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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잔잔 May 20. 2020

사곡 할머니, 황곡덕, 정덕자씨(2)

손녀가 쓰는 외할머니 이야기


정겨운 김장 풍경. 김장 전날, 할머니는 혼자서 저 많은 양념을 미리 만들어두셨다.

이전 글에서 나는 할머니를 주제로 글을 쓰는 게 어렵지만 그래도 해보고 싶노라 밝혔다. 그래서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전 나름대로 심플한 목표들을 먼저 세워봤다.


1. 재미나 감동은 고사하더라도 일단 완성해보기
2. 할머니에 대해 아는 것들을 최소한 열 개는 구체적으로 써보기
3. 이 글을 통해 할머니에 대해 조금이라도 더 생각하고 고민해보게 된다면 그것으로 된 것!

아직 엄마를 놓고도 글적으로 이렇게 진지하게 접근한 적이 없는 내게 그야말로 새로운 시도다. 나는 과연 할머니의 어떤 모습들을 알고 있을까? 한 번 지금부터 낱낱이 나열해보자.

 


(1) 그녀는 황곡에서 시집왔다 하여 줄곧 황곡덕이라고 불렸으며, 지금까지도 마을에서는 그렇게 통한다. 손자 손녀들은 지금 살고 있는 곳의 이름을 따 그녀를 사곡 할머니라 부른다. 존함은 정덕자이나 이제 그 이름 석자를 온전하게 불러주는 이는 가끔 오는 우편배달부나 AS기사뿐이다.


(2) 시집 온 이래 한결같이 사곡 임기마을 우물터 윗집에서 살았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마을에서 일을 많이, 빠르게, 잘하기로 소문이 자자하다. 할머니는 노인정에서 1시간 이상 엉덩이 붙이고 노는 걸 불편해할정도로 '편하게 드러누워 사는 일'에는 꽝이다.

사곡 임기마을에 있는 할머니의 오래된 집


(3) 그간 숱한 동물들과 동거 동락해왔지만 강아지만은 유독 귀찮아하신다. 아마도 할머니께 경제적 효용가치가 없어서라고 엄마와 나는 추측한다. 몇 년 전에 오랫동안 끼고 살았던 소를 정리하시고 지금은 터줏대감 흑염소와 시끄러운 닭 몇 마리와 함께 지내고 있다.


(4) 할머니의 시어머니는(나의 외증조할머니) 말을 툭툭하고 성질이 급한 사람이었다. 언젠가 시집살이 는 어땠는지 묻자 할머니는 그 성질을 알고 미리 알아서 다 맞췄다고 하셨다. 참 그녀 다운 답변이었다.


(5) 위에서 알 수 있듯 그녀의 성격은 '상대방 성질이 개똥 같아도 어쩌겠냐, 그러려니 해야지'하는 타입이다. 남 험담하길 싫어하고 평화주의를 지향하는 보살 같달까. 그러다가도 농사와 관련된 일이라면 무서울 정도로 똑 부러진다. 셈이 빠르고 받을 것, 줄 것에 대해 할 말은 딱 하고 본다. 문득 할머니의 MBTI가 너무 궁금해진다.


(6) 은근히 교촌치킨 허니콤보를 잘 드신다. 단 거 싫어하실 줄 알았는데 무려 허니콤보라니!


(7) 그 시대에 흔치 않게 딱 세 명의 자식을 두셨다. 우리 엄마가 맏이고 밑으로 두 명의 삼촌들이 있다. 할머니는 할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여자도 공부해야 한다며 엄마를 대학교까지 보내셨다. 모두가 어렵게 살던 촌동네에서 대학교까지 간 여자는 엄마가 최초였다고 한다. 두 모녀에게 리스펙.

글을 쓰면서 확인차 다시 물어봤다.


(8) 그래도 재산은 딸보단 아들에게 가야 한다는 신념을 갖고 계신다. 더불어 결혼을 안 하면 어떨 것 같냐는 언니의 질문에 말도 안 된다며 호통을 치실 정도로 여자는 시집을 잘 가야 한다고 굳게 믿고 계신다.


(9) 몸이 부서져라 일을 해온 덕분에 의사에게 '관절이 다 닳아 엑스레이상 보이지도 않는다'라는 말을 듣기에 이르렀다. (옆에서 듣던 가족들은 전부 아연실색했다.) 그러나 노동은 그녀의 오래된 즐거움인지라 이제는 아무도 말릴 수 없다는 것을 모두 알고 있다.

어느덧 수명이 다 해버린 할머니의 애마 (feat. 적재량 초과)

(10) 할머니는 학창 시절, 소풍 가는 날 도시락에 '콩'을 싸가셨다고 한다. 계란후라이가 특별 반찬이었다는 엄마는 말도 못 꺼낼 정도로 가난한 시절을 보내셨다. 드러내 말씀은 안 하시지만 더 공부하지 못한 것을 못내 아쉬워하시는 것 같다. 그래서인지 늘 학교 공부를 성실히 하라고 필히 당부하시곤 한다.


(11) 시집오기 전부터 자수를 잘 놓으셨다. 처녀 적에 만든 이불보만 한 크기의 자수를 50년이 지난 지금까지 상자에 보관해두고 계신 것도 지난해에 처음 알았다. 한 달을 꼬박 걸려 만든 작품은 프랑스 자수가 취미인 내가 한눈에 보기에도 정교하고 아름다웠다.



손녀가 바라보는 할머니를 11개의 번호로 표현하고 나니 뭔가 뭉클하다. 그녀에 대해 더 긴 글도 쓸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다. 어쩌면 3편을 쓰게 될지도 모르겠다.

황곡덕! 정덕자씨! 손녀가 이렇게 줄줄이 신상 공개해버린 걸 알랑가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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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5.20.


*글을 쓰면서 제가 2017년에 올린 도전 만화 #할머니집편을 오랜만에 보고 왔어요. 혹시 할머니에 대해 더 궁금하신 분들이 계신다면 귀여운 마음으로 보셔도 좋을 것 같아 링크 걸어둡니다 하하*

https://comic.naver.com/challenge/detail.nhn?titleId=692288&no=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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