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풍노도의 시기가 또 찾아왔습니다
내가 왜 일찍부터 삶의 이면을 보기 시작했는가. 그것은 내 삶이 시작부터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은희경 <새의 선물> 中
이 도입부를 건드린 것은 유감스럽게도 나는 '이제서야' 삶의 이면을 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간 호의적인 줄 알았던 내 삶이 나에게 참 박하게 다가왔다. 한편으로는 이제라도 볼 수 있는 눈이 생겨서 다행인가? 라는 생각도 든다. 그렇지만 아픈 것은 어쩔 수가 없다. 우리 엄마는 나의 이런 아픔을 꽤 반가워했다. 어렸을 때부터 그렇게 잔소리처럼 말 좀 줄이라고 했는데 뭔가 성숙해지는 것 같아서 좋다고 한다. 점심에 엄마와 통화를 하고 그 내용을 곱씹어 보았다. 말을 줄이는 것과 내 안에 새로운 모습을 보는 것이 어떻게 이어질까? 그 고민에 대한 답을 정확히 찾지 못하다가 방금 나를 만나고 간 전 회사 과장님을 통해서 어렴풋하게나마 들을 수 있었다. 가끔 만나는 어른들은 나에게 정말 신선한 자극을 준다. 참 고맙다.
여러 얘기를 나눴지만, 기억 남는 건 하나였다. 아우라의 차이가 사람의 평가를 가른다는 것이다. 하정우의 걷는 사람에도 보면 하정우가 풍기는 아우라를 어떻게 만들고 고민했는지가 나온다고 한다. 최근에 '나를 바꿀 자유'란 책을 쓴 김민기 작가님도 비슷한 뉘앙스의 말을 한다. 매일 매일 작은 걸음이라도 뚜벅 뚜벅 옮기며 내 안에 내적 자산을 쌓다가 정말로 중요한 순간에 그 아우라를 터뜨린다면 엄청나게 다른 이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나는 나의 아우라가 있을까 그 얘기를 듣는 순간 고민했는데, 그 형이 해 준 말은 이거였다.
너의 밝음이 곧 너의 아우라다
그런데 그 말을 듣고 예전이었다면 해사하게 웃었을 텐데 그렇지 못했다. 너무 밝다 보니 생각보다 행동이 앞서게 되었고, 생각을 깊게 하지 않은 말과 행동들이 상대에게 부담과 가시로 다가갈 때가 많다는 것을 요즘에서야 알았기 때문이다. 의도가 어찌 됐든 결과가 그리 나온 것은 분명히 잘못된 거 아닌가? 게다가 그런 상처를 주고 싶은 생각이 단 1g도 없던 사람이었는데 말이다.
결국, 응축과 꾸준한 행동이었다. 변화가 필요한 적기에 나를 찾아 온 고민들, 나에게 가해지는 압박들이 나쁘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나 역시도 그와 같은 변화를 원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런 면에서 이제부터는 글을 길게 쓰지 않을 요량이다. 이것은 자기소개서가 아니니까 분량을 채우기 위해 끙끙댈 필요가 없다. 좀 더 동굴로 숨어 들어가야겠다. 나를 계속 침잠시키다 보면 부정적 생각이 엄습할 지도 모른다고 하시는데, 나는 그간 너무 긍정적이어서 탈이지 않았을까 싶다. 긍정과 부정의 에너지 사이에서 방황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가장 적절한 균형점으로 가지 않을까?
조류에 따라 흘러가는 캡슐이 갈 곳이 어딘지 예상되는 것처럼 내 생각의 변화에 맞춰 하루하루 살아가다 보면 그 생각들이 나를 어딘가로 데려다 주겠지. 다만, 너무 나를 힘들게 하는 곳이 아니기만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