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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리하리 Oct 23. 2018

이도 저도 아닌 내 삶에 의미를 찾다

가끔씩 잡는 연필이 키보드로 잊고 있던 무언가를 찾아 주듯

그보다는 세상에서 우체통이 없어지는 쪽이 무섭다. 아무도 편지를 쓰지 않게 되면 우체통도 철거될지 모른다. 휴대전화의 보급으로 공중전화 숫자가 슬금슬금 줄어드는 것처럼.


오가와 이토 <반짝반짝 공화국> 中



이번 주까지 마감하는 오뚜기 신입사원 공개채용에는 특이한 점이 있다. 자기소개서를 손글씨로 써야 한다는 것이다. 이로 인한 불만이 굉장히 많다. 취업 준비생들을 귀찮게 한다, 구태의 온상이다, 안 그래도 시간 없어 죽겠는데 수기로 받을 시간이 있느냐 등등. 왜 소비자들에게 갓뚜기라 불리는 이 기업이 굳이 취준생들에게 욕을 먹어 가며 이렇게 신입사원을 뽑을까 생각을 해 봐야 한다(물론 나도 취준생 입장이었다면, 함께 쌍욕을 했을 확률이 농후하다). 나는 그것을 '잊혀진 것들에 대한 추억' 정도로 내 멋대로 그 이유를 정의내리고자 한다. 이렇게라도 안 하면 사람들은 더 이상 손으로 글씨를 쓰지 않는다. 물론 손글씨를 주제로 글을 쓰면서 컴퓨터 키보드를 두닥거리는 나도 그러하다.


이케아가 맨 처음 한국에 들어왔을 때, 사람들의 열화와 같은 반응을 끌어냈던 것은 그들이 나눠주는 일종의 기념품, 연필이었다. 연필을 갖기 위해 이케아에 놀러가는 사람들이 꽤 많았을 정도니까. 연필을 보며 많은 사람들이 어린 시절의 추억을 떠올렸을 거다. 나 역시 그 연필을 손에 쥐고 나서 오랜만의 손글씨를 적어 보았다. 기분이 색달랐다. 이래뵈도 초등학교 때, 교내 경필 대회에서 금상을 탔던 나다. 그 때는 손글씨가 삐뚤빼뚤한 이들의 필체를 교정해 주는 학원도 있었다. 서예를 배웠던 영향으로 궁서체로 연필을 꾹꾹 누르며 글씨를 한 자 한 자 적었고, 그것이 어른들이 보기에 잘 쓴 글씨라고 생각했나 보다.


매번 선생님들께 방학마다 편지도 썼다. 엄마의 강요가 있긴 했지만, 편지를 쓰고 선생님께 답장을 받는 일련의 과정이 좋았다. 답장을 받기까지 몇 주가 걸렸지만, 답장을 해 주겠다고 약속하신 선생님을 믿고 기다렸다. 그 때에는 그런 기다림의 시간이 전혀 지루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방학의 중간에 내가 뭘 했는지 미주알고주알 말하는 것은 그 자체로 나에게 행복이었으니까. 부모님이 이것 저것 공부를 많이 시키기는 했지만 그것이 훌륭한 어른이 되는 데 막연한 밑거름일 뿐 직결되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압박감도 덜했다. 공부량이 많아도 스스로 여유가 있었다. 다만 고등학교란 곳에 올라가고 나니 조금 사정이 달라졌다. 고등학교 때, 성적 하나하나가 대학교 진학과 연결되고, 어떤 대학교를 가느냐가 인생의 성패를 좌우한다고 배웠던 만큼 스스로 압박감에 많이 시달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웃기는 건 공부하기 싫어 했다는 점이다. 학교란 좁은 울타리에서 상위권의 성적을 유지하며 가능성을 보여 왔던 만큼 부모님의 기대감은 컸다. 그런 것들이 버무려지니 성급해졌다. 인터넷 강의를 하나 듣더라도 무조건 1.5배속에서 2배속으로 해 놓고 들어야 직성에 풀렸다. 강사의 빠른 설명을 교재에 빼곡하게 적어 두는 것은 공부하는 데 낙이었다. 그렇게 적어만 놓으면 공부라고 생각했다. 복습이란 과정조차 시간 낭비라고 생각했다. 그것이 공부의 완성이라는 것을 나이가 들고, 글쓰는 일을 하면서 너무도 늦게 알아 버렸다. 이런 것만 보더라도 난 참 공부하기 싫었던 것 같다.


