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김복동>을 브런치 무비패스로 보고 와서
어젯밤 쓴 편지가/오늘 아침에도 부끄럽지 않을 수 있기를,
세상에 그럴 수도 있기를 기도하면서/이것을 서랍 깊은 곳에 둔다.
한 장을 꺼내더라도 어렵게 꺼내고 싶어서지만,/그렇게 폼을 잡을 건 또 뭔가 싶어
결국엔 쓸 만큼 쓰거나 말거나 한다.
장우철, <좋아서 웃었다> 中
새로운 연인과 인연을 맺기 시작한 지, 근 2주가 안 되었다. 그녀와의 첫 기록을 다소 무거운 주제의 영화로 시작하게 되어 그녀에게 조금 미안하다. 사실 이 글을 쓰기보다 성공적 취업을 위해 나에게 자기소개서를 의뢰한 친구들의 글을 손보는 것이 먼저다. 일본과의 총성 없는 전쟁에 접어든 우리나라의 출사표를 받아들고, 벌써 그 출사표로 인해 흔들리는 우리나라 경제를 보고, 그 경제에 직격탄을 맞으면 기업이 흔들리고, 그 기업은 그러면 채용을 줄이고, 나와 내 주변 이들의 밥벌이에 영향을 받을 게 뻔하다. 하지만 이 순간만큼은 내 밥벌이는 생각지 않을 요량이다. 왜냐하면 이 영화를 보고 왔기 때문이다. 그렇다 오늘의 영화는 김복동이다.
영화를 보고 나온 길, 그녀가 묻는다. 평소에도 그녀는 나에게 궁금한 게 많다. 당연히 감흥을 물어본다. 잠시간의 pause 후, 내가 꺼낸 말은 이랬다. "어떤 논평도 감히 할 수 없다."였다. 고작 스크린을 통해 비춰지는 김복동 할머님의 모습을 보면서 슬프다, 일본에게 분노가 치민다 등 갖가지 감정이 교차되었지만, 그걸 입밖으로 꺼내는 게 가당키나 할까? 그 분의 삶을 살지도 않았을 뿐더러 이 영화를 찍으신 감독님처럼 오랜 시간 김복동 할머님 옆을 지키지도 않았다. 확실한 거 하나는 있었다. 가슴이 적적했다. 분명 영화를 보고 온 지난 주 목요일은 더웠음에도 불구하고 왠지 모를 스산한 바람이 내 곁을 스쳐 지나갔다.
영화는 철저하게 객관적 시선에서 김복동 할머님의 행적을 쫓고 있었다. 나에게 있어 객관은 곧 상식이었다. 연인과 얘기할 때, 이런 말을 곧잘 했다. "상식이 통하지 않는 사회를 보면 답답함이 올라온다"고. 상식이 통하지 않는 이들을 보면 분노한다. 물론 그들의 속사정까지 알 수 없기에 함부로 부화뇌동해서는 안 되지만, 이 영화 속에서, 아니 역사 속에서 피해자와 가해자가 분명히 존재하는 영화 속 가슴아픈 사건을, 가해자 측에서는 피해자를 배려하지 않는 뻔뻔함으로 일관하고 있다. 김복동 할머님을 비롯한 피해자 분들이 바라는 게 그리 크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분들이 나이 들면서 예전의 한(限)마저 희미해져 버린 탓이다. 김복동 할머님마저 돌아가시고 유일하게 남은 할머님께서 마지막에 "김복동 할머님과의 기억이 희미해져 간다"고 씁쓸하게 웃으며 말씀하신 인터뷰가 그래서 더욱 가슴 아프게 느껴졌다.
서두에 언급한 편지 관련 인용문처럼 시국이 이렇다고, 일본과의 날을 세우는 용도로 이 영화를 본 후기를 쓰고 싶지는 않았다. 사실 이 글을 쓰면서도 내가 감히 그 분의 삶을 활자로 써 내려갈 자격이 있을 지 끊임없이 자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글을 쓴 것은, 이 글이 하늘에 계신 할머님께 닿기를 바라는 작은 소망 때문이라고 해 두겠다.
역사는 반복되고, 다시금 한일 갈등이 불거지고 있다. 일본은 자신들이 쥐고 있는 카드를 바탕으로 한국을 압박하고 있다. 추측이지만, 그 시발점이 된 것은 일본에서 위안부 문제에 대해 더 이상 재론하지 말라며 줬던 10억엔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 뒷얘기 역시 내가 함부로 짐작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이거 하나만큼은 확신할 수 있다. 김복동 할머님도 투쟁을 다짐하기 이전에 여자라는 점이다. 여자로서 겪었던 부끄러운 과거를 대중들 앞에 공개하기까지 얼마나 큰 고뇌가 있었을 지 그 정도는 모르지만, 그 사실만큼은 확실하다. 이제 나를 비롯해 김복동 할머님의 후손이라 할 수 있는 우리들이 그 분의 유지를 받들어 한국이 더 이상 아픔의 역사를 반복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이 나라를 지켜 나가야 하지 않을까?