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 차 췌장암 환자입니다.

허리디스크

by 다정오

또다시 대학병원으로 향했다. 췌장암 수술을 받고 건선 치료를 위해 여러 번 방문했던 바로 그 병원.


응급실로 가야 그나마 빠른 진료가 가능하다기에 난생처음 응급실에 갔다.

사실 그곳에 입장하기 전예상치 못한 검문을 거쳐야 했다.


"이곳은 정말 응급한 환자들만 오는 곳입니다, 진료 대기만 3시간 이상 걸릴 수 있습니다, 진료비가 예상보다 많이 청구될 수 있습니다". 등등


몹시 엄근진한 자태로 매뉴얼을 읊는 직원의 아찔한 질문들에 겨우겨우 동의를 고 나서야 응급실 자동문이 스르륵하고 열렸다.

그 안에는 많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대체로 보호자들인 것 같았는데 그중엔 나처럼 제 발로 걸어 들어온 환자들도 있었다.

하.. 나도 나름 응급한데... 이곳엔 나를 신경 써 줄 이가 아무도 없구나.

그럼에도 불쾌함이나 화나는 감정이 들진 않았다. 조금 전 검문소에서 고지받은 대로 나보다 훨씬 더 응급하고 그야말로 생사를 오가는 사람들이 있었기에 두 발로 서있을 수 있는 나는 그냥 잠자코 기다리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1시간, 2시간, 3시간...

어느새 날이 저물어 깜깜해졌다. 3시간 만에 드디어 내 이름이 호명되었고, 엑스레이부터 찍으라고 했다.

그 후 또다시 시작된 기나긴 대기.

잠시 후 자신을 인턴이라고 소개한 어느 선생님께서 내게 신발을 벗고 엄지발가락을 위로 들어보라고 시켰다. 역시나 잠잠한 나의 오른발가락들...

이를 본 선생님은 금세 어딘가로 사라졌고, 한참 뒤에 다시 나타나 처방전을 내밀었다. 그리고 오늘은 뭔가 해줄 수 있는 게 없으니 처방해 준 진통제를 먹고 조만간 다시 외래진료 예약해서 오라고 했다.

장장 4시간을 참고 기다렸지만 그렇게 진통제만 손에 덩그러니 든 채 허무하게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래도 내 상태가 그리 엄살은 아니었는지 이틀 만에 외래진료가 잡혔다.


이틀 뒤.

내 허리 MRI 사진을 본 의사 선생님은 "히이이-" 이렇게 놀라움을 소리 내어 표현하셨다. 그러고는,

"OO님의 디스크가 심한 상태긴 해요. 게다가 무뎌진 오른발 감각이 계속 지속될수록 원래 상태로 회복되긴 어려워요. 영영 안 돌아올 수도 있고요. 되도록 빨리 수술해야 합니다."


......


단숨에 엄청난 말을 들어버린 나.

다리 속에 피 대신 모래알이 잔뜩 든 것 같은 이 찝찝한 기분을 평생 느낄 수도 있다니... 게다가 영원히 발을 질질 끌며 절름발이처럼 을 수도 있다니..


빨라지다 못해 고장 나버린 것 같은 심박수를 온전히 느끼며 선생님께 질문했다.

"그럼 제가 장애인이 되는 건가요?"

"일단 수술하고 재활 열심히 하면 늦게라도 감각 돌아오는 경우 있으니까 너무 걱정 마세요."


......


걱정 말라는 말, 조금의 위로나 위안이 되지 않았다.

난 정말 몰랐다. 고작 허리디스크 때문에 장애가 생길 수 있다는 사실을.

많은 사람들이 겪는 병인 데다 물리치료받고 운동하면 금세 좋아지는 매우 흔하디 흔한 질환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디스크가 제대로 신경을 건들 때면 아파 죽을 것 같았지만, 이게 장애를 유발할 정도로 파급력 있는 병인지는 정말 꿈에도 몰랐다.

내가 너무 얕봤던 것 같다. 내가 너무 무시했던 것 같다.

우리 몸엔 안 중요한 데가 한 군데도 없는데. 어떠한 병이든 어디선가 아프다고 신호를 보내오면 거기에 귀를 기울이고 잘 보살폈어야 했는데.


'넌 암까지 걸렸으면서 왜 아직도 그 사실을 몰랐던 거니. 정말 한심해.'


췌장 수술을 받고도 여전히 정신 못 차린 나는 또다시 스스로를 절벽 위에 세우고 말았다.


선생님은 되도록 빨리 수술해야 된다고 말씀하셨으면서도 선뜻 추진하지 않으셨다. 그의 복잡한 표정을 보니 뭔가 복잡한 병원 시스템 때문에 쉽게 결정 내릴 수 없는 듯 보였다.


결국 선생님은 이 병원에서 응급 수술받는 건 어려울 것 같고, 자신의 선배가 개업한 병원에서 수술받는 건 어떤지를 물었다.

나는 이미 공포심에 휩싸여 마땅한 선택지를 펼쳐볼 여력이 없었으므로 알겠다고 답했다.


그날은 12월 중순이었고, 찬바람이 유난히도 시렸던 겨울날이었다.

내 힘없는 오른 다리를 질질 끌고서 홀로 수술할 병원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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