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잔잔 May 20. 2020

사곡 할머니, 황곡덕, 정덕자씨(1)

손녀가 쓰는 외할머니 이야기

할머니와 함께 나이 들어간 집의 풍경


1.

얼마 전, 인터넷에 글친구를 구한다는 게시물을 올렸다. 유일하게 한 분에게서 연락이 왔고 우리는 복닥복닥한 카페에서 첫 만남을 가졌다. 서로가 가져온 글들을 조심스레 바꿔 읽고 많은 이야기를 나누다가 꾸준한 글쓰기를 위해 몇 가지 규칙을 정해봤다. 그중 하나가 번갈아가며 주제를 내고 그에 맞는 글을 일주일에 한 편씩 쓰는 것이었다.


"주제는 뭘로 할까요? 전 바로 생각나는 게 없어서 그런데 먼저 정해주세요."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할머니로 하죠."


2.

할머니라는 이름 앞에서 나는 길 잃은 강아지가 된 기분이었다. 글을 선뜻 시작하지 못하고 그 언저리만 뱅뱅 돌며 서성거렸다. 아직 그녀에 대해 한 번도 제대로 글을 써본 적이 없는 것은 어쩌면 너무도 많은 마음들이 얽혀있기 때문이었다. 여든이 넘은 연세에도 일을 쉬지 않는 삶에 대한 안타까움과 연민, 동시에 당신의 몸은 나 몰라라 하는 고집에 대한 걱정과 답답함. 그리고 종종 맞닥뜨리는 어쩔 수 없는 옛날 사고방식의 황당함 같은 것을 어디서부터 풀어내야 할지 몰랐다.

 

3.

복잡한 마음을 어떻게 풀어내야 할지 모르겠다는 것이 첫 번째 핑계였다면 두 번째 핑계는 추억의 부재였다.

사실 우리 사이엔 글로 풀어낼 만큼의 살뜰한 추억이 별로 없었다. 엄마를 사이에 두고 어정쩡한 거리에서 서로를 조용히 챙겨주는 정도랄까. 할머니는 늘 꼭두새벽에 일을 나가 밤늦게 돌아오셨다. 잠깐 틈이 나도 손녀에게 시시콜콜한 질문을 하기보다는 엄마와 삼촌들에게 어서 농약을 치고 풀을 베라는 둥 일 이야기만 하셨다. 그래서 어릴 적부터 나는 꼭두각시 인형처럼 엄마의 입을 대신해 말하곤 했다.

할머니, 이제 일 좀 그만하셔요.

편지를 써도 언제나 끝에는 자연스럽게 '올해는 일 좀 줄이시고 건강하세요'라는 말을 덧붙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할머니는 그 말이 얼마나 지겨웠을까.


4.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서도 마음은 이상하게 이번 주제를 기회로 꼭 할머니에 대해 쓰고 싶다고, 써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지금이 아니면 또 언제?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여전히 뿌연 안갯속을 헤집는 것처럼 글의 방향은 깜깜했지만 결국 나는 할머니를 주제로 감동적이거나 재밌는 글을 잘 쓸 자신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냥 일단' 써보기로 했다. 손녀로서 내가 아는 할머니에 대한 모든 정보를 한 번 나열해보리라. 나와 아주 가까우면서도 먼 그녀를 나는 얼만큼 알고 있다고 자부할 수 있을까? 번호를 매기면 10번까지나 갈 수 있을까?


그렇게 이 글은 출발했다.

.

.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2020.5.20.


매거진의 이전글 글이 안 써지는 나날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