어렵게 들어간 대학이었지만, 뒤집어 생각해 보면 이제 진정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살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된 곳이 대학이었다. 이전까지는 주어진 정답에 나를 맞추는 삶이었다면 이제는 모든 정답을 내가 찾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우리 아버지는 나의 자율권을 보장해 줄 것처럼 말했지만, 막상 목표로 한 명문대에 들어가니 사정이 달라졌다. 시험 성적에 대해 스트레스를 줬다. 공부를 놓으려고 했던 나는 억지로 공부를 했다. 그러나 예전에 하던 식으로 공부하고 싶지 않았던 나는 겉멋을 부렸다. 교수님의 이야기를 컴퓨터로 적어내리기 바빴다. 분명히 그 공부가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을 알았을 텐데(아니 그 때는 몰랐던 것 같다. 4수까지 했으면 내 공부 방식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했는데 복습을 멀리하던 수험생 때의 공부 방식을 고집했다) 같은 오류를 반복했다.


3점이 겨우 넘는 학점을 받으며(아버지의 압박에도 굴하지 않고)졸업했고, 다행히 부모님의 시각에서 인정할 만한 직장을 갖게 되었다. 4수나 했다 보니 공백기 없이 계속 달렸고(특별히 공부를 열심히 한 것이 아니라 부모님의 속을 썩이기는 했지만) 그 과정에서 지쳐 갔던 것 같다. 공부에 집중하는 것도 아니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살았던 것도 아니고 애매한 상태를 계속 유지하다 보니 더 그랬던 것 같다. 그런 상황에서 이제 회사원으로 소속이 바뀌었다. 회사원의 삶도 내가 원하던 것은 아니었다. 매일 아침 8시반까지 시간 맞춰서 출근하고, 회사에서 버티다가 저녁에 퇴근하는 삶이 너무 싫었다. 이미 정해진 틀에 나를 맞추는 것을 또 하기 싫었다. 다행히도 회사를 다니며 나의 대안을 찾았다. 글을 쓰는 거다. 내가 쓴 글에 누군가 돈을 지불하고, 그것들이 지속적으로 쌓이니 회사라는 틀 없이도 나의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갈 수 있겠다고 확신이 생긴 거다. 가슴 한켠에 묻어둔 채 잊고 살았던 내 삶에 대한 물음의 답을 찾은 순간이었다. 2년간 숱한 모의고사를 봤다. 모의고사를 볼 때마다 언제나 내 스스로의 만족도는 높았다. 이제 됐다! 라는 마음이 들 때, 회사를 그만두고 수능을 보러 고사장으로 떠나려 했지만 그 조건은 쉬이 만들어지지 않았다. 올 초, 그래서 에라 모르겠다 심정으로 회사를 관뒀다. 여태까지의 결과는 대만족이다.




지금의 나는 또래 애들과 다른 삶을 살고 있다. 아침에 늦지 않기 위해 발에 땀 나도록 뛸 필요도 없고, 점심 시간 내에 배가 고프지 않는데도 밥 먹을 필요도 없다. 물론 회식도 마찬가지. 다름이 주는 선물은 별 거 아니다. 잊고 있었던 내 안의 가치를 찾아 주는 것이 가장 큰 선물이 아닌가 싶다. 컴퓨터가 손글씨를 사라지게 만들며 우리가 까먹게 하도록 만든 '느림'의 의미를 나는 퇴사하고 나서야 되찾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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