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소설
좆같은 하루가 아직도 안 끝났다. 이렇게 속으로라도 욕을 하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다. 솔직히 말해서, 오늘 하루를 어떻게 버텼는지 나도 잘 모르겠다. 알람을 몇 번이나 미루며 아침 일곱시 반에 간신히 일어났다. 세수를 하는 둥 마는 둥, 급하게 집에서 뛰쳐나와 어떻게 지각은 면했다. 텅텅 빈 통장 탓에 계란 한 개랑 바나나 하나를 먹으며 하루를 버텼다. 몽롱하고 고통스러웠다. 누구나 하루를 계란 한 알과 바나나 한 쪽을 반으로 나눠 먹으며 시작한다면, 하루가 충분히 좆같으리라. 냉소적인 내적 독백이 그치질 않았다. 반 개를 먹고, 점심에는 계란 반 개를 먹는 동물이 무엇일까? 답은 요한이요. ‘김요한’. 온종일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다 집으로 돌아가는 요한이요. 스무 살, 대학생이 되면 뭐든 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던 요한이요.
식사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그것은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한 입 베어 물 때마다 예순 번씩 씹었기 때문이다. 마치 체하지 않으려는 것처럼, 잔뜩 먹는 체 했다. 몸을 속이기 위한 노력이 무색하게도 눈길이 남은 계란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내적 갈등. 구질구질하고 비참한 싸움이다. 대의도, 명분도 없는 계란 반 개를 먹냐 마냐의 싸움. 마시멜로를 먹냐 마냐의 문제. 애초에 간에 기별도 안 갈 만큼 먹으면서 이러나저러나 좆도 상관없을 텐데도 갈등할 수밖에 없었다. 문득 대학교 신입생 환영회 자리에서 얼큰하게 술이 취해 이 사회에서 가난을 뿌리 뽑는 사람이 되겠다고 거창한 포부를 늘어놓던 나의 모습이 떠올랐다. 기억 속의 나는 계란 반 개를 먹냐 마냐 따위를 고민하는 지금의 나와 적절한 대비를 이루고 있다. 그래, 그리고 어떤 선배는 국어국문학 전공 주제에 꿈도 크다고 했지. 우리 과 취업률을 운운하며 과외 자리도 못 구한다고 그랬다. 그래, 맞는 말이라고 치자. 내 앞에서 굳이 그 말을 하는 저의는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혹시 바로 오늘처럼 구질구질한 삶을 살 것이라고 미리 예언이라도 한 것이었을까? 나는 계란 반 개도마저 먹었다. 그런 구질구질함이 너무 싫어 저녁의 나에게 화풀이를 해버린 것이다. 마시멜로 이야기처럼 세상이 단순하면 얼마나 좋을까. 아침에 내가 출근했는지 확인하러 온 점장님은 그게 아침이냐고, 다이어트를 하느냐고 물었다. 이렇게 먹어도 살 안 빠져요. 그렇게 말하며 속으론 밥 대신 울분을 꾹꾹 눌러 담고 있었다. 그렇게 웃음을 팔며 온종일 고문을 받았다. “어서오세요!”
