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령사회의 사랑법

별다방 말고 시니어다방

by 김잔잔

1.

나 최순자.

올해로 산뜻하게 일흔을 찍었다. 작년 여름부터 아들네에서 손자 손녀를 봐주며 소소하게 용돈벌이도 하고 놀러도 다니며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다.

아침에 눈 뜨자마자 하는 일은 톡 확인하기. 어제 만난 김영감이 새벽 6시에 다정하게 문안 인사를 보내 놨다. 부지런도 하셔라.

순자씨, 굿모닝

미애씨말로는 동네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스윗가이라나 뭐라나. 틀린 말은 아니구만.

시니어 카페에서 만난 할배들 중에 이 정도면 매너로는 합격이다. 아닌 척 하지만 그래도 이 새벽에 누가 내 생각을 해주나 싶어 배실배실 웃음이 새어 나온다. 내가 이 맛에 카페다니지. 사진첩을 열어 며칠 전 다녀온 꽃놀이 사진 중 예쁜 걸로 하나 답장하기로 한다. 뻘건 진달래보단 샛노란 산수유가 좋겠지?

상큼한 아침, 꽃구경하시라구~^^

김영감에게 답장을 하자마자 그새 엊그제 잠깐 차를 마신 박씨가 띡 하니 톡을 하나 보내 놨다. 이건 또 뭔 사진이래.

아침부터 월출산 등반. 바람 좋고 날씨 좋고

이 영감탱이는 왜 자꾸 자기 사진을 보낸대. 새파란 등산복을 아래 위로 맞춰 입고 바위 앞에서 포즈를 취하는 사진이다. 말투도 무뚝뚝하니 만나자는 말이 없어 삐지려던 찰나에 잊을만하면 사진을 보내온다. 그래도 밉지는 않은 게 박씨의 매력이다. 젊을 때 이골이 났다 생각했는데 늙어서도 나쁜 남자는 묘하게 내칠 수 없는 뭔가가 있다. 괜히 일찍이 먼저 떠난 전 남편 생각이 나서 그런가.

오라버니 체력 짱짱^^

대충 찍어 답장해놓고 나니 벌써 7시다. 내 정신 좀 봐, 해가 중천이다.



2.

초등학교 3학년인 큰 애부터 어린이 집 다니는 작은 애까지 보내고 나면 진짜 하루가 시작된다.

따뜻한 차 한잔 우려내 놓고 거실 쇼파에 앉아 한적한 아침 햇살을 만끽하며 핸드폰을 확인한다. 데이팅어플 '만남'에서 알림이 와있다. 이번엔 또 누군지. 이 좁은 동네에서 만날 사람은 다 만난 것 같아 미애씨 조언대로 옆동네까지 확장했더니 요즘 아주 핸드폰이 뜨겁다.


차대식

요 할배 관리 좀 했네. 화면을 거의 다 차지할 만큼 큰 프로필 사진을 보며 속으로 생각한다. 인상도 서글서글 웃는 상이고 관상학적으로 곱게 처진 눈썹도 좋다.

'몇 시가 좋으려나'

즐겨 찾는 시간대를 보니 오후 3시. 그 시간대로 설정해서 만남 버튼을 눌러 놓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딸애가 부탁한 손빨래 좀 하고 민자랑 전화로 수다 좀 떨고 나니 벌써 11시다. 시장 가서 밑반찬 좀 사고 시니어다방으로 가면 딱 맞겠다는 생각에 콧노래가 나오려는 찰나, 알람이 띠링 울린다. 차영감이 수락했다는 메시지다. 안 그래도 볼륨이 죽어 파마할 때가 됐는데 시장은 내일 가고 단골 미장원을 들를까 말까 고민한다.

장미야, 나 머리 3시까지 되겠냐



3.

머리까지 곱게 단장하고 출근한 시니어다방은 언제나 만석이다. 내가 항상 먹는 음료는 쑥차. 큼직한 글자가 시원시원한 무인주문기 스크린을 눌러 능숙하게 주문한다. 시니어 다방은 몇 년 전부터 순식간에 불어난 체인점으로 인테리어부터 주문방식까지 고객에게 맞춤화되어 있는 카페다. 출입나이는 최소 40.

휠체어며 보조 보행기구가 쉽게 드나들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다. 의자와 테이블은 쿠션이 푹신하고 널찍해서 오래 앉아도 배기지 않는다. 메뉴 또한 어른들의 입맛에 딱 맞고 알아보기 쉽게 쓰여있다.

그린티라떼 -> 녹차맛우유
돌체라떼 -> 연유커피우유
후식은 깨죽, 인절미, 약과 택1

그래서 퇴직한 지 얼마 안 된 사람부터 거동이 불편한 어르신들까지 편하게 드나들기에 안성맞춤인 것이다. 나 또한 예외는 아니다. 만남 어플의 제휴 업체도 여기인지라 영감이고 할매고 다 가까운 시니어 다방에서 만남을 갖는다. 음료 20% 세일은 덤이고.

좋아하는 창가 자리에 앉아 3시에 만나기로 한 상대를 기다린다. 주인 미애씨가 은근슬쩍 다가와 안부를 묻는다. 오늘 머리가 잘 됐다며 은근슬쩍 기를 살려주고 간다. 힐긋 곁눈질로 보니 발가스레한 볼터치를 한 노인들, 이리저리 무스 바른 영감들, 스카프며 브로찌를 단 사람들까지 참 다양하다. 저마다 여러 빛깔로 살아가고 있는 내 또래들을 볼 수 있어 좋다. 우리가 모여 노는 곳이 양로원이나 노인정 말고 또 있다는 게 즐겁고 다행스러운 일이다. 각자 자식 얘기, 살아온 이야기, 미주알고주알 늘어놓을 수 있는 곳에서 나도 편하게 쑥차 한 모금을 마신다. 편안하다. 매일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일도 재밌다. 시골에서 혼자 마늘을 까거나, 자식집 방 한켠에서 우두커니 창 밖만 보던 내 나이 때의 우리 엄마와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조금만 더 오래 사시지, 이런 세상 올 줄을 모르시고.



4.

혼자 잠깐 생각에 빠져있는 사이, 차영감이 웃으며 앞에 앉는다.


"최순자씨 맞으시죠?"


웬걸. 사진보다 10살은 더 나이 들어 보인다. 프로필과 사뭇 다른 얼굴에 당황했지만 순자는 살갑게 반긴다.


"네, 어서 앉으세요. 아유, 인상 참 좋으시다"


아휴 몰라, 이래서 프로필 사진은 믿을 게 못 돼. 순자는 속으로 다짐하며 테이블 아래로 몰래 박씨에게 톡을 해둔다.


오라버니! 내일 아침 등산 저두 참^^~! ㅇㅋ?


따뜻한 햇살이 창가에 비치고 쑥차의 향이 은은하게 퍼진다. 오자마자 실없는 농담을 던지는 차영감의 말에 순자의 테이블에 웃음이 퍼진다.

푸근한 시니어 다방이 펄떡 거리는 젊은 활기로 가득하다. 저마다의 시간이 역행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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