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9월 28일(화). 날씨 매우 맑음
학교 수학여행 가정통신문에 쓰여있던 기다란 준비물 목록 이후 오랜만에 받아본 입원 준비물 안내문.
새로 구입해야 할 게 생각보다 많았다.
휴.. 한숨 나오게 하는 군.
이럴 때마다 깨닫는 삶의 진리.
아프면 다 돈이다!!!
비용을 아끼기 위해 웬만한 건 당근 하거나 친구에게 빌렸다. 그렇게 준비한 물건들을 방 안에서 차곡차곡 가방에 챙겨 넣는데, 행여 거실에서 티비 보는 엄마에게 들킬까 조심조심 은밀히 챙겼다.
전에도 엄마에게 병원 다녀온 걸 들킬까 전전긍긍한 적이 여러 번.
현타가 온다.
난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걸까? 스스로가 이해 안 되면서도 결국엔 수긍하고 마는 나.
'어쩔 수 없잖아. 엄마를 속이는 건 미안하지만 서로에겐 이게 최선이야. 아무 일 없는 듯이 잘 지내는 척하는 거.'
간혹 엄마에게 솔직히 말을 해야 할까 의문이 들 때마다 끝내 침묵하자는 판단을 내렸다.
'잘하고 있는 거야. 잘 한 선택이야.'
이렇게 정합적이지 않은 합리화를 시키며 날 다독였다.
일찍 잠에 들었어야 했는데, 긴장감을 이겨내지 못해 밤을 지새우고 맞이한 9월 28일, 내 생일이자 입원 당일의 아침이다.
매년 생일이 다가올 때쯤 느낄 수 있는 맑은 하늘, 선선한 바람, 따뜻한 햇살.
생일이라는 것에서 가장 그리고 거의 유일하게 좋아하는 점은 이런 날씨였다. 좋은 예감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상쾌한 날씨가 불필요한 긴장감을 덜어내줬다.
엄마에게는 일주일간 여행 간다고 뻥을 치고서 짐 가방을 들고 집을 나왔다. 마음이 편치 않았지만 늘 그랬듯 잘하고 있는 거라며 또다시 자기 합리화를 했다.
말의 힘인 걸까? 버스정류장으로 향하는데 진짜로 여행 가는 기분이 들었다. 대단한 모험이라도 떠나는 것 마냥 들뜬 기분.
'그래. 난 살러 가는 거야. 이건 생존을 위한 여행인 셈이지.'
병원에 도착해 홀로 입원 수속을 밟았다. 내가 입원할 병실은 간호간병통합병동(간병인이나 보호자 입실이 불가한 대신 간호사가 케어해 주는 병실. 24시간 옆에서 상주하는 건 아니지만 도움이 필요할 때마다 호출 버튼을 누르면 밖에 있는 간호사가 찾아온다.)이었는데 여러모로 편리하고 가성비가 좋아 예약했으나 이런 젠장. 내가 들어가기로 한 병동 환자의 입원 기간이 갑자기 늘어난 바람에 하는 수 없이 하루(어쩌면 이틀까지도 자리가 안 날 수 있다고 했다) 일반 병실로 들어가야 했다.
'그럼 그렇지. 일이 순조롭게 잘 풀릴 리가 없지'
평소 같음 아주 자연스럽게 의식의 흐름이 날 비아냥대며 쑤셔댔겠지만 그날만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아니야. 더 좋은 일이 생기려나 보다. 괜찮을 거야.'
일부러 긍정 회로를 돌리며 비아냥대는 고약한 음성을 소거하기 위해 애썼다.
마음이 나를 보호하기 위해, 살리기 위해 애쓰기 시작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6인 일반 병실로 들어가니 전부 연세가 많은 환자들이었다. 다들 옆에 간병인이 계셨는데, 음.. 이런 분위기 이젠 익숙해.
다행히 문에서 가까운 침대를 배정받아 그녀들의 시선을 덜 받은 채 사물함에 가방을 넣고 환자복으로 갈아입을 수 있었다.
그간 심전도 검사, 폐검사 등등 수술 전에 받아야 할 검사들이 꽤 많았는데, 오늘도 수행해야 할 검사들이 줄줄이 소시지였다.
띠리링 띠리링
침대에 누워 검사 시간을 기다리고 있는데 대학시절 나름 친하게 지냈던 선배로부터 전화가 왔다.
"OO아 생일 축하해~ 잘 지내고 있지?"
전혀 예상치 못 한 인물에게 축하 연락을 받으면 기쁨이 두 배가 된다는 걸 경험했다. 고마움에 반가움까지 더해지기 때문인 걸까. 통화를 끊자 행복호르몬이 왕성하게 분비되었음을 느꼈다.
생일 축하는 이거면 충분해. 만족스러운 생일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이상하다. 트루먼 쇼인가 싶을 정도로 반가운 손님들에게서 자꾸 연락이 왔다.
"OO아 생일 축하해. 오늘 뭐 해?"
축하는 고마운데 난감한 질문을 맞닥뜨리니 전화를 끊고 싶어졌다.
"소화 기관 쪽에 작은 혹이 있대서 그거 제거하려고 병원 왔어."
대충 둘러댔다.
실은 지금까지도 사람들에게 내 병명을 말하는 게 어렵다. 췌장이라는 단어가 주는 이상한 무게감이랄까, 공포감이랄까.. 괜히 날 심각하게 보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서 일부러 가볍게 표현하곤 한다.
생일이었기에 받을 수 있었던 선물 같던 지인들의 애정 어린 말들은 날 웃음 짓게 했다. 비록 비대면 만남에다 진솔한 대화는 나눌 수 없었지만 그래도 좋았다. 모처럼 풍성하게 보낸 생일이었다. 이런 날에 입원해서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곁에 아무도 없어도, 내일 큰 수술을 앞두고 있어도 별로 외롭거나 무섭지 않았다.
기분이 좋았던 나는 핸드폰 캘린더에 꽤 거창한 문구를 저장하고선 또 다른 검사를 기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