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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윤 Jan 29. 2019

2018년 12월 8일

임시 저장

그 날 나는 수기를 쓰고 있었다. 아마도 우울증 환자의 수기 매거진에다가 무언가 올리고 싶었던 모양이다. 1500자 남짓한 글에는 그 날의 일과가 적혀 있었다. 약을 며칠 걸렀다. 수면 패턴이 뒤집어졌다. 병원에 그래도 결국 갔다. 와. 시시콜콜한 감정을, 최대한 조리해서 내보내려고 노력한 흔적이 역력했다. 남들 보기에 덜 부끄럽게, 남들 보기에 더 예쁘게. 조금 보기에 메스꺼웠다. 늘 같은 이야기를 질리지도 않게 쓰려고 드는 것이, 내게 마음에 안 들었나보다. 그랬나보다. 나는 그래서 글을 다 지워버렸다.


2019년 1월 29일은 꽤 괜찮은 날이다. 배탈이 났는지 화장실을 자주 다녀오긴 했지만, 그래도 오전에 일어나서 통장도 만들고, 과외도 일찍 가고, 민원도 처리했다. 계획한 일 중 60%를 성공적으로 끝마쳤다. 남은 40%는 조금 느슨한 것들이니까, 느슨하게 해도 되겠지. 마음을 조금 더 넉넉하게 먹으려고 한다. 


마지막으로 브런치에다가 무언가를 올린게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4월 중에 만든 임시 저장이나, 6월 중에 만든 임시 저장, 9월 중에 만든 임시 저장을 본 거 같기도 하다. 그 긴 시간 동안 나는 살아 있었다. 가끔은 그런 나를 너무 미워했다. 자주 그런 나를 싫어했다. 요즘은 받아들이려고 노력하고 있다. 어때서? 그런 식으로 잠깐 휴식을 주고, 잘난 머리로 나를 설득하려고 든다. 미워할 일 많지만, 해치지 않으려고. 자신에게 벌을 주는 것과 해치는 것은 다르니까. 안 그래도 괴로운데 나는 그동안 자신을 정신적으로 고문하기까지 했었다. 끊임없는 학대나 음습함의 굴레에서 아직 벗어나진 못했지만, 이제 감정이 상하기 전에 도망가는 법은 배웠다. 그 다음은 아마 감정을 받아들이고, 자신을 해치지 않고, 다시 일상 생활을 영위하는 것이겠지.


늘상 과거의 잘못이나 실수, 부끄러움, 화남 같은 부정적인 감정들이 머릿속에서는 깜빡거리고 있다. 괴롭다. 그런 기억들은 대체로 어제 먹은 저녁 식사에 대한 기억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생생하다. 나는 유치원 때 도둑질을 하다 어머니께 엄청나게 혼났던 일이나, 초등학교 때 반에서 우유를 마시다 그자리에서 토를 한 기억, 좋아하던 사람에게 추근덕거렸던 기억, 퇴짜 맞았던 기억, 말실수, 다툼 같은 낡은 기억들이 가지고 있는 부정적인 느낌들을 너무 강렬하게 경험한다. 특별한 자극이 없더라도, 일상적인 자극으로부터 그런 기억들이 점화되고 환기된다. 괴롭다. 의사 선생님은 그런 식으로는 일상 생활이 되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고 했다. 


"뭐 때문에 그런 거 같으세요?"

 내가 묻고 싶은 말이었지만, 어쩌면 거기에 힌트가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담치료를 받는 동안에는, 몸의 긴장을 풀고 좋은 기억들을 떠올리는 훈련을 하고 있다. 나쁜 기억을 희석시키는 작업 같다. 선생님의 표현을 빌리자면, 마치 언 고기를 녹이기 위해 오븐을 예열하는 것 같다. 반복되던 시간 속에서 그래도 무언가 바뀌는 것들이 하나 둘 생겼다. 아직 갈 길은 한참 멀어보이지만, 차근차근 걷다 보면 미래에는 도착해있지 않을까 싶다. 그러려먼 오늘 한 걸음, 아니 반 걸음이라도 어떻게든 내딛어야 할 것이고.


이런 것들은 어렵다. 결국 나만이 나를 구할 수 있다. 힘들고, 엉망진창인 삶이 의미가 업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그게 잘못이라고는 더더욱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아픈게 싫다면 병원에 꼬박꼬박 가야 하고, 죽을둥 살둥 기어 오르려고 노력할 수 밖에 없다. 사과나무에서 떨어지는 사과를 받아 먹으려고 해도, 최소한 사과나무 밑에는 누워야 할테니까. 그리고 그러지 않고서는 나을 수 없으니까. 그래서 오늘은 글을 썼다. 작은 반 걸음을 기억하고 칭찬하려고. 나를 해치지 않으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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