저녁이 되어 퇴근하는 길은 피곤하고, 배도 고프다. 일하는 내내 밥도 제대로 못 먹고 음식 냄새에 시달리며 매일 일을 하지만 빈곤이라는 새끼는 어떻게 되먹은 놈인지 하루도 곁에서 떨어질 생각을 안 한다. 가난. 그것은 실체화된 죄악이다. 세 평 남짓한 반지하 방에서 병든 할머니가 가출한 자식 대신 손주를 키우는 것이며, 삶의 가장 중대한 문제가 의식주에 있는 것이다. 발전도 미래도 없는 평이한 나날. 그 지긋지긋한 삶의 양식을 떠나지 못한 것을 보니 나는 아직 발버둥을 덜 쳤나 보다. 배가 고프다. 정말 고프다. 속이 쓰려 당장에라도 고인 위액을 토하고 싶다. 아니 할 수만 있다면 아예 위를 꺼내놓고 살고 싶다. 고통이 사람을 성장시키기는 개뿔, 나는 지금 자신을 소화하는 불가사리가 되어가고 있는데. 어서 집으로 돌아가 무엇이라도 먹고 싶다. “운수 좋은 날”에 등장하는 김첨지의 아내처럼, 반찬 없이 설익은 밥만 퍼먹게 된다고 해도 감사할 것이다. 8월 21일. 참으로 애매한 날짜다. 말일에 들어올 월급과 부족한 생활비를 메꾸기 위해 친구들로부터 빌린 돈의 차액을 가늠해보자 한숨만 나왔다. -삐빅, 감사합니다. 아, 빚쟁이가 하나 더 있었지. 단말기에 뜬 후불 교통카드 사용금액은 너무 폭력적이다. “죽지 못해서 살지....” 어두컴컴한 방구석을 지키던 할머니의 외롭던 뒷모습이 자꾸만 떠오른다
오늘 처음으로 기분 좋은 일이 방금 있었다. 버스가 텅텅 비어 있어 나는 늘 선호하는 좌측 맨 앞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나는 가방을 풀어 무릎 위에 올려두고 머리를 창가에 기댄다. 나름대로 가장 편한 자세이다. 버스 유리창에 비치 도시의 밤은 자극적이다. 유리창 하나 너머의 다른 세계. 나는 홀린 듯 창밖의 풍경을 들여다본다. 잠시라도 배고픔을 잊을 수 있다면 무엇이든 좋다. 태양보다 밝은 조명과 간판들 사이로 피어오르는 푸르스름한 담배 연기. 유리창 틈새로 비집고 들어오는 매캐한 매연과 위를 자극하는 갖가지 음식물 냄새. 살짝 열린 행인들의 입가로 달짝지근하고 시큰한 공기가 달라붙는다. 피할 수 없는 냄새와 감정의 찌꺼기들이 나를 괴롭힌다. 부러 입으로 숨을 쉬며 신경을 다른 쪽으로 옮긴다. 저마다 왁자지껄한 행인과 손님들의 웅성대는 소리는 도시의 바닥마다 그득그득 엉겨 있으며, 그 위로 가게마다 놓인 스피커들의 지칠 줄 모르는 울음 소리나, 자동차들의 소음 따위가 길을 달린다. 식은땀처럼 축축한 영혼들이 오늘 밤도 여지없이 자극적이고 난잡한 도시에 이끌려 부유한다. 버스 안에서라면 도시를 관망할 수 있다. 한장의 유리창과 얇은 금속 차체로 하릴없이 밤거리를 떠돌고 싶은 충동을 견딜 수 있다. 물론, 이 배고픔을 해결하기 전까지는 아무 의미도 없는 충동이지만. 번화가를 관통하며, 문득 도시에 영원히 해가 뜨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눈 깜빡할 사이 장면이 넘어갔다. 어떻게 닿은 건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익숙한 풍경 앞에 내려있다. 수수한 나의 동네는 어김없이 멀뚱히 서 있다. 집에 가까워질수록 꼬리뼈쯤이 시큰해진다. 스멀스멀 기어 올라오는, 해소 불가능하고 불쾌한 조바심. 가까스로 길가의 가로수에 머리를 처박고 고꾸라지고 싶은 욕망을 참으며, 나는 건물과 건물 사이를 조심스럽게 걸어간다. 열정도, 욕망도 없는 이 동네는 고동치는 도시에 비하면 서늘하기까지 하지만 8월 중순의 저녁 공기가 목에 걸려 좀처럼 넘어가지 않는다. 그리고 바로 그런 점들이 나를 미치게 하는 것이다. 오늘 내 하루가 상상을 초월하게 좆같더라도, 아무렇지도 않은 그 모습이. 나는 서둘러 현관 비밀번호를 입력했다. 숨죽여 빌라 복도를 지난다. 문도 서서히 닫히도록 조절하면서. 비명을 지를 수 없는, 소리가 공개된 원룸 건물. 입이 있어도 별다른 소용은 없네. 왜냐면 여기 사는 모두가 누군가 복도를 지나는 것을 알 테니까. 왠지는 모르겠지만 내 방 비밀번호를 누르고 있으면 늘 화장실에 가고 싶다. 신발을 벗는 둥 마는 둥, 나는 급히 화장실로 뛰어든다.
