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단순함이 나를 어디로 데려갈진 모르지만, 그래도
문득 여행이 좋아서 여행을 했던. 그 시절이 그리웠다. 표를 사기 위해서는 매표소로 가야 했고, 고백하기 위해서는 당신 앞에 서야 했던 더없이 단순했던 그 시절.
최갑수 <우리는 사랑 아니면 여행이겠지> 中
요새 날이 갈수록 드라마들의 전개 방식이 복잡해짐을 '드라마 매니아'로서 느낀다. 그 와중에 보면 여전히 한국 시청자들의 사랑을 받는 장르가 하나 있다. 막장이다. 최근에 나온 황후의 품격 역시 그런 장르다. 이 작가는 아내의 유혹으로 시작해 왔다 장보리로 한국 드라마계에 독보적 세계를 구축한 김순옥 작가다. 왜 사람들은 그녀의 드라마를 소위 말해 "욕하면서 보는 걸까?" 그것은 단순함이 가져다 주는 카타르시스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가만히 글을 쓰다 보니 궁금증이 하나 더 생겼다. 왜 사람들은 단순함에서 카타르시스를 느낄까? 그것은 아마도 우리네 삶이 생각보다 단순하지 않기 때문에 대리 만족을 느끼기 위함이라 본다. 이 글로 나는 단순함의 힘 그리고 그 당위성에 대해 말해 보고자 한다.
생각이란 건 절대 한 마디로 정의내릴 수 없다. 단골 카페의 사장님도 얘기했다. 우리 인간은 자기 뇌의 5%밖에 못 쓰는 우매한 존재라고. 여태까지의 발전 속도도 경이로운데, 아직 발전할 건덕지가 더 많다니 소름이다. 그렇게 복잡다단한 뇌를 써야 나오는 생각이란 녀석은 복잡, 그 자체 아닐까? 생각을 다른 말로 이성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성이 발현되는 과정을 대강 (어줍잖은 지식으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어떤 현상(상황)이 우리 앞에 놓인다. 그 현상에 대해 우리는 판단이란 걸 한다. 그 판단의 재료가 되는 것이 이성이다. 말이 좋아서 이렇게 세 단계 정도로 축약해서 정리했지, 그 사이에 우리는 수많은 고민과 번복을 한다. 예전에 쇼미더머니에서 버벌진트가 기존 결과를 뒤집는 결과를 제시해 네티즌들의 많은 비판을 했는데, 나는 그런 번복이 일면 이해되기도 한다. 번복은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는 것인데, 인간은 자기 잘못을 쉽게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나도 그렇다. 그래도 요샌 글을 쓰면서 나름대로 깊은 고민을 하기 시작했고, 그 고민을 글에 담아야 하다 보니 나도 이성을 이제서야 장착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나는 이성보다 감성이 앞서는 사람임을 부인하지 않는다.
이성의 대척점에 있는 것을 우리는 대개 감성이라고 부른다. 감성, 즉 심장이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은 여러 단계를 거칠 필요가 없다. 속칭 다른 말로 본능이라고도 한다. 생각해 보면 내가 퇴사라는 인생에서 중차대한 결정을 내릴 때에도 상당히 감정적이었다. 막말로 내년 5월까지 차 할부가 남아 있었지만, 인생에서 중요한 미션 중 하나로 일컬어지는 결혼에 대한 준비도 거의 되어 있지 않았지만 상관 없었다. 내가 하고 싶어하는 일이 마땅히 있는데 이 곳에 고집스럽게 남아 있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회사를 나왔지만, 후회는 없고 나는 행복하다. 그거면 됐다. 부모님은 내게 말한다. "뒷감당도 안 되는 일을 저질러 버리면 어떡하냐?" 미안하게도 나는 어떤 부분에 있어서만큼은 절대적으로 나를 믿는다. 그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봤을 때, 뒷감당 안 되는 일을 했다. 그것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고, 그 덕분에 행복하다.
이성이든 감성이든 그 후반부엔 행동이란 단계를 거쳐야 한다. 행동을 해야지 나는 그것이 나에게 똥인지 된장인지 분간이 간다고 확신한다. 그런데 그 행동을 하려면 생각보다 큰 용기가 필요하다. 내가 워낙 모든 결정을 거침없이 잘 내리는 편이라 사람들은 내가 고민을 그렇게 많이 하지 않는구나 생각하는데, 그들에게 이렇게 말해 주고 싶다.
고민을 오래 하지 않는다고, 그 깊이가 얕은 것은 아니다.
고. 나도 불안하다. 내 용기가 만용이 되어 소중한 사람을 잃거나 완전히 손해를 볼 수도 있다는 것을 안다. 그 두려움을 모른다면 바보다. 그렇지만, 뭔가 지금의 상태에 안주하지 않고 한 발짝 더 나아가기 위해서는 용기를 내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다. 물론 다른 이들이 용기를 내 줄 수도 있다. 그러면 참 좋지만, 세상은 그렇게 내가 마음 먹은 대로 되지 않는다. 감나무에서 감이 떨어지기를 기다릴 시간에 감나무를 흔든다면, 감이 좀 더 빨리 떨어질 거라 생각한다. 그리고 그 예상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나는 행동한다.
내가 행동해 주면, 다른 이들은 좀 더 편해진다. 그 행동은 전적으로 (이성에 기반한 것이든, 감성에 기반한 것이든) 내가 한 거다. 따라서 그에 따른 결과도 내가 책임져야 한다. 어렸을 때부터 이상하게 그런 책임감에도 불구하고 나를 내던진 적이 많았다. 사전 교육을 받으며 철없을 때 상처도 많이 받아 그런지 그 상처들이 무섭지 않다. 상처로 인한 고통도 내 몫이다. 물론 다른 이들이 나에게 상처를 낸 것인지라 그들을 원망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그런 원망이 일종의 책임 전가라고 봤다. 비겁한 처사로 느껴진다.
주저해서 생기는 감정보다 해 놓고 다치는 감정을 나는 더 사랑한다. 뭔가 외부의 자극은 나에게 또 다른 세계관을 심어 줄 거라는 기대감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뭐든지 넘치면 해가 된다는 것도 알고 있다. 다만 타인의 기준이 어떠할지 잘 모른다. 그런 예측을 잘 하는 이도 아니고. 이 행동이 상대에게 과한 부담을 주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삶이란, 본디 우연과 우연이 만나 만드는 필연 아닌가? 그 우연이 주는 효과가 우리 모두에게 재앙이 아닌, 선물이 되길 바란다. 그 염원을 담아 나는 오늘도 (그 알 길 없는 적정선을 지키며) 행동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