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을 사랑스럽게 보자
세상에 한 번 생긴 것은 절대로 없어지지 않는다고 말해준 것은 연숙 아줌마다. 아주 먼 옛날의 별빛을 이제사 우리가 보는 것처럼 모든 있었던 것, 지나간 자취는 아주 훗날에라도 아름다운 결과 무늬로, 그것을 기다리는 사람에게 나타난다. 부드럽고 둥글게 닳아지는 돌들, 지난해의 나뭇잎, 그 위에 애벌레가 기어간 희미한 자국, 꽃 지는 나무, 그것을 사랑이라 부르고 그 외로움이 우리를 살아가게 하는 것이라고, 그래서 바람은 나무에게 사무치고 노래는 마음에 사무치는 것이라고 말했다.
오정희 <새> 中
회사를 나온 뒤로 시간에 쫓겨 무언가를 하는 경우는 손에 꼽을 정도로 적다. 그런 나에게 거의 유일하게 시간의 압박을 주는 스케줄은 '일취월장' 모임이다.(이제 내 애독자라면 이 모임의 이름 정도는 안다. 참고로 내 브런치 애독자이자 모임에 와야 하는 누나는 어제부터 지금까지 연락두절이다. 뭐 뒷담화를 하려는 의도는 없다.) 한 주의 시작인 월요일 아침에 다같이 모여 그 주의 계획을 공유하는 것은 모임 자체만으로 의미가 있다. 그런 모임에 이번 주부터 작은 변화가 있다. 바로 모임 시작 시간이 조금 바뀐 것이다. 원래는 7시였지만, 8시로 바뀌었다. 이 모임을 시작한 친구가 두어 달 간 유럽과 미국 여행을 가서 리더가 공석이 되자 모두가 뜻을 모아 규칙을 바꿨다. (이 자리를 빌어 리더 친구에게 약간의 미안함을 전한다...)
1시간만 뒤로 미뤄졌을 뿐인데 그것의 파급력은 어마어마했다. 우선, 기상 시간이 바뀌었다. 원래 6시반이었으면 헐레벌떡 뛰어나온 뒤, 급하게 택시를 잡고 나왔을 것이다. 오늘 이 시간에 일어난 나는 스트레칭을 한 뒤, 샤워를 하고 꼼꼼한 준비를 마치고 나서 문 밖을 나섰다. 온 몸에 여유란 것이 흘러넘쳤다. 발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둘째, 조금 늦게 잠들어도 부담감이 없었다. 월요일을 제외하고 딱히 내 시간에 제약을 걸 만한 일은 없다. 그러다 보니 밤늦게 잠이 든다 해서 내 삶에 지장을 초래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내가 일하고 싶은 순간까지 에너지를 집중해 글을 쓴 뒤, 지쳐 잠들면 훨씬 그 다음 날에 개운하게 하루를 시작할 수 있었다. 결정적으로 나 뿐만 아니라 대부분 친구들이 이 변화에 긍정적 입장을 표명했다. 이처럼 매일 나를 찾아오는 6시반이라도 그 소중함이 요일에 따라 천차만별 달라진다.
시간만 그런 게 아니다. 내 주변에서 흔히 보이는 것들을 조금만 달리 보면 그 의미는 사뭇 달라진다. 우리에게 그 의미가 훅 들어오게 될 때가 언제일지 생각해 보았다. 보통의 것들이 만들어 왔던 내 환경에 변주를 주려고 하면 그게 더욱 소중하게 느껴졌다. 원래 내 모근이 그리 튼튼하지 않았다. 탈모와 관련된 집안 내력까지 있어서 약간의 신경은 쓰고 있었지만 퇴사 후, 탈모로부터 조금 자유로워졌다. 스트레스를 많이 받으면 머리가 빠지기 마련인데 퇴사하고 나니 나를 옥죄던 스트레스의 80%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내 머리 건강에 좋은 샴푸까지 쓰며 더욱 그러했다. 그러다가 내 머리를 아껴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좀 더 강렬한 색으로 염색을 하고 싶어 미용실을 찾아갔을 때였다. 원래는 은발을 하고 싶었다. (샤이니 빠인데 민호의 은발이 마음에 들었거든요...) 그러나 내 모근으로는 은발이 어렵다는 판정을 받았다. 탈색이란 과정을 거쳐야 하는데, 그걸 견디기엔 제 모근이 그리 튼튼하지 않았던 거다. 그 얘기를 들으니 역설적으로 여태까지 버텨 준 내 머리카락이 사랑스러웠다.
나만의 자취를 찾고 싶었다. 분명히 본래 내가 갖고 있던 내 냄새(a.k.a 매력이라 부르겠다.)가 있었는데, 모두가 똑같이 모니터만 쳐다보며 판매 가격만 시스템에 입력하는 모습에 답답함을 느꼈다. 회사 내에서 돌파구를 찾으려고 노력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러려면 지금 이 부서에서 다른 부서로 가서 완전히 새로운 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 유감스럽게도 그런 변화는 내 의지만으로 맞이할 수 없다는 걸 하루 하루 회사를 다니며 알았다. 회사 내에서 천덕꾸러기인 나는 어느 곳에서도 환영받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다른 부서 사람들과 비업무적으로 끈끈했나 보면 그렇지도 않았다.
주말에 방에 누워 있다가 잠시 내가 누군지 생각해 본 적 있다. 대학 때의 나는 총기 어렸다. 적극적으로 모임을 구성하고 나와 비슷한 똘기 가득한 친구들과 다양한 프로젝트를 했다. 성공이냐 실패냐는 나에게 중요치 않았다. 시도하는 것만으로 가슴 뛰었다. 회사에 다니던 나는 윗사람의 눈치를 보고, 조직에 내 행동이 해가 되지 않나 등을 챙긴다. 대개 내 생각은 조직과 완전히 따로 노는 경우가 많다. 내 자취가 사라지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 나는 내 자취, 향기를 되찾기 위해 회사를 나왔다.
회사를 나온 지 4개월여의 시간이 지났습니다. 누군가 나에게 너만의 향기를 찾았냐고 묻는다면 시원하게 그렇다고 답하기는 아직 이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전에 비해 제 향기가 짙어진 것은 맞습니다. 내가 결정하는 내 삶, 내 선택에 대한 결과는 무조건 내가 책임지니까요. 그것만으로 제 마음은 약동하는 봄의 기운과도 같아짐을 느낍니다. 설렘이란 향수를 몸에 가득 뿌리고 오늘 하루를 힘차게 살아야 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