내친김에 씻고 나왔다. 여름이잖아. 늘 땀에 흥건히 젖은 육체를 에어컨에 말리던 사람이 말해도 별로 설득력은 없지만. 밥솥에 안쳐놓은 밥은 예쁘게 뜸이 들어 있었다. 냉장고를 열어 김치를 꺼낸다. 하얗게 곰팡이가 펴있다. 나는 무심히 그 곰팡이를 걷어낸다. 할머니가 직접 담근 김치니까. 귀찮아서 밥을 차려 먹지 않았던 지난날이 후회스럽다. 그때 집에서 밥을 해먹었다면 오늘 치킨을 뜯었을지도 모르는데. 할머니가 김치 다 먹었냐고, 새로 보내주시겠다는 말을 애써 거절했다. 내 게으름을 알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고, 반찬 투정 한번 안 하던 손주가 이렇게 게으르게 살고 있다는 것을 아시게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신은 늘 내 걱정만 하는데, 자식은 이렇게 막살고 있답니다. 저는 당신의 희망인데, 이렇게 비관주의자가 됐답니다. 하루하루 버러지같이. 곰팡이 핀 김치로 연명한답니다. 오늘은 유달리 비관적이구나. 이게 다 그 계란 때문이다. 끼니를 거르지도 못하고 챙기지도 못하게 만드는 그 계란 때문이다. 나는 허겁지겁 밥을 들이켠다. 열번은 씹었을까. 낡은 전기밥솥의 밥은 그래도 구수하고 달다. 바닥에 눌어붙은 누룽지까지 해치우자 코팅이 난도질당해 있는 밥솥 바닥이 보인다. 어쩐지 눈길이 떨어지지 않는다. 아마 담배 생각이 나지 않았더라면, 잠이 들 때까지 그 바닥을 보고 있었을 것이다. 조용히, 일어나서 가스레인지 위 환풍기로 향한다. 집 밖으로 나가긴 싫다. 미적지근한 밤하늘과 희미한 별빛을 마주할 자신이 없다. 구부정한 자세로 연기를 마신다. 환풍기가 빨아들이는 연기마저도 질투하면서. 이렇게 살고 싶지 않았는데. 몇 번을 되뇌어도 부족하다.
어질어질한 기분 속에서 자리에 드러누웠다. 잠은 오질 않는다. 어질어질함을 좀 더 잘 느끼기 위해 자리에 누웠을 뿐이다. 세상이 나를 중심으로 핑핑 돌아간다. 방학 직후 다녀온 농활이 생각난다. 막걸리를 진탕 퍼마시고 아스팔트 위에 드러누웠던 그 날. 눈부시게 쏟아지던 별과 좋아하던 아이에게 내 마음을 고백했던 날. 걔도 날 좋아했을지도 모르지. 오만하구나 꼬마야! 우리는 자연스럽게 서먹해졌다. 날 미니어처 인형처럼 주머니에 넣어 다니고 싶다고 했던 그 아이. 잠깐이나마 좋았던 시절은 모두 뒤로하고 나는 홀로 이렇게 침전하고 있다. 나는 무엇을 바라? 웃기는 일이다. 윤동주 시인도 그랬을까? 멀리 일본에서 유학하면서 자신의 처지를 비관했을까? 헛소리. 비교할 사람을 비교해야지. 예민하지도, 양심적이지도 않은 나야.
시간을 잡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황진이의 시조가 떠오른다. 한여름이지만 잠도 오지 않고 딱히 할 일도 없는 이 쓸모없는 시간. 오늘 하루를 조금이라도 쓸모 있게 만들고 싶어 발악하는 이 의미 없는 시간을 베어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전기장판 밑에 서리서리 넣었다가 시험기간이나 모처럼 할머니를 만나러 가서 굽이굽이 펴낼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나는 책상 위 아무렇게나 널브러져있는 책을 집어 든다. 별로 친하지도 않던 동기가 방학 전 마지막 전공 시간에 반강제로 빌려준 책. 여기저기 토가 달려 있던 책. 네가 여기저기 묻어 있던 책. 그렇지만 난 네가 별로란다. 그러면서도 나는 쓸데없이 예의를 발휘한다. 특별히 재밌지도, 읽고 싶던 책은 아니지만, 책을 읽는다. 마저 읽는다. 잠도 오지 않는 긴 밤을 견뎌낼 자신이 없어서 책을 읽는다. 그 아이의 글씨를 피해 달린다. 등장인물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좀처럼 거리를 좁힐 수 없는 세계에 다녀온다. 기분이 싱숭생숭하다. 시간은 어느덧 두 시. 내일 아침 일곱시에 일어나려면 벌써 늦었다. 그 사실이 너무 서럽지만 어쩔 수가 없다. 이제 자야만 한다. 편의점 카운터를 하루종일 보며 음식 냄새에 시달리다가 보잘것없는 밥으로 허기를 달래고 관심 없는 책을 읽은 것밖에 없는 하루지만, 이제는 자야 한다. 오늘 하루는 그저 오마주에 불과하다. 내 남은 인생의 오마주. 늘 배고프고, 이리저리 끌려다니다가 돌이켜보면 늙어 있는 그런 인생. 복제된 내일이 저 창밖에 기다리고 있다는 것. 오들오들 떨고 싶다. 피식. 그 와중에 “권태”의 마지막 구절이 떠오르다니. 참으로 우습다. 웃음이 배 밖으로 튀어나온다. 그래, 그렇다면 이건 소설가 김요한 씨의 일일이다. 나는 걷잡을 수 없게 웃는다. 빌라 전체가 울리게 웃는다. 눈물 콧물 범벅이 된 얼굴로 웃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