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돌아올 수 없는 계절을 떠올리며
Bgm. 에피톤 프로젝트 - 첫사랑
1.
하필이면 계절마저 아름다웠던 그 때.
아침에 일어나면 창문으로 높고 푸른 하늘이 시원하게 펼쳐져 있었다. 창문가에는 누가 처음 심었는지 모를 거대한 떡갈나무가 한 없이 무성하고 푸르른 잎을 자랑하며 언뜻 언뜻 모습을 드러냈다. 어느새 집 안은 환해져 있고 깊숙이 들어온 햇살에 거실 곳곳의 오래된 가구들은 짙은 주홍빛으로 물들어갔다. 봄날의 아침이었다.
2.
멀리서 익숙한 새소리가 휘파람처럼 들려오고 구수한 밥 짓는 냄새가 바람을 따라 함께 들어오면 몸을 덮고 있는 얇은 이불자락을 느끼며 조용히 눈을 떴다. 그리고 가장 먼저 네 생각을 했다. 네 이름 석 자를 떠올리면 노력하지 않아도 두둥실 수많은 사진들이 떠올랐다.
3.
커피를 주문할 때 올라가는 눈썹, 자꾸 내려오는 까만 옆머리, 책상 밑에서 발을 가볍게 흔들며 강의를 듣는 모습까지. 어제 본 당신의 얼굴이 너무나 선명하게 남아서 마치 다른 모든 것은 지워버리고 이 기억만을 남겨두기 위해 잠을 잔 것 같았다.
4.
언제부터인가 하루의 시작이 네 모습이 되었다. 눈을 뜨자마자 어제의 당신이 자동으로 재생되는 영상처럼 밀려왔다. 온갖 생각으로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끼며 아침을 맞이했다. 어제보다는 더 오래 너를 볼 수 있기를, 불안하면서도 설레이는 마음으로 매일 똑같은 희망을 품었다.
5.
버스가 저 멀리 신호등에 걸려있을 때부터 창문가에 앉아 있을 너를 상상했다. 때로는 잠에 취해 부드럽게 내려오는 눈커풀, 때로는 바깥을 쳐다보며 사람을 구경하는 호기심 가득한 표정. 어떤 모습의 너라도 좋았다. 버스를 기다리는 내내 괜히 땀이 나는 손을 훔치며 당신을 기다렸다. 언뜻 네 모습이 보이지 않으면 공연히 핸드폰을 만지작대며 일부러 버스를 놓치기도 했다. 늘 보는 그 모습을 하루라도 놓치기 싫어 스쳐보냈던 수많은 버스를 세면 몇 대나 될까.
6.
두 계절이 지나서 겨우 내 마음을 고백했던 날. 널 좋아한다는 다섯 글자를 위해 다섯 장의 편지를 쓰고도 일주일을 미루다 뒤늦게 전한 날. 그날 밤 나도라는 두 글자의 문자에 세상이 잠깐 암전된 기분이었다. 침을 삼켜야하는 것도 눈을 깜박이는 것도 잊은 채 가만히 있었다. 당장 너를 찾아가 마음을 다해 힘껏 껴안아주고 싶다는 생각이 나를 가득 채웠다.참다 못해 전화를 걸어 여보세요, 겨우 내뱉었을 때 건너편에서 응, 부끄러운듯 대답하는 네 목소리로 모든 것이 바뀌었다. 잠이 들기도 전에 잠에서 깨어 널 보고 싶었다.
7.
유난히 기억나는 것들-
지하철에서 나란히 앉아 차마 옆을 보진 못하고 대신 뚫어지게 쳐다봤던 너의 운동화.
함께 밤산책으로 자주 가던 코인세탁방의 섬유유연제 냄새와 빨래가 돌아가던 소리.
서로 자기꺼라 우기던 물빠진 하늘색 티셔츠.
벤치에 앉아 선물이라고 내민 베이지색 벙어리장갑. 직접 손에 껴주고 싶다는 당찬 네 말에 가슴이 쿵쾅거렸던 순간. 그리고 하루종일 벙어리 장갑안에서 땀에 젖어있던 내 손.
영화를 보여주겠다며 빔프로젝터를 설치하다 땀을 뻘뻘 흘린 어느 겨울밤 함께 먹었던 아이스크림.
도서관에서 책상 아래로 손을 잡고있느라 한 손으로 독수리 타자를 치며 과제를 하던 우리.
너에게 너무나 잘 어울렸던 끈 달린 남색 벙거지 모자, 사각 가죽 시계.
늘 입고자는 빨간색 체크무늬 잠옷바지와 회색 이불에서 은은히 풍기던 당신의 체취.
차가운 김이 서린 버스 창문에 손가락으로 수없이 써본 네 별명.
8.
첫사랑에는 한 시절이 오롯이 담겨있다.
2020.5.28. 오늘의 상상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