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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리하리 Oct 16. 2018

나의 고향, 노원과 멀어진 이유

설사 잘못된 결정이라도 결국 내가 한 거니까 후회는 없다

옛집이 점점 점점 내게서 멀어졌다. 고향산천도 점점 멀어졌다. 하지만 나는 아무 미련도 없었다. 나는 그저 내 주위에 보이지 않는 높은 담이 둘러쳐 있고 나 혼자 그곳에 떨어져 있는 것만 같아 몹시 답답했다. 은목걸이를 하고 수박밭에 서 있던 그 어린 영웅의 모습이 예전에는 내게 아주 생생했다. 하지만 지금은 갑자기 희미해졌고, 그 또한 나를 한없이 슬프게 했다.


루쉰 <고향> 中


자기소개서 쓰는 일을 도와주면서 많은 친구들이 취업을 왜 하고 싶은지? 물어보면 나와 굉장히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의 보호 아래 지내오면서 안정된 면도 있었지만 어느 정도의 간섭이 있을 수밖에 없고, 경제적으로 그 분들에게 의지하는 만큼 제 결정권을 발휘하거나 주장하지 못하고 그들의 지시에 따라야 하는 서글픈 상황에서 벗어날 방법으로 취업 만한 게 없으니까 말이다. 쉽게 말해 경제적 독립을 통해 진정으로 부모님이 만든 둥지에서 훨훨 날아가는 것이다. 나도 그랬다.


오랫동안 아버지의 그늘 아래 있었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워낙 유난스럽게 나를 몰아세우고 내 삶에 관여하다 보니 나설 재간이 없었다. 그것도 그것이지만 어머니는 나를 믿어 주었다. 알아서 잘 할 것이라면서 안 보이는 곳에서 아버지에게 시달린 뒤, 분해 하는 나를 달래 주셨다. 좋은 대학을 어렵사리 4수 끝에 들어갔다. 머릿속으로 한의대를 갈까 생각도 했다. 한의사에 대한 열망 그런 거는 관심 없었고, 지방에 가면 아버지와 떨어져 있을 수 있었으니까. 군대에서의 생활이 좋았던 것만은 아니지만 집과 떨어져 있어 아버지와 말을 많이 섞지 않는 것이 좋았다. 동생이 첫 대학에 가서 교양 수업으로 사주를 공부했는데 그 당시 나와 아버지는 상극이라 절대 붙어 있으면 안 된다고 했다. 그러나 내가 경제적으로 자립하지 못했으니까 집에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귀가시간이 조금이라도 늦어지면 집에서 잔소리를 폭격하는 아버지의 모습은 나에게 엄청난 스트레스였다. 물론 그 말이 단 한 구석도 틀린 게 없었다. 그러나 내 생활이 그렇게 (때로는 인신공격 수준) 얘기 들을 정도로 방탕한 게 아니었다. 다만 성적이 좋지 않은 것이 아버지가 나를 뭐라 하는 유일한 이유였다.


그러나 나는 꿋꿋이 공부하지 않았다. 공부하기 싫었으니까. 결국 3점을 갓 넘겨 졸업했다. 그래도 LG그룹의 계열사에 들어갔다. 부모님 두 분 다 좋아했지만 아버지는 굉장히 기뻐하셨다. 그 와중에 불현듯 나에게 결혼이라던가 그 뒤의 내 삶에 대해서도 넌지시 얘기를 꺼내실 때, 소름이 돋았다. 정말 아버지에게 나는 자신의 부족했던 삶을 대신 살아 주는 마리오네트 같았다. 첫 부서를 우리 집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오산에 나를 배치해 준 회사가 고마웠다. 불가피한 이유로 나는 집안의 그늘에서 벗어났다. 정말 행복했다. 그 당시 차도 있었겠다, 저녁에도 서울을 제 집 드나들듯 오가며 혼자만의 생활을 즐겼다. 간혹 전화 와서 집에도 오지 않는다고 타박을 받았지만 전화 받을 때에만 잘 대처하면 그만이었다. 그러다가 나도 사람인지라 아버지에게 전화도 드렸다. 출장 다니다가 고속도로가 꽉 막힐 때, 아버지에게 전화를 드리면 집에 있던 아버지는 말로는 아닌 척 하셨지만 기뻐하며 나와 통화를 했다.


그러나 회사 생활이 녹록하지 않았던 나는 오산에서 본사의 영업팀으로 부서 이동을 발령받았다. 광화문에서 출퇴근하니 이제는 서울 집에서 살아야지. 상상했다. 이제 나도, 아버지도 나이가 들었고 경제적으로 독립한 회사원이니 이전의 갈등은 없을 거라고. 유감스럽지만 착각이었다. 집으로 돌아온 지 1주일 만에 아버지는 나가려던 나를 불러세우고 부모님이 있는 집으로 돌아왔으면 집에서 밥도 한 끼 해야지 등과 같은 얘기를 시전하기 시작한다. 아버지는 나를 위한 것이라고 자꾸 항변하지만 나는 거의 패턴이 같은 얘기들을 십여 년 넘게 들으면서 트라우마가 생겼다. 어렸을 때, 어떤 짓을 해도(범법 행위 제외!^^) 이해하고 모른 척 하는 부모님을 둔 친구들을 부러워할 정도였던 나다. 다시 시작된 그 시간이 고통스러웠다. 그 때, 다짐했다.


집을 다시 나가야겠구나.


귀찮기도 했고, 바쁜 회사 일을 핑계로 바깥에서 잔 게 몇 달 되었다. 차에 옷을 두고 다니며 버텼다. 집에는 과장 집이 고객사였던 동탄 부근에 있다는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들며 집을 들어가길 거부했다. 그러다가 마음이 맞는 과 후배와 지금의 집과 계약해 머물게 되었다. 회사를 나오는 결정을 빠르게 하고 실천으로 옮긴 것도 아버지와의 소통 단절이 컸다. 내 결정이 무조건 정답이 아님은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 결정을 내리는 건 내 삶이다. 내가 바보가 아닌 이상 무모한 결정을 하지 않을 텐데 그것에 일일이 제약을 걸려고 하는 아버지를 설득시키는 데 드는 에너지는 제가 새로 추진하려는 일에 방해가 될 정도였다. 그렇게 아버지와 대화를 끊은 지 서너 달이 다 되어 간다. 이제 아버지는 내가 퇴사한 것도 알고 있고, 나는 아버지와의 연락을 차단했다. 혹자는 나의 결정이 너무 가혹한 게 아닌가 라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내 행복을 위해 그리고 나의 자아를 잃지 않으며 성공할 수 있는 최선의 방안을 찾았고,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아버지와의 소통을 잠시 단절했다. 아버지에게 보여 주기 위해서라도 매일 글을 쓰고, 매일 고민한다. 훗날 완벽히 성공해서 금의환향한 내 모습을 상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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