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대와 실망
짐을 대강 풀고 나서 화장실로 들어가 온수를 콸콸 틀어놓은 채 샤워를 했다.
"아, 행복하다."
나도 모르게 육성으로 내뱉은 말이었다.
신이 난 마음에 수도꼭지를 왼쪽으로 더 밀어봤다. 살면서 눈치 안 보고 온수를 콸콸 틀어본 적이 없었는데.. 샤워기에서 거침없이 뿜어져 나오는 따뜻한 온기란 모든 피로를 물리쳐줄 만큼 좋은 거란 걸 이 집에 들어오고 처음 알았다.
그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오롯이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을 할 수 있는 것. 독립의 가장 큰 장점이자 이것만으로도 독립할 가치는 충분한 것 같았다.
아직도 풀지 못한 짐가방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시간도 늦었거니와 더 이상 무리하면 내일 출근을 못 할 것 같...
이런 젠장. 진짜 상상도 하지 못 한 상황 발생.
"드르렁드르렁 커크어엉컥겅"
얇디얇은 벽을 손쉽게 통과한 채 내 고막에 닿은 소리.
바로 옆집 남자의 코고는 소리다.
저 정도면 사람이 아니라 곰이 아닐까..?
저렴한 방을 구한 탓에 방음이 잘 안 될 거란 걸 이미 각오했었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은...
앞으로 2년을 저 곰과 함께 살아야 한다는 게 암담했다. 시작부터 제대로 꼬여버린 순간.
음악의 힘을 빌려 어찌어찌 잠을 청하곤 간신히 일어난 다음 날 아침.
한 달 반 만에 가는 회사 복직 날이었다.
오랜만에 사람들로 꽉 찬 지하철을 타니 비로소 원래 자리로 돌아온 느낌이 들었다.
예전 같음 동태 눈을 한채 축 늘어진 어깨를 하고선 출입문을 열었을 테지만, 죽다 살아 돌아와서였을까 아님 한 달이 넘는 휴식기간 때문이었을까, 출근하는 발걸음이 제법 가벼웠고 심지어 설레기도 했다.
당장 오늘부터 이곳에서 증명하고 싶은 것들이 있었다.
사람들에게 더 다정하고 친절하게 구는 것,
잘 베푸는 것,
잘 용서하는 것 등등
병원에 입원했을 때 나 자신과 한 약속들이다.
처음엔 쉬웠다.
내가 미션을 수행한 만큼 그들에게 보답받는 것도 있었다. 앞으로는 점점 더 잘할 수 있을 거란 자신감도 생겼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 기대는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기대할수록 실망이 생기는 법이니, 내가 상대에게 베풀었다고 생각한 만큼 자꾸 보답을 기대했다. 그리고 그만큼 실망이 늘어갔다. 내 안의 긍정에너지도 차츰 고갈돼 0에 수렴하기에 이르렀다.
이미 기대와 실망 간의 상호 관계를 잘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막상 그 상황에 놓이면 쉽게 망각해 버리는 나였다.
병원 침대에 누워 꿈꾸곤 했던 새로운 나는 저 멀리 가버렸고, 기대는 그저 환상일 뿐이었다.
가끔 아빠에게 심한 화를 퍼붓기도 했다. 단순히 화의 감정을 넘어선 일종의 병적인 거였다. 평소 같으면 그냥 조용히 넘어갔을 일도 나는 마치 발작을 일으키듯 소리를 질러대며 분노를 표했다. 이런 내가 너무 당황스러웠다. 이런 것도 수술 후유증에 해당될까. 꼭 정신병자가 돼버린 것 같았다.
게다가 결벽증까지 생겼다. 비장을 뗀 후로 감염에 취약해졌다는 생각에 타인과 접촉하는 것, 사람 많은 곳에 가는 것, 누군가 기침하는 것에 극도로 예민해지고 싫어졌다. 손 씻는 버릇도 강화돼 하루에도 몇 번이고 비누로 손을 씻고 소독제를 발라댔다.
......
내가 원한 모습은 이런 것들이 아니었는데..
너무 드라마를 꿈꿨나.
삶이라는 현실은 드라마가 아닌데..
실망이 파도처럼 밀려들어왔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결코 포기하지 않은 게 있었다.
'모든 선택지에는 내가 1순위일 것'
어떤 선택지가 앞에 놓여도 내가 다치지 않고 행복할 수 있는 선택을 우선순위에 놓자고 다짐했다. 이 역시 살면서 많이 해보지 못한 사고라 순순히 이행하는 게 쉽지 않았다. 그래도 다시는 아프지 않으려면 이것만큼은 반드시 지켜야 할 것 같았다.
그렇게 조금씩 나의 행복을 위해 애쓰고 노력하며 1년을 보냈다.
"다 잘 될 거야. 이제 더는 아프지 않을 거야."
어느덧 시간이 흘러 2022년 겨울이 되었고,
더 이상은 아프지도 않고 마냥 잘 살아갈 줄만 알았던, 아니 기대했던 나는 또 다시 수술대 위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