렇게 능글능글하고 뻔뻔한 신발가게 사장님들을 대적할 사람은 이들뿐이다. 우렁찬 목소리, 꼼꼼한 관찰력, 쓰레빠부터 명품 수제화까지 아우르는 연륜!
안 맞는 신발을 딱 맞다고 우기자마자 '참내, 앞이 이렇게 남는데 뭔 소리래', '쯧쯧, 이 집 아저씨 감 없네', '옆에서 나불대지 말고 좀 비켜봐' 등등.
아줌마들의 빗발치는 꾸지람에 머쓱해진 사장님들은 괜히 입을 달싹거리다가 구석으로 밀려나는 상상만 해도 벌써 소화가 잘 되는 기분이 든다.
마지막으로 남의 조상님 제사까지 신경 써주는 고마운 분들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길 가는 사람을 다양한 수법으로 가로막아 헛소리를 늘어놓는 데 정성을 다하는 '신천지 및 도를 아십니까'다.
특히 살만 닿아도 DNA에 내재된 공격 본성이 스멀스멀 살아나는 여름에 이들은 특히 극성을 부린다. 이들이 갑자기 얼굴을 들이밀고 얼굴에 우환이 가득하다는 둥, 첫째 역할을 해야 하지 않냐는 둥 헛소리를 정성스럽게 시작할 때는 진짜 조상님 곁으로 보내주는 게 도리가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든다.
타인에게는 초면의 무례함을 당당하게 무릅쓰면서 조상님에게는 200프로 관대한 그들이 나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 나는 제사도 싫고, 살아있는 부모님 챙기기도 바쁘고, 당신의 관심법에는 더더욱 관심이 없으니 그냥 지나쳐주면 좋겠다. 만약 그것도 안되면 자비로 '나는 신천지가 싫어요' 배찌를 만들어 옷이며 가방에 주렁주렁 달고 다닐 생각인데 주위의 반응이 좋으면 대국민 크라우드 펀딩을 진행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이 외에도 폰팔이, 갑질 하는 사장님, 앞뒤 없이 친목행사를 들이대는 이들, 강한 자에게 약하고 약한 자에게 강한 사람, 라떼는 말이야 꼰대족 등등 싫어하는 게 많지만 일단 오늘은 여기까지.
싫다는 말이 부정적인 어감으로 교육되지 않았다면 어떨까 생각해본다.
싫다는 말에는 선, 악의 어떤 어감도 없다.
그저 대다수 말이 그렇듯 개인의 경향성,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라고 받아들인다면 나는 싫다고 말함으로써 우리가 해결할 수 있는 오해와 불신이 얼마나 클지 상상해본다.
거기에 한 술 더 떠서 싫다고 솔직하게 말할 수 있는 사회라면 자살, 오해, 위선, 가식, 화병의 감소로 인해 우리 모두 소화기 쪽으로 50퍼센트는 더 건강해질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다들 체하지 않고 살 수 있는 건강한 사회를 위해 오늘도 나는 '싫다'라고 말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